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바람

이방인의 삶과 창작의 고유성

by 이음

스페인에서 살고 있다. 여전히 완벽히 편하지 않은 언어의 벽 앞에서, 때로 감정의 미세한 결을 다 옮기지 못해 말끝이 흐려질 때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하게 나의 출신지를 떠올린다.

누군가 묻는다. "어디서 왔어요?" 나는 "한국에서요"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단지 지리적인 위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이름 속에는 내가 뛰놀던 골목길의 풍경, 정겹지만 에둘러 표현하던 어른들의 말투, 세상의 변화를 숨 가쁘게 따르던 특유의 속도감과 그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나만의 눈높이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배경이나 국적을 넘어, 내가 세상을 해석하고 삶의 가치를 매기는 방식, 내 감정의 뿌리가 된다.


어딘가에서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의 색이 스며든다. 말투도 조금씩 바뀌고, 때로는 반응의 속도마저 더뎌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선명하게 내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디서 왔는지를 되새긴다. 이방인으로 살며 나의 출처를 단단히 붙잡는 일은, 마치 내가 써내는 문장 끝에 스스로의 이름을 또렷이 새기는 일과 닮아 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중요한 건 지금 네가 누구냐는 거지, 어디서 왔는지가 뭐가 중요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현재의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면, 내가 걸어온 길, 나의 시작점을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에 갇혀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리 표시이자,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존중의 표현이다.


살다 보면 내가 한 말이, 내가 쓴 문장이, 나의 경험들이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포장되거나 흔적도 없이 지워질 때가 있다.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둔갑하거나, 내가 표현한 감정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될 때의 무력감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때로는 누군가는 나를 이해한다면서 정작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말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마치 내 존재의 일부가 도둑맞은 듯한 깊은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나의 출처는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아야 하고, 빼앗기지 않아야 하며, 잘못 옮겨 적히지 않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아쉬움이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내 이야기가 그 뿌리를 잃고 왜곡되거나 도용될 때, 그것은 곧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흐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빛처럼 빠르고 멀리 퍼져나가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글이나 창작물이 순식간에 복제되고 가공되어 원작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도는 일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출처가 지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심코 내가 만든 새로운 생각인 양 착각하며 소비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분명 내 것이지만 온전히 내 것이라 소리 내어 말하기 어려웠던 그 막막함과 불안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내 이야기를 온전히 내 목소리로, 나만의 방식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나라의 낯선 햇살 아래, 다른 언어로 삶을 꾸려갈지라도 내 안의 근간만큼은 단단히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바람은 비단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 모든 창작물이 저마다의 고유한 출처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출처가 명확하다는 건, 곧 존재 자체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누구든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해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이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혹은 하나의 아이디어든 말이다.

출처가 지워진 이야기는 정처 없이 떠돌다 결국 그 빛과 의미를 잃고 만다. 마치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으면 나 자신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나는 단지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내가 자란 언어, 소중한 기억들, 잊히지 않는 풍경들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금 이곳의 나를 이루는 근본적인 힘이자,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다.

내 존재의 기반이 온전히 지켜질 때, 나는 비로소 낯선 이곳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이국땅에서 매 순간 느끼고 이해하는 저작권의 감각이다. 나의 이야기, 나의 시선, 나의 뿌리가 왜곡 없이 분명히 기록되는 일.


나는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지우지 않는다. 그건 나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내 삶의 문장 끝에 꼭 남겨야 할 작은 서명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