푸요: 단단한 발로 총총총. 인내심을 앞질러 가는 개

개 산책에 천부적인 재능 6화 上 편

by 재승



작업 방에서 혼자 누워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 핸드폰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다 침실로 들어갔을 때, 자기 침구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개를 본다. 찬은 정말로 말이 없다. 이 집 안에 살아있는 다른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잠시 잊었을 정도로. 그러다 코코 이후 두 번째로 얼마간 같이 살았던 개, ‘푸요’를 떠올렸다. 푸요는 말이 정말 많았다.


푸요는 동료의 개였다. 코코가 입양 간 다음 해의 겨울, 출장을 가게 된 동료가 푸요를 며칠만 맡아 달라고 했다. 첫날, 그 애는 내내 히융히융 하는 소리를 냈다.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갔는데, 겨우 20분 만에 돌아오고 싶다고 하고선 반나절을 더 울었다.


쇳소리 같은 울음을 얕게 내뱉는다, 새처럼. 몸으로 조르는 법은 없다. 겨우 코끝으로 툭 무릎께를 지르는 것뿐, 야트막한 울음을 길게 흘리는 것으로 산책을, 간식을, 관심을 요구한다. 시선을 자신에게 두지 않으면, 만져주지 않으면 칭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옆에 붙어 있지는 않았다. 일을 하느라 관심을 주지 않으면 침실로 가 홀로 누울 뿐이다. 가끔은 작업 방이 보이는 부엌 겸 거실에 가 앉아서도 울었다.


그해 여름. 동료가 해외에 직장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몇 달 동안 개를 맡아 줄 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의 먹고 사는 일을 응원하고 싶었다. 일전에 푸요를 잠시 맡았을 때처럼.


하나의 개를 여러 가정에서 릴레이식으로 임시 보호하는 일은 일종의 공동체적 돌봄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유기된 개들의 문제 해결에 대한 제도적 공백을 사적 차원에서 메우고 있는 셈인데, 이를 혼자 하기란 쉽지 않다. 구조자와 임시 보호자, 또 다른 임시 보호자, 이동 봉사자 등 각기 떨어진 이들의 도움이 모여 하나의 개가 가족을 찾는 과정이 완성된다. 이때의 돌봄은 단일한 이의 수행이 아니라, 여럿의 손길로 이어 붙여지는 연속적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릴레이 임시 보호는 문제 해결의 일시적 대체가 아니라 돌봄의 본질, 그 자체인 것 같다. 동료와 푸요도 마찬가지의 사정이라고 느겼다. 몇 달간의 절반은 내가 -그 절반 중에서도 주중 평일, 주말 이틀은 다른 친구가-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이가 돌보아 주는 형태로 푸요의 임시 보호가 시작됐다. 논문을 준비하며 직장에 다니던 때라서, 혼자 돌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냥 봉사 정신으로 이행한 결심은 아니었다. 이전에 코코를 돌보았을 때를 떠올리며, 개라는 존재가 또다시 나의 생활을 구제해 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간과한 게 있었다. 나는 푸요와 잘 맞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돌보았던 경험으로 이미 알았다.




# 2023.01.07.

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산책하러 가자고, 간식을 달라고, 혹은 관심을 달라고. 자세한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보챈다. 울며, 새처럼, 바라본다. 내가 비칠 듯이 투명한 눈망울로.


작업을 마치고 책상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코끝으로 무릎을 툭 건드리는 개를 옆으로 슬쩍 밀어냈더니,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잠깐 일어나도 눈에 띄게 펄쩍 일어나며 내 뒤를 쫓는다.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인 걸까. 책상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산책하러 나가기 위한 움직임인지 살피고, 아니 꼭 산책이어야 한다는 바람으로, 운다. 오전 산책을 안 한 것도, 짧게 한 것도 아닌데, 겨우 하루 알게 된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자기 루틴을 관철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푸요는 적극적으로 조를 줄 아는 강아지였다. 애착 형성이 되지 않은 인간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감정적인 교류 혹은 유대감을 쌓거나 서로의 신호를 충분히 알아차리기 전 단계에서 돌봄을 제공하고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자, 인간과 개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겨났다.




# 2023.01.08.

그의 씩씩대는 울음소리를 내가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코끝으로 툭 건드렸을 때, 언뜻 무릎으로 밀어낸 것의 의미를 푸요는 알아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그러면 우린 서로 무시하는 중인 건가?

지금 책상에서 일어나면 개는, 따라올까. 그 종종대는 발걸음으로, 그러나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눈빛으로. 푸요의 발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짤막한 숨을 몇 번 뱉는다.


그의 칭얼거림이 독특하다. 인간을 보고 소리 내는 게 아니라, 허공에 시선을 두고 울기에 그렇다. 꼭 제게 먼저 손 뻗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아닌가. 꼭 개가 특정한 인간에게 무엇을 바란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요청 속에 나는 제외되고 오로지 그의 바람만 들어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령 산책, 아니면 쓰다듬 받기를 원한대도 꼭 나랑 같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기다리는 법 대신 요구하는 것을 익힌 개에게 예상치 못한 감정이 인다. 미세한 짜증. 이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짜증일까.


나의 눈치나 의사를 살피지 않고 적극적으로 애달픔을 표현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를 향한 일종의 가학심인가. 눈치 보지 않고 자란 개가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보내는 그 신호를 모르는 척할 수 있다는 것에 옅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걸까.


다른 인간들은 개의 신호를 보면서도 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느낄까. 그렇게 저무는 하루 끝에 잠드는 개를 보며 못 견디게 힘들기도 할까. 개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무시를 관철해야 하는 불편함 사이에 충돌하는 묘한 감정들을 다른 이들도 느낄까?




* 下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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