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다. 창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세상의 모든 선을 풀어헤치듯 흔들리고, 그 사이사이에 금빛이 번졌다 사라졌다.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떨리는 차체가 나의 심장을 두드리듯, 일정하지 않은 진동이 내 안에서 웅웅 울렸다. 도시를 벗어난 지는 오래였으나, 여전히 회색 건물의 각진 그림자가 내 눈꺼풀 안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창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혀 합쳐졌다가 곧 흩어졌다. 그 순간마다 유리 위에는 가늘고 날카로운 금빛의 선이 번쩍였다. 금빛은 곧 사라졌으나,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선이 나타나 다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빛의 반사인지, 아니면 내 안의 균열이 창에 비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버스 안은 정적에 가까웠다. 몇몇 승객만이 흩어져 앉아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한 노인은 꾸벅꾸벅 졸았고, 젊은 부부는 품에 안은 아이를 달래며 낮은 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그 노랫소리는 빗방울 소리에 묻혀 겨우 들릴 뿐이었지만, 그 작은 세계는 단단하고 온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온기는 내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완결성이 내 고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버스의 흔들림에 맞추어 내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리듬은 태엽 풀린 시계처럼 불규칙했으나, 이상하게도 내 안의 호흡과 맞아떨어졌다. 종점이라는 개념은 나를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다만 이 길의 끝에, 지훈의 저택이 있다는 사실만이 내 발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현우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려 퍼졌다. “오늘은 지방에 내려가야 해. 늦게 들어올 거야. 아마 못 들어올지도 몰라.”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분명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확실함과 신뢰로 다가올 말투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그 확실함은 오히려 공허함의 증거였다. 그의 문장은 완결될수록 나를 지워냈다. 그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버스는 빗물에 젖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창밖에는 점점 도시의 흔적이 사라지고, 초록과 안개의 곡선이 풍경을 덮어갔다. 전봇대가 끊기고, 습기를 머금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불규칙하게 떨어지며 흙냄새를 퍼뜨렸다. 그 냄새는 도시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듯 나를 파고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변명을 되뇌었다. 단순히 숲의 공기를 마시러 가는 것이라고, 빗속 산책을 하러 가는 길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 변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 있는 집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버스가 산허리에 이르자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도로 위에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 진흙과 돌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운전사는 짧게 욕을 내뱉더니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승객들은 술렁였으나 이내 고요해졌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도로 위의 흙을 씻어내며 작은 강줄기를 만들었다. 그 강줄기가 길 위에 금빛 균열처럼 퍼져 나갔다.
내 안의 무언가도 그와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안인지, 갈망인지, 혹은 그 둘이 뒤섞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은 나를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고 있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자,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금빛의 선들이 번쩍였다.
차량은 곧 작은 마을을 스쳐 지나갔다. 비에 젖은 지붕과 닫힌 창문, 어스름한 불빛이 가느다란 선처럼 흘러갔다. 사람의 흔적은 희미했으나, 그 희미함이 오히려 마을을 더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마치 내가 지나온 삶이 이곳의 빗물에 씻겨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담이 눈앞에 나타났다. 빗방울에 젖은 돌은 더 어두운 색을 띠고, 그 사이사이에는 담쟁이가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돌 틈의 이끼는 오래된 문장의 쉼표처럼 고요히 자리했다. 나는 손바닥을 그 위에 얹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이 집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저택은 숲속에 잠긴 듯 서 있었다. 검은 지붕은 빗방울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였고, 창문은 흐르는 물줄기 때문에 일그러진 빛을 내뿜었다. 집은 조용했으나,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마치 숨을 죽인 생물의 심장 박동 같은 깊은 울림이 숨어 있었다.
현관 앞 계단에는 지훈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낡은 지도를 무릎 위에 펼쳐 놓고 연필로 작은 표시를 새기고 있었다. 종이는 이미 빗물에 젖어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왔군요.”
그는 내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비가 오는데도 여기에 계셨군요.” 내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 집은 비를 먹고 삽니다. 비가 없으면 균열도 없겠죠.”
그는 지도를 접어 옆에 내려두었다. 빗방울이 지도 위에 떨어져 연필 자국을 번지게 만들었지만, 그 번짐조차 이 집의 일부처럼 보였다.
우리는 함께 온실로 향했다. 지하 창고의 축축한 어둠과 달리, 온실은 맑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빛조차 균열을 감추지 못했다. 유리창에는 금박으로 이어 붙인 흔적이 상처의 연대기처럼 남아 있었다.
“여기는 늘 고칩니다.” 지훈이 말했다. “빛이 닿는 자리일수록 금이 잘 가거든요.”
“빛이 많은 곳일수록 상처도 많다니… 묘하네요.” 내가 중얼거리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묘한 게 아닙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칼날 같았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금박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보았다. 빛은 균열을 통해 들어와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상처가 빛을 모으는 창처럼.
그때 고양이가 나타났다.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다가와 내 발목에 몸을 비볐다. 나는 몸을 낮추어 고양이를 안았다.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진동은 언어보다 더 진실했다. 그 울림은 내 안의 빈 곳을 메워주는 듯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곧 내 팔에서 뛰쳐나가더니 유리 화분을 발로 쳤다. 쾅—!
깨진 유리와 흙이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비명을 삼켰고, 지훈은 허둥대며 조각을 치웠다.
“얘는 늘 진지한 순간을 망쳐요.”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는 오히려 당당하게 의자 위에 올라앉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공기가 잠시 가벼워졌다.
“이 집은…” 내가 낮게 말했다. “자꾸 제 안쪽을 드러내게 해요. 싫지는 않은데, 두렵습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겠죠.”
그 순간,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발걸음이 담장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뒤,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는 낡은 검은 우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우산의 살 하나가 휘어져 있었고,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가 더 세질 겁니다. 준비해 두세요.”
그는 우산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검은 천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작은 원을 만들었다. 나는 그가 벽에 붙여 둔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빗물 소리 기록 완료. 고양이 다이어트 실패.’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지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집의 진지함 속에 엉뚱한 구멍이 뚫린 듯했다.
잠시 뒤, 지하에서 축음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이자 낯선 멜로디 대신 옛 광고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특별 세일! 비 오는 날엔 우산 반값—”
나는 황당한 얼굴로 지훈을 보았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바늘을 확인하러 갔다.
“잘못 끼워진 판일 겁니다.”
“이 집은 음악도 농담을 하나 보네요.” 내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다시 노랫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돌아온다.”
나는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현우일까, 지훈일까, 아니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이름일까.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저택의 균열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
멀리서 천둥이 낮게 울렸다. 비는 더욱 굵어졌다. 저택은 묵묵히 서 있었고, 나는 알았다. 이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지훈의 것이자, 내 안의 또 다른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