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하루 앞두고 동생 J 가 ‘파이널 판타지 IV 빛의 아버지’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파이널 판타지라는 게임을 하진 않지만 몇 번 본 애니메이션 영상이 마음에 들어서 보기로 결정했다. 보기를 참 잘했다. 살면서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많지 않은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동생 J는 영화 초반부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반복하며 말했다. “와, 이 영화 제대로 가슴 치네~ 아주 가슴에 와서 콱 내려친다, 정말~”라고 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여댔다.
줄거리는 이렇다. 평소 아버지와 관계가 서먹한 아들이 갑자기 정년 퇴임한 아버지를 알아가기 위해 어렸을 적 추억이 깃든 파이널 판타지라는 온라인 게임을 같이 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 게임 속에서 현실에서 나누지 못한 대화를 하며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단순히 내가 주인공의 입장(자식)의 입장과 겹쳐서 그렇게 감동이었을까. 아주 사소한 대사, 씬에서부터 느껴지는 울림들의 여운이 아직도 내 마음 안에 살아있는 기분. 잔잔한 파도 같은 울림들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대서양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온.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내 아빠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아빠는 정년퇴임을 앞으로 2-3 년 앞두고 계신다. 60 평생을 성실하고 검소하게 일 하시며 자식 셋을 포함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동생들과 그들의 가족 모두 돌보아온 그의 삶을 이제 막 서른이 된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와는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부분들이 다른 아빠라는 사람을 나는 과연 얼마까지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아빠의 커피 타임이 떠올랐다. 부모님께서는 작년 나와 동생집에 방문하셨다. 독립 후 몇 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생활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모님께 가장 먼저 가르쳐 드린 것은 작은 커피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내 기억에 부모님께서는 보통 인스턴트커피를 가끔 드시거나 커피를 자주 안 드셨다. 그래서 처음 보시는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과 우유 거품기가 매우 낯설으셨을 것이다. 캡슐을 넣어서 커피를 내리고 우유 거품기로 우유를 데워서 각자 기호에 맞게 커피를 만드는 일은 꽤 간단했고 부모님께서는 제법 본인들 기호에 맞게 곧 잘 만들어 드셨다. (부모님은 카푸치노를 제일 좋아하셨다)
그렇게 부모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사는 한 달 반 동안 매일 카푸치노를 만들어 드셨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부모님께서는 본인들 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미 커피를 사랑하는 우리 자매 셋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참에 부모님께 커피 기계를 선물하자고 했고 우유 거품기와 충분한 커피 캡슐들을 포함해 기쁜 마음으로 커피 기계를 배송시켰다. 평소 굉장히 검소하게 사시는 부모님께서는 커피 기계를 받으시고 처음에는 “이 비싼걸” 혹은 “이런 걸 왜 사 보내” 등의 예상한 반응을 보이셨다. 특히 아빠는 기계의 가격뿐만 아니라 캡슐의 가격도 비싸지 않으냐며 앞으로 사야 할 캡슐의 가격 걱정도 하셨다. (그럴 줄 알고 우리 자매 셋은 캡슐까지 넉넉하게 함께 보내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부모님께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화면 속에 엄마 아빠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계셨다. 각자 손에는 엄마가 제일 아끼시는 꽃 무양이 예쁜 도자기 찻잔들을 들고 계셨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가 그 찻잔들을 찾장에서 꺼내 쓰시던 적은 중요한 손님들을 초대하셨을 때뿐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첫 카푸치노를 축하하는 의미로 그 소중한 찻잔들을 일부러 꺼내셔서 커피를 만들어 드시며 우리들과 함께 그 축하의 시간, 커피 타임, 을 나누셨다.
부모님과 같이 살기 전에는 단순히 '부모님은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보네.' 혹은 '커피맛을 잘 모르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단순한 생각들이 전부였다. 솔직하게 어떻게 보면 딱히 관심도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얼마나 아둔하고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래 가사 말과는 또 다른 것이다. 과연 “어머니는 짜장면을 여러 번 드셔 보셨고 그 후에 싫어한다는 기호가 생기신 걸까?” 누군가의 기호에 대해 알려면 일단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구나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의 씨앗을 가꿔서 풀잎이 나오도록 꾸준히 지켜보고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나 내가 사랑하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커피 기계를 쓰신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아빠는 영상통화로 자신의 카푸치노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며 한마디 하셨다
나는 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야
엄마와 함께 아침에 직접 만들어 드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 그 커피를 음미하시며 마음속에서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시간, 나아가 가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아빠는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하셨다.
커피 타임은 아빠의 삶에 행복과 여유로움을 선물했다. 평생 자신의 인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 희생한 자신에게 매일 주는 행복이란 선물인 셈이다. 오늘도 영상통화로 부모님과 커피타임을 함께 하며 든 생각:
어제보다 오늘 더 상대방을 알아가고 그럼으로써 상대방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 아닐까
추천곡: 엄마 아빠가 좋아하시는 비틀즈의 Hey J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