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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나라의개짱이 Oct 20. 2024

좋은 직장을 고르는 새로운 기준

회사에서 자신도 모르게 혹사당하고 있지 않은지


 MD는 유난히 결정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결정해야 할 업무의 범위도 넓지만, 결정의 대상 하나하나가 고민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상품을 개발하는 경우의 예를 들어본다.


A라는 상품을 100g으로 만들지 130g으로 만들지, 3,000원에 팔지 3,200원에 팔지. 오늘팔지 내일팔지.
할인율을 50%로 할지 40%으로 할지. 초코맛으로 할지 바나나맛으로 할지.
패키지는 유광으로 할지 무광으로 할지, 대표색이 초록색이 나은지 노란색이 나을지.
셀링포인트는 어떻게 표현할지, 상품명은 뭐라고 정할지. 초도 물량은 몇 개를 생산할지.



보통 아침에 어떤 옷을 입을지, 점심을 뭘 먹을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조차 고민스러울진대, MD의 결정은 하나하나가 수많은 고객들에게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게 되기 때문에 심력의 소모가 훨씬 더 심하다. 결정 하나하나가 매출과 브랜드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그런 결정을 매분 매초 해나가는 게 MD의 업무다.


MD로 7년간 일하며 나는 결정장애가 후천적으로 생길 수 있단 걸 알았다. 하루종일 수십에서 수백 개를 결정하고 나면 몸이 멀쩡해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로해진다. 그렇게 거대한 결정들을 반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제 나는 결정이란 걸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결정할 힘을 모두 잃어버린 나머지 내 저녁메뉴조차 고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난 날엔 가끔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켠 채 몇십 분째 고민만 하기도 한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겨우 메뉴를 골라 먹고 나면 '아 처음에 골랐던 걸 먹을 걸' 하며 후회하기 일쑤다.


내가 원래 이렇게 우유부단했던가? 그냥 지쳐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읽은 뇌과학 책들이 이것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란 걸 알려줬다. 이 '결정력'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영역이거나 정신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육체의 영역에 가까운 문제, 우리가 조금 더 관리하고 컨트롤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의미 없는 결정들을 연이어 내리게 했더니, 그 이후 결정에서는 충동조절능력이 떨어지고, 판단력도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뇌는 하루에 특정 개수만큼의 판단만 내릴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서 그 한계에 도달하면 중요도에 상관없이 더 이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정리하는 뇌



중요한 결정조차 아니었다. 의미 없는 사소한 결정들을 내리게 했더니 이후에 뇌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더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거다.



의사결정은 신경 자원을 대단히 많이 잡아먹는다. 작은 결정을 하는 데도 큰 결정을 할 때만큼이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이때 우리가 제일 먼저 잃는 것 중 하나는 충동조절 능력이다. 이렇듯 충동조절 능력이 급속하게 고갈 상태로 빠져들기 때문에 사소한 결정을 많이 내리고 나면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 안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 정리하는 뇌  



결정력, 자제력은 소모성 자원이라는 거다. 우리의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운동선수라도 덤벨을 끊임없이 들어 올리면 근육이 지쳐서 더 이상 들 수 없는 것처럼 뇌 역시 결정을 반복할수록 지쳐서 결정할 힘이 사라지는 거다. 놀라운 건 결정의 중요함과는 상관없다는 거다. 뇌는 나에게 닥친 결정이 중요한지 아닌지를 모른다. 그저 에너지를 사용할 뿐인 거다. 내가 떨어트리면 큰일 나는 몇억짜리 고가의 미술품을 들고 있는지 생수 묶음을 들고 있는지 내 이두근이 상관치 않는 것처럼. 중요도와는 상관없이 결정 그 자체가 뇌의 근육을 사용한다는 거다.


이 지식에서 깨달아야 하는 바는 명확다. '결정력을 아껴 써야 하는구나.' 시간이 금이라면 결정력은 은이다. 이 사실은 내게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 가 업무에서 결정을 많이 내린다고? 그럼 너는 업무 외에 건 하나도 결정 못할 거란다." 가 중요한 선택을 앞두거나 자기 계발을 위해 무언가를 참기로 결심했는데, 그전에 이미 무언가 결정을 많이 내렸다? 그러면 이후엔 형편없는 의사결정을 하게 될 거고, 참을성은 바닥에 내팽개치게 될 거란 말이다.

 일에 뇌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할수록 일 이외의 것이 희생당하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체력이 달려서도 아니고 의지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우리 뇌가 지닌 물리적 한계 때문이라는 거다. 안타깝게도 일 외에도 우리 삶에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너무나도 많다. 사실 일보다도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을 만족스럽게 영위하고 지속하기 위해 일을 하는 거니 말이다.


이제 업무의 시간뿐만이 아니라 이 결정의 빈도까지 워라밸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래 일하는 게 내 삶의 밸런스를 침범하는 거라면, 많이 결정하는 것 역시 내 삶의 주체성과 질을 훼손시키니 말이다. 퇴근시간만큼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게 업무의 결정빈도가 아닐까. 나 역시 업무가 한 번 변경되며 이를 뼈저리게 체감다. 기존 MD 팀에 있다가 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기존팀에서는 상품의 개발뿐 아니라 프로모션, 운영 등 여러 가지를 함께 맡아 진행했다면 바뀐 부서는 좀 더 상품의 개발과 브랜드 관리에 집중하는 곳이었다. 자잘하게 결정하는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일의 총량이 변화하진 않았는데 일의 성격은 바뀌었다. 이전 일이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결정의 연속이었다면, 현재의 일은 결정의 빈도는 줄고 그 외 계산, 시스템 작업, 보고 등의 다른 업무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퇴근 후의 삶이 바뀌었다. 체력이 남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갈 시도할 힘과 의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주 2~3회씩 가던 운동은 주 3~4회로 늘어서 근육량이 늘었다. 새로운 자산에 투자를 시작했고 꽤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 자아실현을 위해 브런치를 다시 시작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독서량과 공부시간도 늘었다. 나는 내 삶이 천천히 우상향 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크고 작은 목표들을 달성하고 스스로 세운 계획을 지키며 성취감과 도파민에 취했다.


내 삶에 갑자기 큰 깨달음이 찾아오거나 특정 계기를 삼아 각성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살던 대로 산 것이데 예전엔 지쳐서, 혹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둘 더 하면서부터였다.  사소한 결정들에 모두 소진되어 버리던 에너지가 이제 퇴근 후에도 여분이 남아 내 삶에 투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내 삶을 위한 결정들이 쌓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서서히 내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신기한 경험으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맡고 있는 업무의 성격이 내 삶의 질과 자기 계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가 있구나. 몇 시간을 일하느냐 만큼 중요한 게 내가 얼마나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일을 하느냐구나.



 회사원이라면 삶의 질과 평안한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회사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다거나, 퇴근만 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겠다거나, 회사 일에 큰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많은 결정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직무를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회사일이 적성에 맞다,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길고, 내 삶의 큰 부분이기 때문에 우선순위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퇴근해서도 그다지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문제의식을 느낄 게 없다. 최선을 다해 회사일에 집중하고 퇴근해서는 큰 고민 없이 편안히 휴식하면 된다.

그러나 권태로움과 괴로움을 억지로 이겨내며 출근하고 있다면. 회사일과 별개로 내 삶에 더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면. 퇴근 후에 더 많은 걸 하고 싶다면.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그럼에도 퇴근하면 지쳐서 다른 일을 하기 어렵다면 과감하게 부서이동이나 이직을 고려해봐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고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회사에 모든 정신 에너지를 다 투자해도 내 성장과 미래, 생계가 보장되는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해당 고민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수의 고액 연봉자, 내가 하는 일이 전부 나의 기술이자 포트폴리오가 되는 일을 하는 사람, 자영업자나 스타트업의 대표자.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직장인은 업무량과 보상이 정비례하지 않는다. 맡은 직무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일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내가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쏟는 게 장기적으로 합리적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회사에서 결정하고 절제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 사용한 후 여분을 내 삶에 투자해아만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삶의 꾸준한 행복을 위해.


 그 어떤 변화도 결단도 쉽지 않은, 지친 나와 같은 직장인들을 위해 뇌의 에너지를 아껴 쓰는 방법을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돈을 아껴 쓰듯 결정력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여러 뇌과학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1. 한 번에 한 가지만 결정할 것 (하나의 일을 끝내고 다른 일을 하라는 것)

2. 최대한 멀티태스킹을 줄일 것 (멀티태스킹이야 말로 가장 비효율적이고 뇌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 / (업무 중 메일이나 전화, 채팅 등에 답장하고 업무로 되돌아올 때마다 집중력과 뇌의 에너지가 급격히 소모된다고 한다)

3. 일상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결정은 루틴화할 것. (스티브 잡스나 커버그 같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옷만 입는 이유)

4. 모든 일을 내가 다 결정하려 하지 말고 위임할 수 있는 건 위임하고 양도할 것

5. 당은 뇌가 사용하는 유일한 에너지. 적절한 설탕 섭취는 도움이 된다. (격무에 시달리다가 본인도 모르게 '당 땡겨...'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돈을 아껴 쓰는 요노족이 급격히 뜬다는데, 돈 말고 결정력 또한 꼭 필요한 것에만 쓰일 수 있기를, 그래서 모두가 일과 삶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행복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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