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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ena Sep 22. 2022

누구나 외로워지는 날이 있다

해외 살이의 가장 큰 적, 외로움

유학이나 이민 등으로 해외에 장기간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어느 순간 지독한 외루움을 느껴봤을 것이다. 이주 초기에는 집을 구한다, 학교나 직장에 적응한다 하면서 정신이 없어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가,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도 익숙해지고 나면 어느 시점에 갑자기 외로움이 찾아온다. 친구들을 만나고, 모임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새로운 사람과 데이트를 해도 차가운 공기에 옷깃을 여미며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느껴지는 묵직한 외로움은 한번 찾아오면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익숙한 고향을 떠나 와서 낯선 얼굴을 한 사람들 속에 섞여 지내는 것 그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외로움은 반드시 '혼자'라서 생기는 감정은 아닌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지내는 연예인들이 외로움을 토로하는 걸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단순히 주변에 타인의 존재가 있는지 여부에 따른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없어서 혹은 만날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서 생기는 감정도 아니다. 물론 혼자라는 사실, 그리고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텅 빈 시간들이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것도 맞지만 그때문에 생기는 감정 혹은 상태는 아니다. 연인이 있거나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외로움을 느낀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보다는 나를 이해해주는 '내 것'인, '내 편인' 누군가의 존재의 부재가 외로움의 정확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나를 진정으로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을 터놓고 그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때 내가 이해받고 있으며 그 어떤 편견과 판단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외로움을 느끼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것,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꼭 해외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각자 너무나도 다르고, 특히 성인이 된 후에 만난 친구들은 각자의 자아라는 견고한 성을 이미 구축한 상태에서 만나기에 그 높은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각자 가지고 있는 삶의 문제들과 남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혹은 이해받기 어려운 고민을 용기내어 털어놓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쌓아올린 견고한 자아의 벽과 함께 커진다. 어른이 되고 겪는 거절의 무게가 어릴 때 친구네 집 문을 두드리며 "친구야 놀자~"고 했다가 들었던 거절의 말만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비단 해외에 혼자 사는 이들만 겪는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해외 살이를 하며 지독한 외로움의 늪에 빠지기 훨씬 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태어나서, 혹은 적어도 긴 시간을 지내며 쌓아온 타인과의 견고한 관계가 부재하는 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간다는 것은 허허벌판에 서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집터를 찾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손에는 익숙지 않은 뭉툭한 망치와 벽돌 한개가 덩그러니 들려 있다. 적당한 자리를 찾고, 적당한 돌을 찾아 갈아내고, 운이 좋다면 고된 일을 도와줄 친절한 이웃을 만나 함께 지반을 다지고, 크기와 위치에 맞는 돌을 하나 하나 쌓아 올린다. 오랜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고, 울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안방 벽이 될 지도 모른다. 이 집이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견고한 주택이 될 지, 아니면 거센 태풍이 오면 그대로 무너져버릴 가벽인지 알 수 없다. 어릴 때 친구들을 사귀고 하나의 사회에서 살아갈 때에는 크게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만큼 자유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겁이 나기도 한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두려운 마음에 관계에서 한걸음 물러서고, 또 자꾸 물러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혼자가 되어 있다. 계속 발장구를 치지 않으면 가라앉는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불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근 몇십 년 사이 기술이 발달해서 이제는 고국에 살고 있는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언제난 채팅, 전화 통화 혹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어, 해외에 살면 소식이 아예 끊겨버리던 옛날과는 다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알 수도 있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친구의 근황에 그냥 간편한 답글이나 메시지 하나로 안부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이 모든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대면 수업과 재택근무, 그리고 메타버스와 함께 자라난 미래 세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날로그 형식으로 자라난 나는 화면 너머의 존재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깊은 관계를 맺어온 가족과 친구가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한 -아직까지는- 기술이 그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꿔주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있다. 영어와 현지어에 능숙해져도 결국 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원어민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현지 친구와 만날 때도 그렇고,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만날 때도 그렇다. 각자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고, 인간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갑갑한 순간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쓰고 있는 '외로움'에 대한 깊고 복잡한 감정들을 단순히 "나 외로워." 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긴 시간을 투자해서 오랫동안 설명해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다다를 수 있는 주제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영어 혹은 현지어에 능숙해서 언어상으로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더라도, 문화적인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최근에 스웨덴 친구가 자신이 들은 팟캐스트 이야기를 해주었다. 감정과 분노를 다스리는 데 있어 서양인 (유럽 및 북미 기준)과 동아시아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연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양인들은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는데, 실제로 서구권에서는 화가 나거나 억울한 감정이 있으면 이를 겉으로 표현하고 소통해야 심박수와 스트레스 지수가 떨어지는데, 동아시아인들은 그 순간 감정을 참으면 이를 외면적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어느 시점 이후에 심박수가 자동으로 떨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서구인들은 감정을 억누르면 그 감정과 스트레스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동아시아인들은 감정을 억누르면 실제로 감정이 억눌러지는(!) 결과를 의학적으로 관찰했다는 것이었다. 문화권에 따라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고, 따라서 친구 사이에서 이에 관한 오해와 공감의 부재가 발생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다른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의 감정과 소통에 관한 경험과 관점의 차이로 인해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떠올랐다. 또한 웃음의 활용 역시 문화권 별로 차이가 나는 부분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웨덴 사람들의 첫인상이 차갑거나 소심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모르는 사람과 스몰토크를 잘 하지 않는 편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잘 웃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를 시작하거나 아는 사이가 되면 그들의 얼굴에서 편안한 미소를 볼 수 있다. 반면, 한국, 일본, 중국인들의 경우 미소는 다소 의도적인 노력일 때가 많다. 특별히 웃긴 일이 있거나, 아니면 상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미소는 상대에게 호의 혹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표현해 보이는 노력의 결과다. 여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때로 동아시아인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미소는 비판을 받곤 한다. 어색하거나 난감해서, 혹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호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미소를 지었을 때, 다른 문화권 출신의 화자는 이를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오인하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미숙한 행동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다. 상대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과 제스쳐 역시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중 하나다. 일대 일 관계에서 충분히 가까워지면 이러한 오해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몇십 년간 쌓아온 경험의 차이를 완벽하게 상호적으로 이해하게 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언어와 문화권에 상관없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다.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꼭 서로 잘 맞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배경을 공유할 때와는 다른 종류와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해외에 사는 우리가 때로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깊은 연결을 구축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을이 되고 점점 추워지는 북구의 공기 역시 이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새 10도 이하로 뚝 떨어진 저녁 공기와 함께 찾아오는 환절기 감기 역시 외로움의 큰 적이다.



***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새로운 취미를 시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도록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고, 동시에 외로움이 찾아올 때 이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방을 아늑한 조명으로 채우고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 음악과 와인을 함께 즐긴다거나 아니면 어느 화창한 오후 잘 차려입고 나가서 스스로와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운동을 하거나 짧은 여행을 하는 것도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다. 


다른 한편,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힘든 상황이거나 에너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외롭거나 서러운 마음이 들어도 이 감정에는 실체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빳빳히 들고 걸으려 한다. 두통이 있으면 두통약을 먹으면 되고, 피곤하면 자면 된다. 하지만 외로움은 한 알의 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하고 산발적인 감정이라 쉬운 해답이 없다. 친구가 없으면 친구를 사귀면 되고, 애인이 없으면 애인을 만들면 되는 그런 종류의 해결책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이 감정에 지나치게 깊이 몰두해서 너무 많은 에너지와 마음 속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이는 그다지 좋은 대응책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이려니 하고 잠시 바람을 맞은 뒤 다시 걸어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인생에 닥치는 모든 크고 작은 풍파와 감정들을 매 단계마다 완벽히 해결해 나가며 살 수는 없다. 특히 해외에 나와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의 보호자이자 잘 돌봐줘야 할 자녀임과 동시에 인생의 경영자이고 스스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인이어야 할 때가 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스스로를 잘 돌보되, 동시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때로는 이 외로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자.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차갑고 낯선 공기도 익숙한 '나의 도시'의 공기가 되어 있으리라. 








(커버이미지: 스웨덴 예테보리의 구시가지 대로 'Vasagatan',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teborg_Vasagata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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