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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Jun 17. 2024

섭지코지를 걷다가


보름남짓의 제주. 이번여행은 여느 때보다   호젓한 시간을 보내볼 요량이었다.


어린 시절을 강원도 강릉 송정 바닷가 마을에서 함께 자라난 나와 남편. 그런 우리는 학창 시절을 지나 취업과 결혼을 동시 수도권 어느 곳으로 자리 잡아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 부부는  바다를  자주 그리워하는 편.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의 이유는  더없이 간결했다.


해안선을 끼고 제주를 여러 번 둘러볼 작정으로 동선을 나름 고려하여 , 숙소를 세 군데로  나누어 잡은 터.  여행지의 마지막 숙소는 제주 동쪽끝자락 섭지코지로에 위치했다.  이곳에서는 특히  온전한 휴식에 집중할 예정.


바닷가마을에서 자라난 나는 수영을 무척이나 즐기는 편이지만 , 아이들과 남편만 수영장에 들여놓았다. 반려견 행복이는 함께 수영장에 입장할 수 없는 관계로 아쉽지만 객실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


반려견동반 숙소인터인가 배정받은 객실은 1층. 나는 섭지코지로 이어진 광활한 산책로가  눈에 담기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웠다. 하필 그때 왜였을까? 순간 어떤  막연한 적막 같은 것이 스쳐가는 듯했다. 보통 외로움, 쓸쓸함을 보통 느끼지 못한 채.  단조롭고 나른하며 무료하기까지 한 시간을 즐기는 내게 여간 낯선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떠올려보면 그건 어스름한 제주의 빛과 바람이 주는 어떤 상쾌함 같은 것 때문 아니었을까.

여하튼  나는  도무지 침대에 누워만 있을 순  없을 것만 같았으므로 , 서둘러 행복이와 나갈 채비를 했다.


객실문을 나서자 마자였다. 역시 나오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말이다.  이 또한 어스레한 빛 덕분이었으려나 , 산책로 한편에 무심한 듯 아니듯 우거진 파스텔톤 수국덤불이 가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그건 마치 그날 제주 하늘빛, 구름 같기도.


이곳에 짐을 풀기로 계획한 건  어쩌면 순전히 리조트 내에서 섭지코지로 이어진 단정한 산책로 덕이었을 는 지도.  아무튼  그 길을 따라 나서본다.

한낮의 제주 햇살과 바람을  담았을 그곳을.

섭지코지의 바람, 물, 어스름 하늘빛을 느끼며 ,

싱그러운 6월 제주의 소리에 집중한 채  상쾌한 바람을 만나는 기분이란.


오로라 보게 된다면 혹 이런 느낌이려나 , 방언 터지듯 감탄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저녁하늘빛에 나는 말 그대로  그저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십오 분이나 걸었을까, 어느덧 푸른 바다와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눈에 들어온다. 이모 든 것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음에 다시금 나는  경이로워질 밖에.


자연의 색을 가득 담은 섭지코지의 산책길.

그 길을 행복이와 함께 할 수 있음에 어쩔 수없이 또 한 번 감사할 뿐이었다.


아스라이 한치잡이 배들이 눈에 담긴다. 까만 밤이 오면  바다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일 테다.

한참을 넋을 잃고 섭지코지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버렸다. 어느 사이  인적이 드물어 지기까지 했다. 어둠이 앞을 가리지 전 서둘러 내려오기로 한다.

  3킬로그램의  행복이는  품에 안고서,  행복이의 가늘고 보드라우며 풍성한  털이 손끝에 닿는다.   작지만 강한 숨소리를 느끼며 걸으니 뭐랄까 어쩐지 모르게 몽글해지는 마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달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걷는다.

저 멀리 반짝이는 객실 조명들  사이로 무언가 보인다.  성산일출봉이었다.


분명 어제 오후. 남편과 다녀왔던 산책길이다. 한데 나는 왜 저만치 있는 성산일출봉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 그건 아마 내려오는 길엔 섭지코지 유민미술관셔틀버스를 얻어 탔기 때문일 테다. 내려오는 길 대략 15분에서 20분 남짓  거리라지만, 제법 뜨거운 6월 한 낮 열기를 피해 우리 딴에는 빠르게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다만 여유를 갖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길.  성산일출봉을 뜻밖에 다시 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롭기까지 했다.

만일 떨어지는 해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이,  서둘러 내려왔다면  이 같은 장관을 느껴볼 기회조차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

나는 자그마하여 여린 행복이를 가만히 끌어안고 , 괜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걷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사뭇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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