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감할 수 있다는 축복

80억 지구인들의 관점을 수용해보려 한다

by 김성민

앞서,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모두는 각자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밝혔다. 즉 같은 현상을 보아도 지구에서만 80억 개의 시선과 다른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사람들의 시선을 결정하는 원인이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도 나의 시선에서 결정 내린 것이고, 틀릴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분노를 가지지 말자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들의 결정 난 시선에서 행동하는 것이니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유전과 환경을 이해해 보자고 했다. 그건 어쩌면 우리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서고, 그렇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 보기를 제안했다. 타인의 행동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해하면 그 사람의 행동이 좀 더 너그러워 보이는 경향이 있다.


타인의 행동에 이해는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 행동에 공감도 할 수 있을까? 공감과 이해는 타인의 행동을 내 시선으로 해석한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지만, 이해라는 것은 타인의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고 납득하는 이성적인 행위라면, 공감은 좀 더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시선을 따라가 보고 체험하는 조금 감성적인 행위라고 생각이 든다. 즉 공감은 이해를 전제로 한 좀 더 심화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들의 환경과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그 시선이 어떨지 추측하는 과정이다.


공감은 왜 필요할까? 공감은 개인과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회가 시행하는 여러 제도들은 공감이 그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취약 계층을 위한 제도는 약자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감의 과정이다. 공감하는 개인이 많고 공감하는 문화가 생겨날수록 사회적으로는 배려와 양보를 담은 제도가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공감은 배려와 양보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그들의 시선으로 느끼는 게 전혀 없다면, 그들을 위한 행동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회에 공감이 없다면, 잘난 사람들은 계속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고,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어져 세상의 불균형이 더 커질 것이다. 또한, 약자와 타인을 챙기지 않는 사회는 분명 발전이 멈추게 되고, 끝에 이르러서는 약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파멸하는 최후를 맡게 될 듯하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공감은 소통과 인간관계의 근간이 되어준다. 이 강력한 도구가 없으면 사람들은 서로 연결될 수 없고, 결국 서로 단절되어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약자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또는 수많은 지구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공감까지 포함한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삶의 목적도 의미도 찾기 힘들다. 우린 기본적으로 타인과 이어짐 속에서 의미를 찾고, 그런 이어짐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환경을 원하는 것 같다. 가면으로 덮은 내 모습이 아닌 진짜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걸 수용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에게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그래서 서로가 상처받지 않고 긍정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선 서로의 시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서로 공감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대화하다 보면 결국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에게 비호감만 쌓일 뿐이다. (물론 타인에게 공감하여 존중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다.)


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 나가며, 사람과의 관계를 위하여 꼭 있어야 하는 것이 공감이라고 했는데, 이 공감이란 도구는 모두에게 있을까?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책도 있듯이, 공감하는 것은 노력뿐만 아니라 기반이 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물론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말은 꽤 위험하게 들린다. 우리가 남에게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개개인마다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인지한다면, 우리가 남에게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걸 멈추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지능처럼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지능은 태어날 때부터 형성되는 것이니 단어 자체가 좀 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남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타인을 사귀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시선이 확장되어 가며 공감의 심도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개개인의 공감능력을 올리기 위한 사회적인 측면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타인에게 공감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각자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며, 교육을 통해 공감의 경험을 일깨워 주는 것이 기본 지식의 전달만큼 중요해 보인다.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성격의 발달은 주로 청소년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럴 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환경과 경험을 통해 성격의 긍정적인 발달뿐만 아니라 좀 더 이타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과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이 사회적 지능이나 인지적 지능지수(EQ) 등 을 정의했듯이, 좀 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과정이 좀 어려운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극단적인 예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함과 더불어 타인에게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고, 같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타인의 행동에 이유를 찾을 수 있고, 그들을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에도 도움이 되면서 내 삶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우린 서로에게 공감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그건 또 우리에게 소속감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런 공감하는 개인들이 모여 사회가 약자에게 좀 더 관대한 모습을 가지게 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준다.


경험해보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타인의 시선도 분명 있겠지만,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이해하고, 이해를 전제로 한 공감도 해보려 한다. 공감의 첫 단추는 이해와 수용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을 납득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이해하면, 그 사람의 시선을 체험해 보는 것이 조금은 쉬워진다. 그렇게 체험했다면, 타인을 위한 방안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런 노력이 모여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공감은 때론 나에게 마음 아픈 감정의 소용돌이가 되지만, 누군가를 위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하나의 축복이 아닐까?


#3. 공감할 수 있다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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