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기독교에 대한 탐구

by Dion

1. 신과 과학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제외한 우주에서는 사실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전자와 분자의 경우에는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일정한 결과를 일으킨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그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실험으로 이루어집니다.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하지요. (...) 그러나 어떤 사물이 왜 존재하느냐,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 - 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 - 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근원을 탐구하다 보면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의 근원은 원자들의 무작위 조합에 의해 무작위로 발생하는 것이거나, 신에게서 온 것이거나 양자택일이다. 과거에는 후자의 신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근대에는 전자의 과학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 이는 과거와 달리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지식수준이 크게 도약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신의 영역이라고 불리었던 부분까지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수준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과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의 일상 속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은 과학의 활용으로 인한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레 과학을 신뢰한다. 그러니 우리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숫자와 확률적 우연을 신뢰하거나 신을 신뢰해야 할 동기를 잃는다. 하지만 이는 C.S 루이스가 언급한 과학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과학은 결과를 바탕으로 이론을 성립하고 그것을 활용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데 과학에서 그 자연의 법칙은 전제일 뿐 설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과학은 결과를 바탕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인간 역시 매한가지다. 우리는 태어나 있던 존재에 의해 태어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인간 역시 이런 확률적 우연의 결과일 뿐이라면,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가는 게 우리의 의무일까?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과, 신을 믿고 믿지 않을 자유의지가 주어졌을까? 그 모든 것이 그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일까? 나는 언제 확률적 결과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 그 원인을 바라볼 수 있을까? 결과가 이차적인 만큼 일차적인 것을 알아야 진정한 나 자신을 알고 진실된 눈동자로 세상을 직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원인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2. 기독교

역사 속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다. 그 중 자기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칭하고, 그와 동일시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 것일까?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버렸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다시 바로 잡을 것을 명하신다고,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명하신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는 입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로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 10:4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가 1:14-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 13:15)


이를 통해 기독교의 모든 원리와 역사적 사실의 근원은 성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성경을 믿지 않거나 알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어렵다.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믿음을 가장 바람직한 믿음이라 말하지만, 나의 경우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역사적 증거를 따지는 리 스트로벨의 저서인 『예수는 역사다』를 통해 그 증거를 탐구했다.


3. 기독교의 증거

그 증거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사실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리 스트로벨의 저서인 『예수는 역사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신약 성경의 희랍어 사본들은 5,000개 이상의 목록이 있습니다. 호머의 일리아드 희랍어 사본은 650개에 약간 못 미치지요.”
“책의 기록 시기와 가장 초기의 사본의 기록 시기 사이의 간격이 신약 성경만큼 짧은 경우는 없다. 모두 합쳐 약 24,000개의 사본이 현존하고 있다.”
“어느 뛰어난 고고학자가 누가가 언급한 32개의 나라, 54개의 도시 그리고 9개의 섬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는데, 단 하나의 실수도 찾아내지 못했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채로 기록되어 있어요. 바울이 그 책의 중심인물인데 그는 로마에서 수감된 상태입니다. 그 부분에서 책의 내용이 갑자기 끝납니다. (…) 아마도 그 책이 바울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 쓰여졌기 때문일 겁니다. (…) 그 말은 사도행전이 기록된 시기가 A.D 62년보다 늦을 수 없다는 뜻이죠. (…) 누가복음은 사도행전보다 먼저 기록되었음에 틀림없고, 마가복음 또한 누가복음보다 훨씬 더 일찍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A.D 6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측정할 수 있지요. 예수가 처형당한 사건이 A.D 30년 또는 33년쯤 된다면 기록 연대와 차이는 30년가량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 두 편은 B.C 323년 그가 죽은 지 무려 400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아리안과 플루타크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의 역사가들은 그 자료를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성경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와 사실성을 지니고 있으며, 왜곡의 대한 의혹을 무마시킬 정도로 짧은 기록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경이 전하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유대인 선생
2. 많은 사람들은 그가 치유를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3. 어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믿었죠.
4.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습니다.
5. 디베랴 지방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했습니다.
6. 이 수치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은 추종자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넘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A.D 64년경엔 로마에서도 많은 군중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7. 도시와 시골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들 모두가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그분은 가르칠 때 이런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신의 가르침의 진실성을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의존해서 말씀하셨던 겁니다.”
“‘아바(사랑하는 우리 아빠 정도의 느낌)’라는 말의 중요성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 말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를 바꿀 수 있느냐는 겁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는 5천 명의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회의적이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최면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의 동생 야보고, 박해자 바울,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본 도마.”
“열 명의 문둥병자를 100% 즉시 치유했다. (누가복음 17장)”
“손 마른 자를 고쳤다. (마태복음 3장)”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안에게서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자, 그 귀신들은 돼지 떼로 들어간 후 돼지들을 절벽으로 몰고 가서 몰살시켰습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느냐?’ *정죄: 죄가 있다고 단정함’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특징이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적을 행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결정적 증거는 바로 그의 부활에 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어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태형을 당하고서도 죽었습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집니다. (…) 저혈량성 쇼크란 말은 어떤 사람이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나서 고통을 겪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의 언어는 손바닥과 손목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 중추 신경이 지나가는 위치에 못이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 신경은 손으로 나가는 가장 큰 신경인데, 못이 그곳을 내리칠 경우 완전히 파괴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팔이 늘어납니다. 아마 6인치 정도 늘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양쪽 어깨가 탈골됩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시편 22편의 내용;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질식하게 되는 이유는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격막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발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잠시 동안 이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발에 박혀 있는 못이 발을 점점 깊이 찌릅니다. 결국에는 못이 발 근육에 붙어 있는 뼈를 고정시키게 되죠. (…)완전히 지칠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발을 세울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호흡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희생자는 소위 호흡 산독증 혈액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것-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됩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고서는 심장이 정지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혈량성 쇼크는 심장 박동 수를 지속적으로 빠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심장을 정지시킨 원인 중의 하나였죠. 그렇게 되면 심장 주위에 있는 막 조직에 액체가 괴이는, 심낭 삼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폐 주위에도 액체가 고이는데 이것은 늑막삼출이라고 불리죠.”
“(…)창은 오른쪽 폐와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창을 뺄 때 물처럼 보이는 액체 심낭 삼출과 늑막삼출- 가 나왔습니다. 요한이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 다음에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을 겁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리라’ (요 19:34)
“고대 헬라스어에서는 단어의 순서가 반드시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두드러진 사건일수록 먼저 나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습니다. 만약 살아남았다고 칩시다. (….) 그렇게 애처로운 상태에 있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밖에 나가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님이시라고 선포할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 몸 안에 있는 피를 다 쏟고 그렇게 끔찍한 상처를 입은 후였기(…) 그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데도, 제자들이 언젠가는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세계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는 의학적으로 죽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을까?


1. 빈 무덤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초기의 전승에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출처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똑같이 예수님 무덤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부활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기독교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신 바로 그 도시에서 생겨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3. 마가가 빈 무덤 이야기를 이전의 어떤 출처에서 인용(…) 빈 무덤 이야기는 A.D 37년 이전에 쓰였습니다. 로마 역사가인 A.N 셔윈 화이트는,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복음서의 내용을 그토록 빠르게 완전히 왜곡시킬 정도로 전설이 발전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4. 마가의 빈 무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신학적 사고가 반영되지 않은 순수한 내용입니다.

5.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여인들이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공통된 증언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말해줍니다.

6. 1세기의 유대인 논객들은 빈 무덤의 사실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와 그 후에 오백의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5-8)
“목격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었다.”


1. 희생 제물 제사 중단
2. 모세의 율법만으로는 부족
3. 안식일을 1500년 만에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
4. 유일신론에서 삼위일체
5.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의 죄를 인하여 고통받고 죽는 메시아를 말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를 쳐부수는 메시아, 즉 정치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믿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최소한만 명이 넘는 유대인 공동체가 사회적이고 신학적으로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을 지탱시켜 오던 다섯 가지 핵심 제도를 기꺼이 포기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라이오넬 럭후 경,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는 티끌만큼도 의심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해서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성경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역시 사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 역시 지금껏 결과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원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신의 존재 역시 결과로써 나에게 다가와 주길 바라고만 있었다. 하지만 결과에서 결과를 찾는 것이 얼마나 안일한 태도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의 결과이고 그는 나의 원인이다. 그는 결과인 나의 안에 계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밖에 있는 것보다 안에 있는 것을 보기 어렵다. 그저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 보이는 것만이 우리가 신뢰할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눈은 하나의 기관일 뿐이며, 살아가는 데 진실로 필요한 것들은 우리 안에 있다. 눈이 없는 인간은 있지만, 마음이 없고, 정신이 없는 인간은 없다. 그 사실은 보이는 것만 신뢰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4. 기독교의 실천

“경험적 검사(experiental test)란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나는 그분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배심원단에 속해 있는데, 피고인이 유죄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고 칩시다. 이미 피고인이 유죄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 즉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단계를 생략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말도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적으로 검사해 보는 마지막 단계를 밟지 않는다는 것은 그 증거가 가리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But to all who did receive him, who believed in his name, b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Believe(믿다) + receive(영접하다) = become(되다)”


나는 이번 탐구를 통해 성경을 믿게 되었고,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경험적 검사’이다. 그렇다면 경험적 검사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음을 바탕으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에 그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다.


*기본 도덕 4가지
분별력: 심사숙고
절제: 쾌락
정의: 공정함
꿋꿋함: 용기


*신학적 덕목 3가지
사랑: 감정의 상태가 아닌 의지의 상태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
소망: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 '천국'
믿음: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 자연히 행동하고 싶음; 그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을 뿐
황금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깨어 있을 때는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자고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기독교적 자세란 '음식을 삼켜 소화시키는 대신 씹기만 하고 뱉어 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떼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용서: 사람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고 (...)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만: 우리는 허영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을 고치겠다고 교만을 불러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첫걸음이란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과 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여러분은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반면에 그가 여러분과 다른 기관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고자 할 때, 여러분은 전체주의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실제 행동에 진보가 없다면 '종교'에 아무리 좋은 감정과 새로운 통찰과 더 큰 흥미가 생겼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순전한 기독교』, C. S. 루이스, 장경철·이종태, 주식회사 홍성사, 2005, Mere Christianity.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윤관희, 두란노서원, 2002, The Case for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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