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여자 배구경기를 시청했다. 2019년에 있었던 일본과의 이 경기를 10회 이상 시청한 것 같다. 그러나 여자 농구 경기는 달랐다. 언젠가 일본과의 여자 농구 경기를 시청했었는데 짜증이 났다. 일본 선수가 던진 공은 림(rim 바퀴 따위의 테를 이루는 쇠고리) 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 선수가 던진 공은 번번이 튕겨 나왔다. 1쿼터 중간 정도 되었을 때, 점수는 2:18로 뒤졌다. 가슴이 답답해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운동경기에 져도 이렇게 속이 상하는데 전쟁에서 지면 더 말할 것 없다.
일본군은 개전 60일 만에 평양을 점령했다. 일본이 밀고 올라오면 의주에 머물러 있는 선조는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항복해야 할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 상황이다. 그런데 육상 전투에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조선 백성들은 참으로 영리하다. 전쟁이 발발하고 채 두 달이 안 되었는데 그새 전투 요령을 습득했다. 그리고는 일본군의 허점을 노려 공격했다. 관군이 아닌 의병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다.
(음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영천 지역에서 벌어진 ‘영천성 전투’ 또는 ‘영천복성 전투’는 영천의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과 신녕의 무인 권응수(權應銖) 등 의병들이 일궈낸 승리다. 그들은 무턱대고 공격하지 않았다
(음 7월 23일), 영천 의병들은 읍성 남쪽 추평(楸坪) 현재의 주남들에 본부를 설치하고 관병과 의병 3,500여 명을 집결시켰다. 의병대장 권응수, 별장 김윤국,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전봉장 홍천뢰(洪天賚), 찬화종사(贊畵從事) 정세아·정담으로 배치하는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을 조직했다.
의병대장 권응수는 군기와 군율을 수립하고,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영천 지역의 계절풍 ‘건들매’ 또는 ‘건들바람’을 이용한 화공전(火攻戰)까지 계획했다. 건들바람은 음력 7, 8월에 분다. 먼지가 일고 종이가 날리며 나뭇가지도 흔들릴 정도의 상당이 강한 바람이다.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전투에서는 당연히 승리한다. 창암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주와 안강 방면으로부터 영천의 왜군을 고립시켰고, 박연 전투에서 승리하여 저들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겁림원 전투에서도 군위로 향하던 왜군을 소계역(召溪驛)까지 추격하여 격퇴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영천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영천성의 복성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음 7월 26일)에 영천성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권응수와 박의 장군은 서문과 북문을 공략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계획했던 대로 ‘건들매’를 이용한 화공법도 펼쳐서 왜군을 섬멸시켰다.
(음 7월 28일), 영천성을 탈환했다. 의병장 권응수는 조선인 포로 1,090명을 구해내고, 말 200필 총과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했다. 영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대장 권응수, 그를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음 5월) 초, 왜군은 한양을 점령했다. 한편 후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북쪽으로 진격하려던 전술을 변경했다. 이게 바로 선조를 구하게 된 원인이다.
고바야가와 부대는 전라도를 맡아 남하했다. 창원에서 남원으로 직행하다가 곽재우(郭再祐)에게 길이 막혀 지례·김산·선산·개령 등지에 흩어져 주둔했다.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으로 향하다가 우두령에서 김면(金沔)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패하여 다시 지례로 되돌아갔다. 또 다른 왜적의 한 부대가 황간·순양·무주·금산을 거쳐 전주로 가던 중 권율(權慄) 장군에게 패하여 대덕·지례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지례에 모여든 왜군 1,500여 명, 그들은 지례향교에서 행군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은 (음 7월 29일), 의병 연합군이 담장 안 창고 주변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우왕좌왕하는 왜군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거기서 도망친 10여 명도 멀리 못 가고 잡혀 죽었다. 이게 지레전투이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의병 총대장 김면은 합천군수 배설(裵楔)에게 ‘도망친 왜병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배설은 응하지 않았다. ‘수령으로서 어찌 백면서생인 김면의 지휘를 받으랴!’ 이런 생각이었다. 그는 스스로 도망친 왜병을 추격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이 추격할 기회마저 잃게 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선 12척을 끌고 탈영한 인물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가 적지 않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잘난 척 큰소리를 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붙여 꽁무니를 빼는 옹졸한 자들 말이다.
임진왜란에서 반격을 시작한 의병대장 권응수, 의병장 김면 등과 같은 지휘관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런 지도자를 더 많이 길러내야 한다. 그 임무를 학교가 담당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장차 나라와 고장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림으로 성장해야 한다.’라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그게 바로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요,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