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상한나라의개짱이
Jun 02. 2024
MD로 일하며 알게 된 우리나라 비싼 물가의 비밀
7년 차 식품개발 MD가 알려주는 상품 가격 상승의 이유
2024년 우리나라의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의 물가 상승률은 거의 7%였다. 선진국 중 우리나라보다 물가 상승률이 높은 국가는 단 두 개였다. 튀르키예와 아이슬란드.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나라들도, 우리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높은 나라도, 심지어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렇게 난리난리인 미국조차도 우리나라보단 물가가 덜 올랐다는 거다. 예외상황인 튀르키예를 제외하면 전쟁이나 지진 등 그 어떤 국가적 재난도 없는 우리나라의 물가 상승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흔히들 하는 말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물가가 비싼 이유에 대해. 지하자원이 없어서. 땅덩어리가 좁아 대규모로 농업이나 축산업 등을 하기가 어려워서. 인건비가 비싸서. 원재료의 대부분을 수입해서. 전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을 설명할 수가 없다. 위와 같은 상황이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난 이것들 외에 일반 소비자들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물가가 비싼 이유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MD로 일했기 때문에 알게 된, MD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물가의 속사정에 대해.
나는 7년 차 MD다. MD로 일하면서 우리나라 물가, 특히 그중 '가공식품'의 물가가 비싼 이유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우리나라 물가의 비밀은 바로 '독과점'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도 기형적 이리만큼 전체 기업들의 매출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오죽하면 재벌이란 한국말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고유명사가 되었을까.
스마트폰은 삼성. 자동차는 현대기아. 가전은 삼성과 LG. 라면은 농심. 커피는 동서. 이런 식이다. 각 분야에 시장 점유율의 다수를 차지하는 기업들이 존재한다. 한 기업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카테고리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런 카테고리에서도 수많은 중소 브랜드가 패권을 잡기 위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 같은 모습은 아니다. 독점은 아닌 대신 상위 서너 기업이 사실상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과점 상태기 때문이다. 이런 독과점은 소비재 전 분야에 뿌리 깊게 퍼져 있다.
예를 들면 커피는 동서식품이 절대 강자다. CJ는 밀가루나 식용유, 설탕 등 조미료/소스오일 부분에서 압도적인 1위다. 이렇게 브랜드가 널리 알려진 대기업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위탁 생산마저 특정 기업들이 대부분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브랜드가 상품을 제조하고 싶을 때, 혹은 대기업이 케파 문제로 상품 생산이 어려울 때 OEM 전문 회사에 위탁 생산을 맡긴다. 유제품의 경우 '서울에프앤비' 같은 유제품 전문 OEM 업체가 위탁 생산의 상당수를 맡는다.
우리가 많이 마시는 음료수는 어떨까? 상품의 후면 표시사항에서 제조원을 확인해 보면 '삼양패키징'이라고 되어있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페트음료 제조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가 겨우 몇 개 밖에 안되는데 그중 가장 큰 곳이 삼양패키징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음료를 만들어도 그걸 페트병에 충진 할 설비가 없어서 삼양패키징에 위탁 생산을 의뢰하게 된다.
건강기능식품은 어떤가? 이름 모를 인플루언서들의 브랜드부터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아는 대기업의 브랜드들까지 상당수가 콜마나 코스맥스바이오에 위탁 생산을 요청한다.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콜마나 코스맥스는 수많은 브랜드의 화장품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한 엇비슷한 상품들이 서로 네임택만 다르게 붙여져 출하된 후, 각종 플랫폼들에서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시장은 다양한 브랜드가 있는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각 분야 상위의 몇몇 기업들이 지배
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인 거다. 제조사는 한정적이고 플랫폼과 각종 채널들을 진즉 장악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해당 카테고리를 특정 기업들이 독과점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게 작동하지 않는다. 선두 기업들이 결정하는 가격이 시장의 기준이 된다. 후발 업체들은 선두 업체의 눈치를 살피고, 선두 업체의 가격을 기준으로 삼아 가격을 설정한다.
선두 업체는 시장의 과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상품 가격을 인상한다. 그 외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는 과점 업체들은 가격으로 출혈경쟁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소비자들에겐 선택권이 없단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선두 업체를 따라 쉽사리 가격을 올린다. 이들은 여러 해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본인들이 다 함께 가격을 올려버리면 그게 시장 가격이 된다는 걸. 저항할 소비자도 없고, 틈새를 치고 성장할 기업도 없다는 걸. 가격 상승에 대한 비난은 나눠지면 된단 걸.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걸.
그러면 과도한 마케팅비, 브랜드 프리미엄, 각종 판관비 등이 녹아 있지 않은 중소기업의 상품들마저 비싼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곳들은 대규모 생산 설비가 없어 위탁 생산을 요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위탁 생산 역시 앞서 기술했듯 몇몇 업체가 과반을 점유하고 있다. 상품을 제조하기 위해선 위탁 생산 업체들이 부르는 대로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기본 원가의 시작부터 높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규모의 경제에서도 상대가 안 된다. 바잉파워가 있는 대기업들은 원재료를 좀 더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고, 부자재의 대량계약이나 대량생산, 자동화 등에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된다. 중소기업이 마냥 마진을 적게 남긴다고 가격 경쟁에서 이길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본인들만의 기술력과 제품력으로 중소기업들이 살아남으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는 비로소 출혈 경쟁이 시작된다. 대기업들은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않는다. 마트와 각종 플랫폼에서는 연일 할인을 진행한다. 설사 적자를 보더라도 행사는 계속된다. 언제까지? 중소기업이 고사할 때까지.
중소기업은 현금 보유량이나 조달 능력에서 대기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 출혈 경쟁을 감당할 수 없다. 당연히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게 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브랜드 있는 상품이 가격까지 저렴하니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중소기업의 상품은 쓸쓸히 시장에서 퇴장한다. 해당 카테고리는 늘 그랬듯 독과점 기업의 상품들만 남게 된다.
경쟁에서 밀린 기업이 도태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소비자 입장에선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구매하면 끝 아니냐고? 내가 자주 50% 할인 행사로 5천 원에 구매했던 상품을 앞으로 평생 원래 가격인 1만 원에 구매해야 한다는 소리다. 평생 1만 원이면 다행이겠지, 매년 10~20%씩 가격이 오를 테니 말이다. 대체품이 없다는 말은 소비자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말, 가격의 상한선이 없어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가격을 낮춰야 할 요인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평생 1만 원이면 다행이겠지, 매년 10~20%씩 가격이 오를 테니 말이다.
경쟁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세상에서 피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될 절대 원칙이다. 그런데 애초에 경쟁이 되지 않는 구조가 문제고, 경쟁이 끝난 후 독과점에서 오는 부작용은 오로지 소비자가 모두 감수해야 한다는 게 문제인 거다.
물론 이런 기업들 역시 원료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한다. 예를 들어보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세계의 곡창지대 역할을 하던 우크라이나의 밀수출이 큰 타격을 받았다. 자연히 밀가루 가격이 급등했다. 국내에서 밀가루를 수입하는 독과점 3 사인 CJ,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역시 수입하는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들이 공급하는 밀가루를 사용하는 모든 상품의 원가가 상승한다. 과자, 냉동피자, 빵 등 밀가루를 사용하는 모든 상품의 원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물가의 취약성이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언젠가 해결되기 마련이다. 원재료의 가격은 미국 주식이 아니다. 마냥 끝도 없이 우상향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상승이 있으면 하락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결코 이 원물값의 하락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는다. 한 번 올라간 가격은 결코 내려가는 일이 없다.
건강한 시장은 많은 기업들이 경쟁하며 자연스레 도태되거나 성공하며 합리적인 시장을 형성하는 곳이다. 때로는 기술력으로 때로는 가격 경쟁력으로 소비자에게 소구 하며 경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합리적인 소비를 하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독과점한 기업들이 자금력, 기술력, 플랫폼, 영업판로, 인재 등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애초에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 구조인 거다. 경쟁이 잘 일어나지 않은 시장이라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작동하지가 않는다는 거다. 소비자는 선택지가 없다.
여러 기업이 건강하게 경쟁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원물의 가격이 하락했다면 이를 싸게 매입해 시장가보다 더 저렴하게 상품을 제조해 파는 업체들이 등장할 수 있었을 거다. 브랜드로 승부하는 업체보다 가격으로 승부하는 업체들이 등장했을 거다. 마치 최근 미국 시장에서 우리나라 화장품 브랜드들이 약진하는 것과 같다. 합리적인 가격에 높은 퀄리티의 상품을 제공하니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거다.
독과점된 구조는 필연적으로 매년 물가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다. 기업의 목표는 이익창출이다. 꾸준하게 벌고, 더 많이 버는 게 기업의 존재 이유다. 회사를 다녀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출/이익 계획은 늘 전년대비 신장한 수치로 주어진다. 내외부의 큰 변수로 인해 결코 그 계획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계획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계획을 달성하라고 구성원들을 쪼는 게 바로 회사다.
우리나라는 좁은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다. 성장률은 정체되고 있다. 알다시피 출산율은 바닥을 기고 있고 구매력과 가처분소득은 점점 줄고 있다. 이 상황에서 식품 기업들이 꾸준하게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각 부서들이 전년대비 신장하려면 무슨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간단하다. 상품 가격을 올리면 된다. 가격이 많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대체를 찾아 떠나지 않느냐고? 괜찮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비자에게 선택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마트, 롯데마트 같은 국내의 대형마트들이 영업 적자를 기록하고 각종 유통 플랫폼들의 성장이 해마다 꺾여 가는데 반해 여러 식품 기업들이 최대 매출과 최대 이익을 경신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해외 매출의 확대도 한몫하지만 내수시장에서의 상품 가격 상승이 이에 큰 기여를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첨단 테크 기업도 아니고 치킨을 파는 BHC의 영업 이익률이 28%겠는가. 어마어마하다.
MD이기 전에 소비자로서 이런 상황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난다. 근데 반대로 소비자이면서 'MD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소비자들의 각성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브랜드를 많이 따진다. 시장 1위, 판매 1위, 리뷰 1위 같은 수식어에도 약하다. 중소기업이 좋은 퀄리티에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을 내놓아도 잘 선택하지 않는다. 싼 게 비지떡이지 라는 말을 한다. 비싸도 백설, 커피는 맥심과 같은 인식이 자연스럽다. 당연히 각종 채널과 플랫폼들은 브랜드 상품들을 메인에 진열하고, 검색 상위권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브랜드의 상품이라 구매하는 게 아니고 그 상품의 퀄리티가 그만큼 우수하니까 구매하는 거라고 항변할 수 있다. 이 역시 상품을 직접 개발하는 MD로서 반박할 수 있다. 나는 상품 개발을 위해 상품들을 비교하며 시식회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시식하며 상품의 맛, 가격, 구성, 콘셉트 등이 적절한 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MD 조직 내에서도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에 상품의 브랜드를 노출하고 시식회를 진행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브랜드 상품을 고른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신상품 개발 비교 시식을 진행할 땐 일부러 브랜드를 가린다. 철저히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선입견이 배제되고 나면 제품력 있는 중소기업의 상품이 브랜드 상품을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격은 더 저렴하면서 퀄리티는 더 우수한 것이다.
펩시와 코카콜라를 블라인드 테스트 했을 때, 펩시가 더 맛있다고 고른 소비자가 많았다는 전설적인 연구도 있지 않은가. 결국 소비자는 생각보다 상품을 고를 때 브랜드를 많이 고려한다는 거다.
그러니 나는 소비자들이 조금 더 합리적인 소비를 했으면 한다. 다양한 시도를 해봤으면 하고, 조금 더 발품을 팔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거창하게 우리나라 식품 시장의 발전이나 공정한 경쟁 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지갑 사정을 위해서 말이다.
조금 쉬운 방법도 있다. 바로 PL 상품을 구매하는 거다. PL은 유통사가 브랜드를 만들어 관리하고, 제조사에 위탁생산을 맡긴 후 생산된 제품들에 대한 유통과 판매 책임을 맡는 상품들을 일컫는다. 요즘은 쿠팡의 곰곰, 이마트의 노브랜드, 롯데마트의 오늘좋은 처럼 PL 상품들이 많다.
이런 PL들을 만든 국내 제조사들 중 위에서 언급한 기술력이 있지만 독과점 기업 때문에 시장에 진출하지 못한 중소 기업들이 많다. PL상품은 퀄리티는 크게 뒤지지 않는데 가격 경쟁력은 훨씬 더 우수하다. 이런 상품들을 많이 구매해야 독과점이 깨진다. 중소기업들이 더 성장할 수 있고 이는 낙수효과가 되어 시장엔 경쟁을, 우리 소비자에겐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것이다.
PL 상품을 구매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PL 상품은 해외에서 직접 소싱을 해오는 게 많다는 거다.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처럼 독과점 기업들에 의해 시장가가 제한되어 있는 게 아니다. 마진을 덜 남기더라도 시장에 진입하려는 글로벌 제조사들이 차고 넘친다.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만들려는 것이다. PL 상품은 그런 제조사들의 상품을 국내로 들여온다. 원물이 공급되는 현지에서 상품을 바로 제조하기 때문에 국내 제조 상품보다 가격 경쟁력이 우수한 건 당연하고 말이다.
심지어 이런 상품들의 경우 국내 제조사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임에도 퀄리티는 더 우수한 경우도 많다. 제조사들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기술력 있는 국가의 역사 깊은 글로벌 기업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해외 제조사 상품과 경쟁이 심화되면 자연히 국내 대기업들 역시 소비자의 눈치를 조금 더 살필 수밖에 없다.
올해도 많은 가공식품이 적게는 5%씩 많게는 30~40% 씩 가격이 인상되었다. 그에 비해 우리 연봉 상승률은 어떤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소비자들이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기업은 결국 소비자들이 움직이는 데로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 글에 공감했다면 지금 당장 내 '장바구니'를 확인해 보자.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