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신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불안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다.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해 두면, 적어도 내가 나를 놓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 번에 아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 번 어긋나며 겨우 알아가는 존재다.
내가 가장 자주 착각하는 것은 내 마음의 속도다.
나는 늘 빠르다고 생각한다. 판단도, 결정도, 감정도.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의 어떤 부분이 아주 느리다.
특히 상처는 느리다.
상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고,
몇 달 뒤 평범한 문장 하나에 갑자기 몸을 떨게 만든다.
그때 나는 놀란다. “이게 아직도 남아 있었나?”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느낄 여유가 생긴 것뿐인데도.
우리는 자기를 이해할 때
머리로 하는 설명을 너무 믿는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이거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설명은 깔끔하고, 그래서 안심이 된다.
하지만 설명이 깔끔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마음은 원래 그렇게 깔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 문장에 맞지 않는 자기의 일부를 몰래 삭제한다.
그리고 삭제된 부분은 언젠가,
이유 없는 피로와 알 수 없는 짜증 같은 형태로 돌아온다.
나는 한때 감정의 목적이 “옳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슬픔은 잘 정리되어야 하고, 분노는 빨리 가라앉아야 하고,
불안은 계획으로, 우울은 의지로 해결해야 한다고.
그 믿음 덕분에 나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멀쩡함은 종종,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참는 데 익숙해졌다는 증거일 수 있다.
참는 기술이 늘어난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아픔을 숨기는 사람이 된다.
어느 날 나는 아주 사소한 일로 속이 무너졌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
별뜻 없었을 법한 표정,
그 정도였다.
그런데 마음이 그 말에 꽂혀, 하루가 다 흔들렸다.
나는 나를 달래려 했다. “그건 네 과민이야.”
“그 사람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논리적인 문장들을 꺼내 붙였지만,
마음은 한참 동안 듣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마음은 논리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으로 진정된다는 것을.
존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래, 지금은 아플 수 있어.”
그 한 문장을 내 안에 허락하는 일이다.
감정에 출입증을 내어주는 것.
가장 힘든 감정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금지하고 싶어 하지만,
금지된 감정은 더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린다.
반대로, 잠시 앉을 자리를 내어주면
그 감정은 이상하게도 조용해진다.
마치 “나도 여기 있어도 되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처럼.
나는 요즘 ‘해결’보다 ‘동행’이라는 말을 더 믿는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뿐,
형태만 바뀌어 다시 나타난다.
그렇다면 삶은
문제를 없애는 기술이라기보다
문제를 품고도 인간답게 사는 기술에 가깝다.
그리고 그 기술은
강해지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에게 부드러워지는 것으로 완성된다.
사람은 타인에게는 자주 말한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자책하지 마.”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는
그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자기에게는 늘 엄격한 기준표를 들이대며
조금만 흔들려도 “또 이러네”라고 몰아붙인다.
나는 그 태도가
성실함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왔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흔들리면 끝장날 것 같아서,
무너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래서 먼저 채찍을 든 것이다.
하지만 삶은 생각보다
한 번의 무너짐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너지면서도 계속 살아남는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이미 회복의 증거다.
그러니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라는 질문 대신
“나는 이렇게 흔들리면서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를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질문이 바뀌면
자기 자신을 대하는 손의 온도도 바뀐다.
나는 여전히 나를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평생 다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완전함이
부끄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건
내가 아직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내가 아직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삶의 통찰은
거창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덜 잔인해지는 방법을
하루에 한 번씩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나를 몰아붙이려는 순간이 오면,
나는 아주 작은 문장을 꺼내어 붙여 보려 한다.
“그래도 너는 여기까지 왔다.”
그 한 문장이
하루를 끝장내지 않게 해 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날이 많아지면,
삶은 조금씩
살 만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