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80년 전 명륜동에 살던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서너 살 때 덜커덩덜커덩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일이 나이 들어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제 나이만 하실 때 여쭤보았지요. 어머니는 영특하신 머리로 아주 재미있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저희 식구는 조부모님, 부모님, 숙부와 숙모님, 고모님, 시골에 살다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유학 온 사촌들 등 합해서 18명쯤 되었습니다.
군식구들은 방학이 되면 집에 내려갔다지요. 그러면 이불 빨래를 했습니다. 이불 홑청을 뜯어낸 게 그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집에서는 도저히 빨래할 수 없는 양이었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소달구지와 마차꾼을 하루 품삯 주고 사주셨어요.
어머니와 고모님, 넷째 숙모가 이불 빨랫거리, 큰 솥, 장작, 양잿물 비누를 소달구지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출발했지요. 그 당시 집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저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달구지에 태워서 갔다고 합니다.
어른 세 분이 정릉 빨래터에 도착하면 가져간 나무로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커다란 솥을 얹어서 물을 끓이고 양잿물 비누를 넣고 이불 홑청을 푹 삶았지요. 그리고 빨래를 꺼내 빨랫방망이로 탕탕 두드려서 헹구기를 계속하면 쿰쿰한 내 나던 빨래들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정릉 빨래터엔 저희 어른들뿐 아니라, 빨랫줄 빌려주는 일, 빨래 삶아주고 빨아주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타다닥, 타다닥 빨래 두드리는 소리가 빨래터에 넘쳐났다고 합니다,
요즘에 환경 오염으로 경찰서 갈 일이지만 옛날엔 다 그렇게 살았고, 그 시대의 대표적 정경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빨래하시면 저는 남은 빨래 위에 앉아 어머니가 주신 떡이나 누룽지를 먹으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집에서도 우는 게 일이었다네요.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오전 중에 바삐 빨래를 마치고, 빨래를 널었답니다. 빨래가 마를 때까지 어른들은 싸 가지고 간 점심을 먹고 좀 쉬었다죠. 힘이 좀 나면 맑은 물 따라 상류로 올라가 구경도 했다지요.
한여름 볕과 시원한 바람에 빨래는 잘 마르고, 해넘이에 빨래를 걷어 달구지에 싣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저는 마른빨래 위에서 세상모르고 잤다고 합니다.
오로지 소달구지 타고 가던 기억에 이렇게 다양하고 정겨운 어머니의 이야기가 따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저도 따라갈 나이가 된 마당에, 이제 그곳이 남아 있으려나 하고 인터넷에 찾아보면 흔적이 없습니다.
그 추억의 거리를 다신 가보지 못하고 살다 보니 그리움에 글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