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26

by 은서의 숨겨진 책

균열의 서곡 26


진동은 멈췄는데, 내 안에서만 계속 울렸다.

마치 심장이 휴대폰의 부품이 된 것처럼.

현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다시 유리잔을 닦았다.

닦는다는 행위가 이 집에서는 늘 “지우기”에 가까웠다.


나는 주머니 속 화면을 보지 않았다.

보는 순간, 내가 나를 배신할 것 같아서.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았다.

이 집은, ‘확인하지 않은 것’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점심엔 간단히 먹자.”

현우가 말했다.

일정표를 읽듯 단정했고, 그래서 더 불길했다.

단정함은 늘 미리 결정된 결말을 품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밖의 산을 한 번 더 봤다.

산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산이 모르는 걸 이 집은 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내가 그걸 ‘원한다’는 것까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짧게. 딱 한 번.

집이 숨을 참는 소리처럼.


현우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발끝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가 복도를 지나 현관 쪽 벽에 닿는 순간,

금빛 균열이 아주 가늘게 떨었다.


나는 그 떨림을 읽었다.

“누가 왔는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누가 들어오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떨림.


현우가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실내로 한 겹 밀려 들어왔다.

그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배송이요. 그리고… 요청하신 점검 담당자 함께 왔습니다.”


점검.

그 단어는 이상하게도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현우가 언제 점검을 요청했지?

아니면—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현우의 “아, 네”라는 대답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내게는 가장 큰 설명이었다.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나는 현관 쪽으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방과 거실 사이, 반쯤 가려진 곳에 섰다.

숨기기 좋은 위치.

이 집은 언제나 나에게 ‘숨길 자리’를 먼저 알려줬다.


현관에서 발소리가 하나 더 들어왔다.

배송기사의 무게가 아니라,

익숙한 리듬의 발걸음.

내 기억이 먼저 알아보는 걸음.


그리고—그 사람이 보였다.


지훈.


이 공간에 없는 사람으로만 존재하던 이름이

갑자기 ‘몸’이라는 형태를 얻었다.

현우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라

나는 잠깐,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했다.


지훈은 회색 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실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눈길이 벽면을 스쳤고,

그 순간 금빛 균열이—숨을 들이켰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느꼈다.

그가 이미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보지 않음으로써 더 정확히 보는 사람의 방식.


“오랜만입니다.”

지훈이 말했다.

현우에게 하는 인사였는데,

내 귀에는 내 이름을 부른 것처럼 들렸다.


현우는 손을 내밀었다.

두 남자의 손이 맞닿는 순간,

벽면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한 금속성 소리가 났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열쇠가 흔들리는 소리도 아닌—

‘봉인’이 풀릴 때 나는 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내 피부에 닿아 뜨거웠다.

진동이 오지 않았는데도.


“점검은 무슨 점검이에요?”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잘 나왔다.

불안이 심하면 사람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현우가 잠깐 웃었다.

“집이 오래됐잖아. 습도도 그렇고.

지훈 씨가… 이런 쪽으로 잘 안다고 해서.”


‘잘 안다’는 말이 내 속을 긁었다.

지훈이 뭘 잘 안다는 걸까.

집을?

균열을?

아니면—나를?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크게 손댈 건 없을 겁니다. 다만…”

그의 시선이 복도 끝,

내가 아직 들어가 본 적 없는 문을 향했다.

“…닫아둔 공간은, 더 빨리 상합니다.”


닫아둔 공간.

나는 순간, 내 안쪽도 함께 들킨 느낌이 들었다.


현우가 말했다.

“수연, 너는 위층에 있지? 나는 잠깐 서재 정리할 게.”


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배치였다.

세 사람을 같은 집 안에 두고,

각자의 위치를 정해주는 사람.


현우가 서재 쪽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나는 동안에도

그의 그림자가 벽에 닿을 때마다

금빛 균열은 아주 느리게 따라 움직였다.

마치 그림자를 먹고 사는 생물처럼.


현관 근처에는 배송 박스가 놓여 있었다.

식물용 비료, 손잡이 달린 작은 도구,

그리고—유리병 하나.

병 속에는 금빛 가루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이건 배송이 아니라, 유인이다.


지훈이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병의 표면을 쓰다듬자

병 속 가루가 아주 천천히 일렁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이런 건… 주문한 적 없는데요.”

내가 말하자 지훈이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죠. 그래서 왔습니다.”


그 순간, 내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주머니 속에서, 아주 얕게.

딱 한 번.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주방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숨기기.

내 오늘의 미니 사건은, 이미 시작됐다.


지훈이 내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를 던졌다.

“확인 안 하실 건가요.”


그 말은 현우의 말과 똑같았다.

그런데 지훈이 말하면

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라 함정이 된다.


나는 결국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통화 기록이 아니라,

음성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보낸 사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그런데 나는 안다.

이 집에서 ‘알 수 없음’은

대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온다.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꺼버렸다.

그 순간, 지훈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너무 가까웠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면

등이 벽에 닿을 거리.

금빛 균열이 있는 벽.


“여기.”

지훈이 말하며,

배송 박스 아래 깔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짧은 메모였다.


— 이 집은 기억을 훔칩니다.

— 훔쳐가도, 흔적은 남아요.


내 손끝이 떨렸다.

메모의 종이는 말라 있었는데

글자만 축축하게 젖어 보였다.


“이거… 누가…”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지훈이 아주 낮게 말했다.

“당신이요.”


나는 숨이 막혔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예전에 쓰던 말버릇이 있어요.”

지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문장 끝이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흔적은 남는다’…

당신은 늘 그렇게 말했죠.”


나는 그 말을 한 적이 있는지 떠올리려 했는데

기억의 표면이 이상하게 미끄러웠다.

잡으려 하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 집의 규칙이,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았다.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더 미끄러워진다.’


나는 메모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숨겨야 했다.

현우에게 보여선 안 됐다.

보여주는 순간, 이건 ‘증거’가 된다.

증거는 관계를 움직이고,

관계가 움직이면 집도 움직인다.


지훈이 나를 지나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점검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내해 주시겠어요?”


안내.

나는 이 집에서 길을 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늘 집이 나를 안내해왔다.

이제 내가 누군가를 안내하면,

그 대가를 내가 치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지훈이 뒤에서 따라왔다.

발소리가 두 개.

그런데 복도는 세 사람의 리듬으로 울렸다.

현우의 부재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복도 중간,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지훈이 멈췄다.

거울은 우리를 두 사람으로 비췄는데

어딘가엔 늘 세 번째가 숨어 있었다.


“거울은 오래 보지 마세요.”

지훈이 말했다.

“여긴… 반사보다 기억이 먼저 움직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울 속 내 눈이 낯설어졌다.

내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 눈을 통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시간 제한을 걸어야 했다.

이런 순간엔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


‘현우가 서재에서 나오기 전까지,

지훈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나는 일부러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위층부터 보시죠.”

내가 말하자 지훈이 잠깐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층,

그 닫힌 문 쪽으로 다시 흐르려 했다.


하지만 지훈은 내 선택을 따라왔다.

그게 더 무서웠다.

따라온다는 건,

내가 도망갈 길까지 계산했다는 뜻이니까.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내 주머니 속 메모가 더 무거워졌다.

종이가 아니라, 고백을 넣어둔 것처럼.


2층 복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집 전체가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전기가 불안정한가 봐요.”

내가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집의 깜빡임은 늘 ‘반응’이었다.


지훈이 내 앞을 지나가며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를 말리려 했다.

“그 방은—”


그 순간,

지훈의 손이 손잡이를 잡는 동시에

내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생각보다 강하게.

멈추게 하려는 힘이라기보다

나도 모르게 ‘확인’하려는 힘.


피부가 닿았다.


그 즉시

집 안의 모든 조명이 동시에 한 번 더 깜빡였다.

이번엔 단순한 전기 이상이 아니었다.

빛이 꺼졌다 켜진 게 아니라

빛의 ‘온도’가 바뀌었다.

차가운 빛에서 따뜻한 빛으로.

마치 누군가의 체온을 따라가는 것처럼.


나는 손을 놓지 못했다.

지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짧은 정지의 시간에

내 몸의 감각들이 과장되었다.

손끝, 손목, 숨, 심장, 그리고—죄책감.


죄책감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흥분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뜨거웠다.


‘왜 이 사람 앞에서는

죄책감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나를 깨우지?’


지훈이 아주 낮게 말했다.

“보셨죠.”


“뭘…”


“집이 반응하는 조건.”

지훈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젖어 있었다.

“당신 감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접촉.

그리고… 억제.”


억제.

그 단어가 내 목을 조였다.

나는 지금 억제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그리고—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전등이 다시 안정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우리 손끝에는

이미 ‘일어난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뗐다.

그때 내 손바닥에 뭔가가 묻어 있는 걸 봤다.

아주 미세한 금빛 가루.

아까 현관의 유리병 속 가루와 같은 색.


언제 묻었지?

지훈을 붙잡는 순간?

아니면 집이 내 손에 흔적을 남긴 걸까.


지훈이 내 손바닥을 보았다.

그 시선이 닿자

금빛 가루가 아주 잠깐,

실처럼 이어져 작은 문양을 만들었다.


균열의 모양.

하지만 벽의 균열과는 조금 달랐다.

방향이 있었다.

마치 ‘어딘가로 가라’고 지시하는 화살표처럼.


지훈이 속삭였다.

“아래층입니다.”


“아래층?”


“당신이 막으려 했던 그 방.”

지훈은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아서 더 진심 같았다.

“현우 씨가 닫아둔 곳.”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현우가 왜 그 문을 닫았는지 모르지만,

닫아뒀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했다.

현우는 ‘무너질 것’을 닫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뜨릴 것’을 닫는 사람이니까.


그때 아래층에서 서재 문 여는 소리가 났다.

현우의 발소리.

이 집에서 가장 단정한 리듬.


시간이 없었다.

타임어택.


‘현우가 2층으로 오기 전까지,

금빛 가루를 지우고,

메모와 휴대폰을 숨기고,

지훈과의 거리도 다시 정리한다.’


나는 욕실로 달려갔다.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금빛 가루를 덮었는데

가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 젖으며 더 반짝였다.

마치 씻겨 나가는 게 아니라

피부에 스며드는 것처럼.


거울 속 내 얼굴이 창백했다.

그런데 눈동자 어딘가에

아까 조명의 따뜻한 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알 수 없음의 음성 메시지를 삭제하려 했다.

그런데 삭제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저장됨’이라는 작은 표시만 깜빡였다.


저장됨.

어디에?


그 순간 화면 상단에 알림이 떴다.

— 자동 백업 진행 중.

— 음성 파일 업로드 12%.


나는 숨이 멎었다.

손이 얼어붙었다.

이건 내가 조작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이 집이 조작하는 증거였다.


복도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


나는 휴대폰을 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손바닥의 금빛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지울수록 더 남는 흔적.

이 집이 좋아하는 방식.


문 밖에서 현우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이 집에서 가장 위험한 거짓말이다.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균열이 자라기 시작하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현우는 내 손을 보지 않았다.

아니면—보지 않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뒤, 계단 아래에서

지훈이 조용히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같은 공간.

다른 긴장.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소리 없는 마찰을 냈다.


현우가 말했다.

“점검은 잘 돼?”


지훈이 대답했다.

“네. 집이… 생각보다 예민하네요.”


현우가 웃었다.

“사람이 예민한 것보다 낫죠.”


그 말에 내 심장이 한 번 내려앉았다.

현우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내가 떨리길 기다리는 걸까.


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뜨거워졌다.

업로드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볼 수 없었다.

보는 순간,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런데도 알림은, 자비 없이 떴다.

눈앞이 아니라, 마음속에.


— 음성 파일 업로드 100%.

— 공유 대상: “현우”.


마지막 줄이, 내 목을 정확히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