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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Jul 05. 2024

나를 품어준 자연이 건네는  어떠한 위로


  빗소리 좋아한다.

그저 창가에 앉아 그 소리를 듣고, 나뭇잎, 풀, 땅 위로 떨어지는 모습 또한  가만히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오늘따라 지저귀는 새소리가 유난히 반가운 건 무엇 때문일까? 그건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빗소리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날에도 나는 빗소리를 좋아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뒤란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조악하게 올려 씌웠던 양철 지붕. 그 위로 떨어지는 상쾌한 소리, 흙마당으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소리.  빗소리와 함께 전해지던 흙내음은  여태 선명하기만 하다.


해마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 나와 은이는 장마대비를 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떤 식이었냐면 동네 구판장에 가서 간식거리를 각자 한 봉지씩 사들여 오는 일이 먼저였다.  과자, 초콜릿, 사탕, 껌, 젤리.

 엄마는 이때만큼은  우리 손에 지폐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영혜야, 엄마껀 가나초콜릿 하나 사다 줘."


 구판장으로 가는 길엔  나팔꽃, 접시꽃, 앵두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이름 모를 갖가지 풀꽃들마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때 나는 접시꽃이 그저 무궁화인줄로만 알고,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그리고는 꽃잎을 콧등에 붙이고는 큭큭대며 웃기도 했다. 내 콧잔등에 붙은 붉은 접시꽃잎이 마치 어느 닭의 벼슬 같다며.


여름날 나는  주인집 할머니의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우리 집보다도 주인집 할머니의 집보다도 큰 감나무그늘 아래였다. 연한 초록의 시기를 지나 진한 초록의 시기로 접어든 감나무줄기와 잎은 흐드러지어  여느 때보다 풍성하기만  했다.  나는 그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파란 하늘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그저 천천히 바라보았다.  간간히 스치는 바람이  여리디 여린 살갗을 지날 때면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감나무 그늘에 누워 온갖 풀잎사귀의 냄새와  시원한 흙냄새를 느낄 때 또한 선연하기만 하다.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음에도  심심할 적이 없는데 ,  온 계절이 그저 내겐 풍성한 놀거리였.   솔밭에 나가 잎클로버를 찾는다거나 , 토끼풀을 둘둘 엮어 반지를 만들어 끼고 , 이따금 소나무 둥치아래 어떤 버섯이 있는지 찾아보러 다니기도. 이럴 때엔 보물 찾기를 하는 듯 한 기분 되기도 했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나팔꽃을 떼어 괜히 불어 보기도.

까맣고 통통한  분꽃씨앗을 따서 돌로 곱게 빻아 하얀 가루를 내어  손등 위에 문질러보기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카시아 군락. 덤불 사이를 헤집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 어느 사이  감미로움에 이끌리기도 했다. 아카시아 잎사귀를 줄기채 끊어 그 작은 이파리를 하나씩 떼어낼 때엔 어쩐 일인지 묘한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차갑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손끝에 닿던  아카시아 이파리에 다시금  스칠 날 있을 는 지. 내 간절하기만 하다. 탐스럽게  피어있는 아카시아꽃은 또 어땠는지. 단내 나는 포도송이 마냥 달려있던 순백의 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그 안에서 동화의 나라 혹은 어느 작은 숲 속의 공주님이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정도로 황홀한 그 꽃을 쓰다듬어 보기도, 코끝을 대보기도, 양볼에 부벼보기도 했는데 ,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어코 한송이 똑 떼어 내 움켜잡고 말았다.


 잎사귀보다도 보드랍고 차가운 꽃송이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그 깨끗하고 고운 꽃잎의 송이는 무척이나 가벼웠지만,  내 마음속에선  별안간 천금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나를  홀리듯 이끌었던 매도록 달큼한 향내식간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느꼈던  그 무게는 대체 뭐였을까? 아무튼  뒤로 나는 아카시아 꽃을 절대 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골마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어른들은 농사를 지으며 작물을 길렀다. 주로 감자, 옥수수, 콩, 배추, 무, 깨 정도였다. 밭둑에는 옥수수를 심어 두는 식.  어느 사이 껑충하게 자란 옥수숫대는 마치 조밀한 울타리 같기도 , 거대한 성벽 같기도 했다. 하늘, 바다, 드넓은 밭, 사시사철  소나무 숲. 나의 세상은 온통 짙푸르기만 했다.   


봄, 여름, 가을 지나 걷이가 끝난 너른 밭  파지 얻을 수 있는 작물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마냥 놀이 삼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  줍고  다니기도 했다. 부드러운 흙을 실컷 밟아가며, 흙내음을 흠뻑 맡으며. 얼마든지 껏.


 어릴 적 자연은 이토록 나를 온전히 품어주었다.

나의 작은 공상에 무궁무진하고 풍성한 날개를 달아주었고 , 우울했을 어느 날엔 다정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 보잘것없는 나의 상상력의 근원은 혹 그때에 자연이 내어주었던 아낌없는 위로, 은근한 응원  덕분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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