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1593년 연초에 벌어진 전투는 승패가 분명하지 않은 접전이었다. 그 균형을 깬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한 최신식 무기 덕분이다.
일본군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전선에서 무단이탈함으로써 일사불란(一絲不亂)하던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상황을 곧 수습했다. 봉행(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북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장수들을 한성(漢城)으로 모아 전력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2월 27일(음력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宗虎), 다카하시 나오쓰구(高橋直次) 등이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다.
일본군은 명군이 진용을 갖추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요격 작전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명의 대포 공격에 고전했으나 백병전으로 들어가면서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 전투는 명의 제독 이여송이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했는데 그의 부장 이유승이 간신히 구해낼 정도로 치열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명군은 평양성과 개성을 빼앗았기에 승리했다 하고, 일본은 명군의 남하를 막았으니 승리했다고 한다. 팽팽한 접전을 펼친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는 양측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서로 비긴 전투였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자 이여송의 오만함이 가득 차 있다.
이 제독(이여송)이 파주에 진군하여 적군과 벽제관 남쪽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개성으로 돌아와서 진을 쳤다. 처음에 평양이 수복되니 대동강 이남의 연도(沿道)에 있던 적들은 모두 도망쳐 가버렸다. 제독은 적군을 추격하고자 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대군이 지금 앞으로 진격하려 하는데, 듣건대 앞길에 군량과 마초가 없다고 하니 의정(유성룡)은 대신으로서 마땅히 나랏일을 생각해야 될 것이므로 수고를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군량 준비에 소홀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임진왜란 해전 중 제5차 출정은 웅포 해전(熊浦海戰)이다. 3월 12일(2월 10일)부터 4월 7일(음력 3월 6일)까지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연합 함대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앞바다로 출정하여 일본 수군과 벌인 전투이다.
웅포는 조선군이 부산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다. 이순신은 웅포를 먼저 공격했다. (음 2월 12일)의 1차 해전을 시작으로 18일의 2차 해전, 20일의 3차 해전, 22일의 4차 해전, 28일의 5차 해전, 3월 6일의 6차 해전까지 전투는 치열했다. 상륙작전까지 펼쳤으나, 성과는 없었다.
전투 결과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왜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조선 배 2척을 전복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순신이 치른 해전 중 3번의 패전 중 하나라고 일본은 말한다. 이 해전도 팽팽한 접전이었다.
팽팽하던 전투의 균형을 깬 전투가 있다. 3월 14일(음 2월 12일)에 벌어진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의 지휘관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벽제관에서 평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행주산성은 고립 상태에 빠졌다. 행주산성은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있다. 후방에 한강이 흐르는 배수의 진이다. 산성의 높이가 불과 120Cm로 낮았고, 규모도 작았다. 권율은 토성 위로 목책을 둘러싼 채 싸움에 임하도록 했다.
이처럼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적의 공격을 7차례나 막아냈다. 그 승리의 요인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최신식 무기의 사용이다.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비롯하여 신기전, 천자총통 등 화포이다. 조선군이 이 무기를 발사함으로써 왜군 5,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도 중상을 입었는데, 부하 병사의 등에 업혀서 도망쳤다.
권율은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하였고, 군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으며, 최신식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등 뛰어난 용병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순신, 곽재우와 함께 임진왜란의 전쟁 영웅이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상 전투의 3대첩이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의 4대첩으로 불리는 유명한 전투이다.
행주대첩에서 사용한 무기는 성리학에서 볼 때 잡학(雜學)의 산물이다. 그러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서 성리학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잡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장손처럼 잡학에 능한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 곧 그런 체제를 갖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