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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Apr 18. 2022

나의 것

    아래층 거실에서 TV를 보며 새로 뜯어서 조금 먹다가 그냥 테이블 위에 놓고 잔 땅콩 봉다리가 아침에 보니 플라스틱 껍질만 남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적지 않은 양이었지만 누가 밤새껏 먹었다면 껍질이라도 어딘가에, 하다 못해 쓰레기통에라도 남았을 법한데 흔적조차 없었다. 단 세 명의 식구가 서로를 의심했다. 서로를 일단 의심은 해보지만 그 가능성은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늦은 밤, 자려고 불 끄고 올라간 사람들이 한밤중에 뭐 하러 다시 내려와 밤새도록 땅콩을 까먹었겠는가…. 지하실 어느 구석에 칩멍크(아주 작은 크기의 다람쥐) 가족이 산다는 딸아이의 말을 고려해 보기로 했다. 사실 문과 바닥 사이의 작은 틈새로 이 녀석들이 들어오는 것을 나도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조그만 놈이 어떻게 그들로서는 엄청난 양이었을 땅콩을 한 알도 안 남기고 먹어치울 수 있다는 것일까…. 


해결되지도 않고 의심도 꺼지지 않은 채 두어달이 흘러가 잊어버릴만 한 무렵, 차고 옆 잡동사니 쌓아놓은 방을 정리하던 어머니께서 땅콩더미를 발견하셨다. 없어졌을 당시의 분량 거의 그대로 한아름 쌓여있는 땅콩 더미 위에는 휴지 조각과 헌옷 조각까지 챙겨서 덮어놓은 게, 감춰놓으려는 의도까지 엿보였다. 그 모든 해놓은 짓이 놀랍고 감탄스럽기조차 한데 뒤이어 난감해지는 것은 이것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가, 였다. 정갈하게 쌓아놓기만 했을 뿐 전혀 손을 댄 흔적이 없이 깨끗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뺏어다가 내가 먹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그냥 너희들이 챙겨놓은 양식이니 너희들 마음껏 먹어라, 하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빠른 결정만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한다. 아까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깨끗이 쓸어담아 비닐봉지에 넣어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리고 나니 홀가분하기만하다. 그런데 갈수록 '잘했다'하는 기분도 아닌 것이 무슨 이유인지 콕 찝어 알 수도 없는 채 어쩐지 아쉽고 마음이 편치 않아지는 것이었다. 이왕 그렇게 버릴 것, 그냥 쌓아놓고 먹게 내버려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이어, 쌓아놓은 양식을 순식간에 도둑(?)맞은 그 녀석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땅콩의 크기와 양으로 보아 한 두 놈의 역사가 아니고 아마 온가족이나 이웃들의 총력을 기울인, 밤을 샌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사실인즉 도둑질 해다 쌓아놓은 재물이 제것일 수도 없고 사라져버렸다고 분하고 억울할 까닭이 어디 있을까마는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들끼리 의심하고 탓하고 억울해하고 싸워댈 것이 아닌가…. 나야 내 돈 내고 사온 것이니 내 것이 마땅하지만 그놈들이야말로 정말 도둑질해서 쌓아놓은 것이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 창고에 쌓여져 있으니 그들의 것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내 돈 내고 사온 것이라 해도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진정한 의미의 내 것이란 내가 먹어 삼켜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 뿐이다, 라는 누군가의 글을 떠올리니 움켜쥘 수 있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인 줄 알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무상으로 쓰고 있지 아니한가…. 땅콩을 훔쳐다 쌓아놓고 기뻐했을 칩멍크와 뭔가를 쌓아놓지 못해 안달을 내며 사는 나와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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