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고래해답-3) 협상의 단상(斷想)

by 신미

내가 2014년 초에 회사를 그만뒀으니, 2013년 정도에 있었던 계약 미팅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것 같다. 메모광이 될 정도로 원래 기억력이 형편없으니, 무엇을 정확히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다. 그렇지만 인상적인 상황이나 장면은 비교적 잘 기억하는 편이다. 물론 기억이라는 것이 현재의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모습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이 계약을 마지막으로 따내고 1년 후, 10년 넘게 근무하던 회사를 뒤로하고 영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2013년 당시 나는 조선소의 기본설계 담당자(Naval Architect)였다. 갑자기 중국 해운회사(선사)에서 배를 발주할 계획이 있으니, 전 세계 관심있는 조선소들은 입찰에 참여해주기를 바란다는 의향을 보내왔다. 그들이 원하는 배는 2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5척이었다. 길이만 400m에 달하고, 너비는 60m 정도의 축구장 4개 크기의 배다. 1TEU가 1만 USD 정도니, 당시 글로벌 경기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한 척에 1억 4천만 USD, 총 7억 USD(한화 약 8천억원) 정도하는 대형 계약 건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선사의 입찰참여 요청에 의심을 품었다.
중국의 자국 조선소도 많고 당시 조선 경기가 좋지않아 "우리는 고생만하고 들러리 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또한 중국 조선소가 아직 대형 컨테이너선 설계와 건조에 경험이 많지 않으니 입찰을 통해 정보를 얻을 목적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최종 계약 후보자(Short List)에 들었으니 개찰에 참석하라고 통보가 왔다.

개찰은 중국 상하이의 한 회의장에서 진행되었다.
중국 조선소 2곳, 한국 조선소 2곳, 나머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모두 5~6개 조선소가 후보자 자격으로 참석했던 것 같다. 특이하게 개찰은 행사처럼 진행되었다. 곧이어 회의장에 큰 금고가 나타났고 입구는 봉인되어 있었다. 사회자는 모든 조선소의 입찰서류가 들어간 금고이며, 투명성을 위해서 봉인을 했다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아마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의심을 일축시키기 위한 공연처럼 느껴졌다.
입찰서류가 개봉 되자마자 곧바로 선사는 확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그 사이 선사는 추가적으로 선박의 주요성능 몇 가지에 대한 질문지를 모든 조선소에 나눠주고 이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입찰서류와 답변서를 모두 평가하여 최종 계약자를 선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질문지를 보니 대부분이 배의 기본성능에 해당하는 사항이라 거의 내가 답변안을 작성했다. 미팅 총괄 부서장님과 다른 분야 모든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종합 검토한 후 최종 답변서를 투표함 같은 곳에 넣었다.

얼마 후, 선사로부터 최종 계약자로 선정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왜, 우리가 선정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의 입찰조건(설계 및 성능, 가격, 인도 시기 등)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선정되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앞서 말한 의심이 계속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계약 미팅을 위해 선사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다시 향했다.
선사의 홈그라운드에서 하는 미팅은 항상 어려움이 있다. 다행히 이번 출장은 본국과의 시차가 문제되지는 않겠지만, 미팅 중간에 나오는 선주 코멘트 중 그 자리에서 처리가 힘들 것은 본사와 교신을 통해 정리해야하는 어려운 점은 여전히 있다.
일부 합의가 필요한 사항은 있었지만 다행히 큰 마찰없이 회의는 흘러갔다. 물론 매일매일 미팅 후, 자료 정리하고 본사와 교신하며 다음 날 미팅 준비한다고 3~4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양호하다 생각했다.
미팅 마지막 날 오전, 우리와 선사 양측은 계약서(정확하게는 계약 사양이 담겨있는 미팅 메모)에 웃으며 기분좋게 서명했고, 바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회사에 출근하니, 이번 미팅 총괄로 같이 가신 옆 부서의 부서장님이 나를 급하게 찾으셨다.
나의 부서는 기본설계에서 기본(Naval Architecture) 담당이고, 옆 부서는 나머지 분야(기장, 전장, 의장, 배관)를 담당하고 있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평소 멘토같이 생각하는 분이라 재빨리 찾아뵈었다. 그 분은 대뜸 "양측이 서명한 미팅 메모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이 타이트하기는 했지만, 서명하기 전에 내가 담당하는 부분은 두 번에 걸쳐 꼼꼼하게 검토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검토하고, 이후 선주측 담당자가 검토하면서 볼펜으로 숫자 하나에 줄을 긋고 다른 숫자를 썼다는 것이다.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팅하면서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윤리 의식이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보통 계약서를 수기로 수정하면 양측이 그 부분에 서명을 추가로 하는데, 서명이 없어서 부서장님도 대충 예상은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잘 못한 부분도 있으니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고 30분 후에 보자고 말씀하셨다. 억울했다. 나는 선주측 메일 주소를 알고 있으니, 공식적인 메일을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부서장님은 침착하여 세 단계로 시도해보자고 전략을 말씀하셨다.
첫 번째, 이 부분에 대한 상황을 상세하게 적은 메일을 공식적으로 보내서 선주를 설득한다. 실패할 경우 두 번째, 현실적으로 선주가 수정한 것처럼 배를 건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선주에게 일정 금액을 보상해주고 철회시킨다. 그것도 실패한다면 마지막으로 나와 부서장님이 직접 선사를 방문해서 설득한다.

다행히 첫 번째 단계에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지금도 부서장님의 세 단계 전략 후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김 차장, 걱정하지 마시게. 안되면 나도 책임을 질테니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계약서의 숫자 하나가 생산 현장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음을 실감했다. 좀 더 꼼꼼하게 일하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문서 작업을 보다 신중하게 하게 되었다.
일을 대충하는 동료를 볼 때가 있다. 모든 일을 꼼꼼하고 철저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때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고 계속되다 보면, 그 피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온다.

최근에 정부의 한미 관세 협상 브리핑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직감적으로 "원칙적인 합의는 어느 정도 했는데, 세부조항에 대한 합의에서 난항을 격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쉽지 않을 것이다. 부디 건투를 빈다.

img.webp?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1922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PVuzpRxI2qIBOWpOfLChcBiCWVA%3D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출처: 저자가 ChatGPT를 이용하여 생성한 그림)


작가의 이전글오늘을 잡아라: 카르페 디엠 & 카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