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저택의 지하 창고에서 울린 낡은 축음기와 금빛 균열의 빛 속에서, 수연과 지훈은 돌아오지 않을 기억과 돌아오는 이름 사이에서 흔들리며 새로운 감정의 금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 ― 균열의 서곡 8장.”
현우는 아침 식탁에서 서류 가방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지방에 내려가야 해. 늦게 들어올 거야. 아니, 아마 오늘은 아예 못 들어올지도 몰라.”
그의 목소리는 늘 분명했다. 그 분명함이 나를 안심시켜야 했지만, 오히려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가 현관문을 닫고 나가자, 집은 더 단정해졌다. 신문은 제자리에, 컵은 제모양에, 시계는 제시간을 가리켰다. 그런데 바로 그 정돈이 내 숨을 옭아맸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 위로 김이 번졌다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다시, 어제와 같은 금빛의 선이 나타났다. 어제는 환영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균열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고, 내 안에서 자라나는 듯했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오래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흐릿한 음반 소리, 돌아오지 않는 계절…”
음악은 중간중간 끊기며 잡음을 섞었다. 그러나 그 잡음조차 낯설지 않았다. 저택 지하에서 들려올 법한 소리,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흠집 난 음처럼 느껴졌다.
나는 라디오 다이얼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속삭임 같았지만, 내 귀에는 선고처럼 들렸다.
집 안에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물면 오히려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점퍼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버스 창가에 앉아 도심을 빠져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라디오는 아직도 같은 주파수를 잡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낡은 선율이, 산길의 공기와 겹쳐지는 것 같았다. 음악은 도시의 잡음을 밀어내고,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종점에 내려서자 흙 냄새가 달려왔다. 바람은 도시에서 잃어버린 결을 되찾아 주었다. 산 입구의 매점 앞에는 접힌 파라솔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천 끝이 해어져 하얀 실이 길게 나와 있었고, 그 실이 내 발목을 잡는 듯 흔들렸다. 나는 잠시 멈춰 그것을 바라보다가, 곧장 좁은 길로 들어섰다.
발밑의 낙엽은 금세 내 발자국을 덮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안하지 않았다. 방향이 없어도, 나는 그 길이 나를 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숲 속에서 오래된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의 낯섦은 사라졌지만, 돌의 무게는 여전했다. 담장 위에 손바닥을 올리자,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 감촉은 마치 확인이었다.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 그리고 내가 찾으려는 사람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확인.
나는 곧장 현관 대신 지하로 이어지는 작은 문을 발견했다. 지난번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담쟁이와 그림자에 가려진 문. 안쪽에서 금속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낯설지만 끌리는 소리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공기가 바뀌었다. 흙 냄새 대신 쇠와 기름, 그리고 오래된 먼지의 냄새. 그 끝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지하 창고.
거기서 지훈이 있었다. 그는 낡은 축음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바늘을 조율하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실의 푸른 기운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지하 창고는 낮은 천장과 축축한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래된 물자와 부서진 가구, 반쯤 닫힌 나무 상자들이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지훈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낡은 축음기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바늘을 조율하고 있었다. 작은 드라이버가 그의 손에서 반짝였다. 옆에는 흩어진 나사와 기름 묻은 천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지훈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들었다.
“소리를 붙잡고 있죠.”
“소리를요?”
“이 집은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누군가의 발소리, 계절이 흘린 빗소리, 심지어 균열이 내는 소리까지… 잡아 두지 않으면 다 흩어져 버려요. 그래서 고쳐야 합니다.”
그의 말은 엉뚱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축음기의 원판을 내려다봤다. 표면은 잔뜩 긁혀 있었고, 라벨은 거의 바래 있었다.
“틀면… 나올까요?”
“아마도요. 음악인지, 잡음인지는 장담 못 하지만.”
지훈이 크랭크를 천천히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원판이 돌아갔다. 바늘이 표면을 긁자, 쉭—하는 잡음이 먼저 울렸다. 곧이어 낡은 멜로디가 흘러나왔지만, 중간중간 끊겼고 음정은 비틀렸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귀를 붙잡았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도시에서는 이런 걸 잡음이라고 부르죠.”
“여기선 잡음이 역사를 대신합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흠집 난 음이야말로, 이 집의 연대기를 증언하거든요.”
그 순간, 구석에 있던 고양이가 축음기로 뛰어올랐다. 앞발로 바늘을 툭 치자, 기묘한 삑—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며 입을 막았고, 지훈은 황급히 고양이를 안아 내렸다.
“얘는 늘 정답을 망가뜨리려고 해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답이 아니라 오답을 들려주고 있잖아요.”
지훈도 따라 웃었다. “그러네요. 그래서 얘가 더 필요할지도.”
웃음소리는 지하의 낮은 천장을 울리며 오래 머물렀다. 순간적으로 공기 속 무게가 가벼워졌다. 나는 웃음을 삼키며 축음기의 삐걱거림을 다시 들었다.
“이런 걸 왜 고치시는 거예요?”
“무너지는 것들을 붙잡아 두려는 습관이죠. 식물도, 금이 간 유리도, 이런 낡은 기계도.”
“사람은요?”
그는 짧게 침묵했다. “사람은… 스스로 고쳐야죠. 다만, 옆에서 기다려 줄 수는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축음기에서 튀어나오는 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 잡음 속에서 어쩐지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의 울림이 겹쳐지는 듯했다.
지훈이 바늘을 고정하며 말했다.
“당신은 어떤 소리를 기억하고 싶으세요?”
나는 창밖에서 들리던 도시의 신호음을 떠올렸다. 늘 정답을 강요하는 소리들. 기억하고 싶다기보다는 지우고 싶은 소리였다. 대신 나는 되묻듯 말했다.
“이 축음기는… 원래 누구 거예요?”
“글쎄요. 아마 이 집의 것이겠죠. 주인이 있다면.”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축음기의 그림자는 완전한 원이 아니었다. 찌그러진 타원.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찌그러짐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바늘이 다시 튀며 삑— 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축음기를 향해 또다시 발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이 허겁지겁 막으려는 모습에 나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가 DJ네요.”
“곡을 바꾸는 센스가 있죠.”
“아마도 더 좋은 선곡일지도 몰라요.”
지훈은 고양이를 안아 옆으로 내려놓으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온실에서 보던 웃음과는 달랐다. 흙과 햇빛 대신, 금속과 잡음 속에서 울리는 웃음이었다.
축음기 바늘이 긁히며 잡음을 낸 뒤, 잠시 멈칫하더니 뜻밖에도 가느다란 멜로디가 이어졌다. 허공에 반쯤 남아 있던 노래였다.
“…누군가의 이름은 바람에 지워지고… 기억은 균열을 따라 새겨진다…”
음정은 삐져나왔고 가사는 군데군데 끊겼다. 그러나 그 몇 마디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균열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가사, 들리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단어 하나가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 스친 건, 아주 오래전의 장면이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학교 도서관 창가에 앉아 시험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바람이 불어 창문이 흔들렸고, 그 유리에 얇은 금빛 반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기억을 그동안 내내 숨겨 왔지만, 지금 축음기 속의 잡음이 그것을 끌어냈다.
“이 집은… 그냥 집이 아니군요.” 내가 겨우 내뱉었다.
“맞습니다. 균열이 많은 집이죠. 그래서 소리가 머무릅니다.” 지훈이 바늘을 조심스레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축음기 위에 놓인 원판을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쓸어내고 싶었지만, 섣불리 닿을 수 없었다. 만약 손끝에 먼지가 묻으면, 내 균열도 동시에 드러날 것 같았다.
“소리를 붙잡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저한텐, 네.” 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냐면 어떤 건… 말로는 끝내 붙잡을 수 없으니까요.”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을 듣는 동안, 그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오래된 그리움 같았다. 말하지 못한 진심의 그림자가 방 안에 번져나갔다.
그때, 천장에 달린 전등이 깜빡였다. 지하의 낡은 전선이 무게를 못 이기는 듯, 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의 눈빛이 더 잘 보였다. 지훈의 눈이 아주 잠시, 내 얼굴을 붙잡았다.
전등이 완전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 짧은 암흑 속에서, 나는 그의 숨소리를 바로 옆에서 느꼈다. 심장이 낯선 박자를 만들었다.
“괜찮으세요?” 지훈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네… 불편하지만, 괜찮습니다.”
“불편하다는 건,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나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긴장을 조금 물어뜯었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지자, 공기 속에는 더 짙은 무언가가 남았다.
고양이가 축음기 옆에서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울음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흘러나와, 우리 둘의 시선을 동시에 깨뜨렸다. 나는 작게 웃었고, 지훈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 남은 기묘한 침묵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전등이 몇 번 더 깜빡이다가 안정되었다. 빛이 돌아오자, 금속 선반 위에 흩어진 나사들과 기름 묻은 천, 그리고 반쯤 열린 나무 상자가 다시 사물의 윤곽을 되찾았다. 방금 전의 짧은 암흑이 과장된 꿈처럼 느껴졌다. 고양이는 축음기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이제 더는 바늘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꼬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다시 사고를 칠 준비 같은 태도였다.
지훈이 축음기 뚜껑을 천천히 닫았다. “이 정도면 오늘은 됐습니다. 더 만지면, 오히려 기억이 흩어집니다.”
“기억이 흩어진다는 건… 소리가 달아난다는 뜻인가요?”
“네. 사물도 피곤해해요. 너무 많은 손길을 싫어합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사람처럼요.”
나는 그 말이 장갑처럼 손에 맞았다가, 금세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물과 사람을 같은 문장 안에 넣는 그의 습관은 내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무엇도 완벽히 붙잡을 수 없다는 인정이, 나를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훈은 축음기를 선반 위로 조심스레 올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내 시선이 벽 쪽으로 미끄러졌다. 낮은 쪽벽에, 오래된 지도 한 장이 낡은 집게에 물려 있었다. 바다와 산의 경계가 남색 잉크로 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연필로 표시된 작은 X표가 보였다. 지도 아래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작고 얇은 금박 조각들이 봉투에 나뉘어 들어 있었다.
“이건… 유리에 붙이던 그 금박인가요?”
“유리에도, 캔버스에도, 가끔은 종이에도. 잘 붙지는 않지만요.” 그는 봉투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붙였다기보다 얹어 두는 거죠. 안간힘보다는 여백에 가까워요.”
나는 봉투를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금박은 하늘하늘했고, 숨을 내쉬면 흐트러질 만큼 가벼웠다. 그러자 내 주머니 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아까 온실을 나서며 챙겨 넣었던 라벨—‘방향(試)’. 나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놓았다. 종이의 모서리가 아직도 날카롭게 허벅지를 찔렀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방향을 시험한다… 오늘 제게 필요한 말 같네요.”
“방향은 대개 시험으로 태어납니다. 정답으로 태어난 방향은, 대개 누군가의 길이죠.” 지훈이 말했다. “당신의 길은 어떤 소리를 내나요?”
나는 대답 대신, 지하의 냄새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쇠, 기름, 먼지, 그리고 아주 희미한 라벤더. 누군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증거처럼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 잔향이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줬다.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냄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구석의 전등 스위치 옆에, 작은 종이 조각이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부재의 노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관리인의 글씨였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집은 가장 열심히 일함.’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 읽고, 헛웃음이 났다.
“여기선 메모도 시를 쓰네요.”
“그이는 늘 그럽니다. 본인은 그냥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쓴다는데, 자꾸 운을 떼요.” 지훈의 눈가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고양이가 갑자기 상자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금박 봉투 한 개를 꺼내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봉투가 터지며 금박 두어 조각이 바닥에 퍼졌다. 우리는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손이 마주 닿았다. 이번엔 ‘거의’가 아니었다. 손등과 손등이 정확히 겹쳐졌다.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리며, 잠깐 통증 같은 것을 만들었다. 지훈은 손을 재빨리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러운 속도로 손을 떼었다. 속도가 예의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급하게 떼면 부정이 되고, 오래 붙이면 주장처럼 보인다. 그의 속도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여백.
“죄송합니다.” 내가 먼저 말했다. 무엇이 미안한지 확신도 없이.
“괜찮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무엇이 괜찮은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동시에 떨어진 금박을 모아 봉투에 다시 넣었다. 금박이 손끝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붙잡으려는 의지가 너무 크면, 오히려 더 잘 미끄러졌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금박을 조금 더 꽉 집었다.
“이 집은 소리를 잃어버린다고 하셨죠.”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사람의 말은 어디에 남을까요?”
“보통은 잘못된 곳에요.” 지훈이 웃었다. “그래서 저는 소리를 모읍니다. 말이 흩어져도, 소리는 남거든요.”
그는 축음기를 가리켰다. “이것도 결국 말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밤, 누군가의 여름, 누군가의 고백이었겠죠. 말은 잊혀도, 고백의 떨림은 주파수로 남아요.”
나는 그 말에 오래 가만히 있었다. 주파수라는 단어가 내 심장과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잡음 속에도 결이 있고, 그 결이 사람을 불러낸다는 설명은 이상하지만 유효했다.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말보다 먼저 도착한 소리 때문이었다면—그것도 그럴듯했다.
“올라가 볼까요.” 지훈이 문턱 쪽을 가리켰다. “지하에 오래 있으면, 방향 감각이 무뎌집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고양이는 우리를 앞질렀다가 뒤쫓았다가 하며 놀았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가 몸을 틀어 문을 밀자, 바깥 공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오후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 숲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고, 빛은 한층 얇아졌다.
“잠깐만요.” 지훈이 뒤에서 불렀다. 내가 돌아보자, 그는 작은 손전등을 내밀었다. “돌아가는 길에 어둡게 느껴질 수 있어요. 불은 켜지지 않아도, 손에 쥐고 있으면 덜 무섭습니다.”
“쓸 일 없으면요?”
“그럼 더 좋죠. 불이 없어도 방향을 찾았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손전등을 받아 들었다. 손에 잡히는 무게가 의외로 든든했다. 켜지지 않은 불은,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관을 지나 마당으로 나오자, 비가 오려는 듯 공기가 눅눅했다. 온실 쪽에서는 물뿌리개를 엎은 소리가 작게 났다. 담장 위로 작은 새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가, 거의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각자 선택한 방향. 내가 오늘 선택한 방향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또렷했다.
“지도는…” 내가 말을 붙였다. “지하에서 본 그 지도, X표는 뭐예요?”
지훈이 잠깐 망설였다. “이 집이 소리를 잃어버린 자리들입니다. 균열이 가장 크게 울리던 곳.”
“울림이 사라진 자리라면… 슬프네요.”
“사라졌다는 건,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지도요.”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소리는 종종 돌아오거든요. 우회해서.”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아주 멀리서 낮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지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보가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소나기가 오겠어요.”
“우산은…” 나는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산길 초입에서 보았던, 살이 뒤틀린 검은 우산이 떠올랐다.
“고장 난 우산도, 잠깐은 쓸 수 있습니다.” 그가 따라 웃었다. “완전히 막아주진 못해도, 결정적인 순간을 지연시키죠. 그 몇 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지연도 숨 같네요. 이어 붙이는 호흡.” 내가 중얼거리자, 지훈은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담장을 돌아 나왔을 때, 현관 앞 평평한 돌 위에 작은 종이 봉투 하나가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봉투 표면에는 간단한 필체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돌아보기 금지’. 관리인의 장난이겠거니 했다.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흔들자 안에서 뭔가 사각거렸다.
“열어볼까요?” 지훈이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찢었다. 안에는 얇은 종이 조각 두 장과, 아주 작게 접힌 금박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종이 한 장에는 짧게 문장이 적혀 있었다. ‘붙이려면 먼저 떼어낼 것.’ 다른 한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말보다 앞서 온 소리에 대답해 줄 것.’
“관리인…이겠죠?” 내가 말했다.
“아니면 집.” 지훈이 짧게 웃었다. “이 집은 때때로 스스로 메모를 씁니다. 누가 쓰는지 아무도 모르는 메모.”
나는 두 번째 문장을 손으로 훑었다. 말보다 앞서 온 소리에 대답해 줄 것. 축음기의 잡음, 전등의 깜빡임, 고양이의 끼어듦, 손전등의 무게. 내가 오늘 들은 것들이 연쇄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연쇄의 끝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지훈 씨.” 내가 천천히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게 오랜만이었다. 장난처럼, 혹은 업무처럼 부르지 않는 호흡. “오늘… 덕분에 살았어요. 정확히는, 살아낸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정확히는, 기다려낸 것 같아요.”
잠깐의 정적. 바람이 담장 위 이끼를 뒤로 넘겼다. 나는 봉투에서 접힌 금박을 꺼내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금박은 접힌 자리를 금 같은 선으로 남겼다. 상처처럼, 혹은 장식처럼.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지금은요.”
그 문장은 위험했고, 동시에 친절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전등 스위치를 한번 눌렀다. 전등은 켜지지 않았다. 불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까 전등이 꺼졌을 때…” 내가 불쑥 말했다. “당신 숨소리가 들렸어요. 가까이서. 그게 이상하게, 괜찮았어요.”
그는 눈을 깜빡였다. “저는… 당신이 있는 쪽으로, 숨을 쉬었습니다.”
고양이가 그 사이를 지나가며 야옹 하고 울었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위험을 잠깐 늦추는 좋은 장치였다. 그 잠깐의 지연이 때론 모든 걸 바꾸기도 했다.
나갈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빛의 가장자리가 눅진해졌다. 나는 손전등을 주머니에 넣고, 봉투와 금박을 가방 안쪽에 깊이 밀어 넣었다. ‘돌아보기 금지’라고 적힌 종이는 접지 않고 손에 쥐었다. 종이는 쥐는 사람의 온도를 금세 배웠다.
“길 끝에서 비가 오면, 우산을… 빌릴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질문을, 굳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고장 난 것밖에 없지만요.”
“그게 더 좋을지도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면… 저는 겁이 나요.”
그는 대답 대신 마당의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 나무 벤치 위에 검은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 살이 하나 뒤틀린 채. 아침에 산길에서 보았던 그것과 닮았다. 아니, 어쩌면 같은 우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들은 사람이 꾸며 놓은 경계에 덜 민감했다. 길과 집 사이를 왕복하는 버릇을 가진 것들이 있었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쥐었다. 놀랍게도 손에 맞았다. 뒤틀린 살이 손끝의 각도를 맞춰주는 듯했다. 불완전함이 방향을 정하는 기묘한 감각. 그렇게 느끼니, 이 모든 것이 갑자기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다.
나서려던 순간, 현관 안쪽 벽에서 아주 낮은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바람소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축음기가 멀리서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소리였다. 누가 크랭크를 돌렸는지 모른 채—원판이 저 혼자 움직이는 것처럼. 지훈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잡음과 멜로디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은 바람에 지워지고…”
멈칫, 하고 노랫말이 끊겼다. 그리고 아주 짧게, 그러나 명확하게 새로운 음절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돌아온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돌아온다는 말이, 이상하게 오늘의 끝을 연 느낌이었다. 돌아보지 말라는 메모를 손에 쥔 채, 돌아온다는 노랫말을 들었다. 두 문장은 충돌하지 않았다. 모순처럼 보였지만, 사실 같은 방향이었다. 돌아보지 않아야 돌아올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대답하지 않아야 들리는 것들이.
비가 첫 방울을 떨어뜨렸다. 돌계단이 둔탁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뒤틀린 살이 한쪽으로 향해, 빗방울을 사선으로 미끄러뜨렸다. 지훈이 현관 문턱에 서서, 고양이를 품에 안고 나를 보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문장이, 때로는 가장 큰 대화가 되었다.
나는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우산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내 신발 코끝을 적셨다. 길은 두 개로 갈라져 있었고, 둘 다 어둠으로 이어졌다. 손전등은 여전히 꺼진 채 내 주머니 속에서 조용히 무게를 유지했다. 켤 수 있는 불을 켜지 않은 채 걷기. 그건 무모함이 아니라, 연습 같았다. 호흡의 길이를 늘리는 연습.
돌담을 돌아설 즈음, 바람이 뒤에서 내 등을 밀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손 안의 종이를 더 세게 쥐었다. ‘돌아보기 금지.’ 그러나 귀는 뒤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그 마지막 음절이, 빗소리와 섞여 길게 이어졌다.
돌아온다.
그 말은 위로였고, 경고였고,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재미였다. 웃음이 작게 났다. 내가 웃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고, 우산의 뒤틀린 살은 그 비를 적당히 흘려 보냈다. 완벽하지 않은 평온이, 오늘 내게 허락된 최대치였다.
길모퉁이를 돌 때, 휴대전화 화면이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꺼내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선택이 처음으로 덜 두려웠다. 손전등 스위치를 괜히 한 번 더 눌러 보았다.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 속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화면이 주머니 속에서 다시 한 번 오래 떨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아니라, 길게 울리는 호출음이었다. 내 손이 본능적으로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유리와 손끝이 만나려는 순간, 우산의 살이 조금 더 뒤틀리며 시야의 한쪽을 비워 주었다. 길 위, 물고인 작은 웅덩이에 현관 불빛이 흔들렸다. 불빛은 금빛 선처럼 수면 위를 길게 그었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대답이 늦어지는 시간만큼, 소리는 내 쪽으로 더 가까워질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아주 짧게 숨을 멈췄다.
— 현우.
그리고 그 아래, 화면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알림 한 줄.
— 미수신 메시지 1: 지훈.
비는 더 굵어졌다. 우산은 충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나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아직 대답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선택은 여전히 말보다 느렸고, 대신 소리가 먼저 왔다. 멀리서 축음기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잡음과 멜로디의 경계에 선, 우리 셋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우산을 조금 더 기울였다. 그리고 아직 누르지 않은 응답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잠시 떠 있게 했다. 여백은 쉽게 훼손되지 않는 작은 면적이었다. 오늘 내가 배운 것들 중 가장 재미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 작은 면적을 오래 지키는 일이, 다음 장면을 만든다는 것.
비가 손끝을 스쳤다. 나는 웃었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