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고

by Dion


자기 본성에서 나오는 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법도 자신에게 신성할 수 없다. 선과 악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에 임의로 갖다 붙일 수도 있다.


에머슨은 자기 본성에서 나오는 법을 제외하고는 선과 악이 그저 이름뿐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좋고 나쁨은 내 안에 있는 것들, 하지만 그것은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이성적으로 구분한다면, 이성적 기준은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더 옳고 그른가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에머슨은 그것을 ‘본능적 끌림’, 즉 직관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 성령과 연결되어 있기에 신성한 것이자 참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모든 것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오며 결국 그것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스스로 있는 것이 “제 1원인”의 속성인데, 이 일자가 낮은 형태의 사물 속으로 얼마나 스며들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물이 말하는 선의 정도가 결정된다고 한다. 이는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왔기에 본래 선하며, 그것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선한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 직관 뒤에 나오는 모든 가르침을 교양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교양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학습에 의해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옳고 나쁨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그 이성 작용의 원천을 어느 철학도 설명하지 못하고 존재와 부재만 파악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결국 이성 작용으로 진리를 찾아간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 작용 자체가 직관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성 작용의 판단 기준 자체가 본능적 끌림, 직관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서 이것에 반박하는 자들을 향해 직관과 지적인 개념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이것 혹은 저것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보기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관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운명적이다.


즉 우리는 이성 작용으로 개념을 확립하여 옳은 행동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직관 그 자체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이성 작용을 하는 매 순간마다 직관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차적 원리인 직관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모든 지적 가르침이 지적인 개념, 즉 교양이라는 것이다.


내 이해를 토대로 예를 들어보자면, 전자기력이 없으면 원자핵과 전자는 존재만 할 뿐 원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전자기력과 같은 힘이 있어야 이성 작용(전자)들이 하나의 선을 향해 붙들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자핵과 중성자의 수, 전자의 수가 많을수록 그 다양성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그 이후의 모든 가르침은 그 다양성으로 교양(지적인 개념)과 같다는 것이다.


그 지성 작용을 ‘로고스’라고 칭한다면, 그 작용의 존재와 비존재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발생한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즉 전자기력을 관찰하여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것의 기원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저 ‘자연’이라고 칭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자(신)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그 작용을 느낄 수 있음을 표현한 단어가 직관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은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본래 신성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 자체로 선하며, 그 자체를 따르는 ‘직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발생하는 교양을 통해 그것을 확립하고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Q. 직관만으로 스스로 선을 선언하는 것에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없는가?


과거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말과 함께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에머슨은 절대적인 진리(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에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에 모순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직관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신성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항상 참이고 선한 것이 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지와 착각에 의한 판단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는 죄악을 속죄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반영적인 방식으로,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런 반영적인 기준을 무시하고 스스로 무죄를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타인의 의견과 결과를 반영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해 가는 것이다. 둘째로는 자기 자신의 규율에 그것이 부합하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지와 착각의 힘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규율은 자신만의 ‘직관’에서 나온 것이고, 그 직관이 무지에 의해 잘못 설정되어 있다면, 모든 의견은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반대되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하나의 참된 진리로 묶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방법을 취할 때에는 내면에 신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결국 절대적인 진리는 개인 위에 있는 신을 따를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그 진리는 신의 뜻(기독교라면 성경)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의 사상은 어쩌면 위험한 사상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언제나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의 법칙이다.


우주적인 시간으로 보았을 때, 한 개인의 삶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 위대한 인간의 사상은 인간의 삶을 뛰어넘고 불멸한다. 지금 잘못된 사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져도 잘못된 사상은 비난받고 바르지 못한 사례로 역사의 교훈이 된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교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쟁과 살육이 일상인 고대와 다르게,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비난받을 행위라고 여겨지는 현대를 비교해 보며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무죄를 선언하기 전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례와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사상에서 개인의 직관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설령 우리가 진보와 퇴보를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과정에 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개개인의 의무가 아닐까?




▶자기 신뢰 요약(문장 그대로 인용)


1.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빛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샘솟는 한 줄기 빛이 더 중요하다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은밀한 마음속에서 당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대로 진실이 된다고 믿는 것. 이것이 천재(genius)의 행동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숨은 확신을 밖으로 드러내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장 깊숙한 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직접 뭔가를 해봐야만 비로소 자기 능력을 알게 된다.


내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지, 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실제 생활이나 정신생활에서 지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지만, 동시에 위대함과 평범함을 구분하는 결정적 지표가 된다.


언제나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의 법칙이다.


2. 장미에게는 시간이 없다


장미에게는 시간이 없다. 단지 장미가 있을 분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매 순간 완벽하다


이에 비해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그는 현재에 살지 않는다. 뒤로 눈을 돌려 과거를 한탄하거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요로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발끝으로 서서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자연(본성)과 함께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거나 강인 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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