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를 빛나게 해 준 피아노 소품들
저의 작품들을 통해 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의 데뷔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자전거>는 우리나라 뉴에이지 피아노 앨범의 효시 격인 작품이고, 아직도 저를 <푸른 자전거>로 기억해 주시는 분들을 가끔 온라인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푸른 자전거>는 30살까지 저의 삶과 음악의 어떤 한 면모를 총정리해 주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푸른 자전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긴 여정을 두 편의 글로 나누어 풀어봅니다. 먼저 <푸른 자전거>에 수록된 곡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에 대해서는 글 말미에 소개를 덧붙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가장 기뻤던 일이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었지만, 일기 쓰는 것만큼은 싫어했다. 그날그날 뭐했는지 생각해 보고 반성하고 또 그런 걸 구체적인 글로 남기고, 게다가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께 검사까지 받는 일이 귀찮고 민망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 때는 꾀를 내어, 학습백과를 매일 한 단락씩 읽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쓰는 걸로 일기를 채우기도 했다. 그런 일기로 선생님께 칭찬 받은 일도 있다.
대학교 2학년 초겨울, 11월 말 쯤으로 기억한다. 문득 음악으로 일기를 써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음악노트 한 쪽씩, 피아노 실력이 좋지 않은 내가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의 피아노곡으로. 새 음악 노트를 하나 사서 음악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음악일기는 시작한지 사흘 만에 멈췄다. 처음엔 신나게 써나갔는데, 짧은 곡이라도 매일 한 페이지씩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학교 공부 등 일상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일도 있고, 학교에서 써야 하는 곡들도 있었으니까, 매일 일기 삼아 작곡을 한다는 건 사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음악 노트는 폐기되지 않았고, 가끔씩, 때때로, 문득 문득, 조금씩 간단하고 짧은 피아노곡들로 채워졌다. 표지가 다 낡아 떨어질 때까지. 작곡이 나의 일상이 돼가기 시작한 것이다.
슈베르트가 <악흥의 순간>이라는, 짧은 피아노곡들을 묶은 모음곡을 작곡했듯이, 나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악상을 간단한 피아노곡으로 스케치 하듯 음악일기 노트에 적어나갔다. 매일이 아니어도 좋았다. 드문드문 적어나가는 음악일기 노트는 꾸준히 피아노 소품들로 채워졌다.
청소년기에 작곡을 전공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뭔가 깊이 있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대학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갔다.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어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쉽게 내 주변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에 관한 음악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음악, 내가 직접 연주해서 들려줄 수 있는 피아노 음악을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짧은 피아노곡들도 나의 음악일기 노트와 여기저기 오선지와 다른 음악노트 등에 작곡되었다.
작은 아버지의 식구들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당시 미국 이민 갔던 누구나 그렇듯, 아버지를 초청하셨다. 관행과 같은 것이었다. 형제 초청으로 미국 이민 가려면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내 부모님은 이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으셨고, 나와 여동생들도 우리나라를 떠나는 걸 전혀 상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식구 모두 그냥 잊어버리고 살았다. 서울 변두리 주택가에 있었던 우리 집은 그냥 보통의 서민들과 같은 삶을 보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3학년 때인 1986년 초, 작은 아버지의 초청장이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미국 이민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식구들 모두 생각이 복잡해졌다. 부모님은 고심 끝에 미국 이민을 결정하셨다. 나는 만 20세가 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식구들은 이민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집을 정리했고, 나는 자취를 하게 되었다. 식구들은 친척집 등에서 생활하다가 그 해 10월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걱정과 기대가 교차되던 시절이었는데, 혼란스러웠다. 어느 여름 날, 나는 자취방에서 내 가족을 떠올렸다. 당분간 헤어지는 가족을 위해 예쁜 곡들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서운한 마음도 음악으로 달래고 싶었다. 피아노 모음곡 <가족에게>는 며칠 만에 쉽게 완성했다. 모음곡에 포함된 4곡의 제목은 모두 식구들의 한자(漢子) 이름을 활용해서 지었다. 성함에 맑을 철(澈)이 들어 있는 아버지를 위한 첫 곡은 <맑은 물>, 성함에 복 복(福)이 들어 있는 어머니를 위한 두 번째 곡은 <행복>, 이름에 큰 집 하(厦)가 포함된 여동생을 위한 세 번째 곡은 <커다란 집>, 이름에 흴 애(皚)가 포함된 막내 동생을 위한 미자막 곡은 <하얀 나무>였다.
내가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정도의 간단한 피아노곡들이었는데, 식구들 앞에서 한 번인가 연주했던 것 같다. 워낙 정신 없던 시기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동생이 이에 대해 뭔가 언급한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들려주긴 했던 것 같다. 식구들이 미국으로 떠난 뒤, 나는 이 곡들을 작곡과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연주해 들려주곤 했다. 특히 후배들이 반응을 많이 해 주었고, 어떤 후배들은 <하얀 나무>를 외워서 연주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학 교수가 되어 있는 후배들이 지금도 그 음악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식구들이 미국에 도착한 뒤, 부모님께서 나를 초청하셨다. 1986년 당시에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성인 남성들도 초청장이 발효되면 바로 이민 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군 복무 중 초청장이 발효되어 중간에 제대하고 이민 갔다는 분들 이야기도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지금은 이 제도가 없어졌다. 아무튼 나는 가족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남은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작곡과 친구는 마도원이었다. 1980년대 혼란스러운 시절, 사회에 대해 잘 모르던 작곡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지러운 일들이 있었는데, 가까운 동기생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대화하며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런 가운데 다양한 공부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도모했던 마도원과 마음이 잘 맞아 형제 못지않게 가까워졌다. 대학 4학년 때인 1987년, 마도원과 나, 그리고 몇몇 선배들이 함께 “음악에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마침 음악학원을 개원했던 한 작곡과 선배는, 학원 중앙에 작은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곳에서 매달 한 번 씩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작곡과 뿐 아니라 기악과 동문들도 함께 참여했다. 간단한 창작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마도원 등 작곡 전공이면서 피아노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전문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창작음악과 연주활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음악에 모임”은, 당시에는 흔치 않게 음악회마다 컨셉을 잡아 곡을 선정해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나갔다. 연주 전공자 중에 한봉예 선배는 정말 특별한 피아니스트였는데, 연주도 매우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감정적이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품성이 남다른 분이었다. 모임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한봉예 선배는 후에 미국에 가서도, 귀국한 뒤에도 꾸준히 인연이 이어졌다. “음악에 모임”은 작은 단체였지만, 작곡가와 연주가가 마음을 모아 새로운 음악 활동의 길을 개척하고자 했던 특별한 성격을 가진 단체였고, 주변 선후배들도 관심을 많이 보여주었다. 우리들에게 가장 즐겁고 중요한 모임이었다.
식구들이 이민을 간 뒤에도 나의 피아노 소품 작곡은 계속되었고, 대부분 “음악에 모임” 월례음악회에서 발표되었다. 1987년 아주 짧은 피아노곡을 10곡 작곡했는데, 하나로 묶어 <피아노를 위한 열 개의 작은 노래집>이라는 모음곡으로 구성했다. 어린이를 위한 작품으로 구상했지만, 초보자가 연주하기에 조금 어려운 곡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어린이를 위한’이라는 제목은 포기했다.
1988년 봄, 연애를 하고 있던 마도원이 여자 친구와 다툰 어느 날 밤 내게 전화를 했다. 마도원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오선지를 펴고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악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이 깨자마자 따뜻한 봄날 같은 분위기의 악상이 떠올랐고 1~2시간 만에 새로운 피아노곡을 완성했다.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연출가 김정옥 선생님의 연극 제목이었고 같은 제목의 영화도 감독하셨다. 나는 연극은 보지 못하고 영화를 보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이 곡을 쓴 뒤 그 제목이 떠올랐다. 마도원은 여자 친구에게 들려주었고, 이 곡은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전해 들었다.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라는 제목은 이 곡과 마도원의 사연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다른 사람의 작품 제목을 빌려 쓴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나중에 <바람 부는 날>로 제목을 바꾸었다.
“음악에 모임”에 많은 정성을 쏟아 주었던 피아니스트 한봉예 선배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작은 음악회에 최선을 다하는 한봉예 선배의 모습에 많이 감동했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피아노곡을 작곡해 주고 싶었다. 인상주의적인 분위기에 모호하면서 장식이 많은 곡이 완성되었는데, 뛰어난 피아니스트에게 선물하는 곡이라서 다소 피아노 테크닉에 신경을 쓴 작품이었다. 이 곡은 제목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 초연은 1988년 여름에 광화문의 한 소극장에서 열렸던 "음악에 모임"의 첫 번째 공식 연주회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그냥 <봉예 누나에게>라는 제목이었고, 내가 식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 한봉예 선배의 한자 이름을 떠올리면서 <샘이 깊은 물>이라는 제목으로 고쳤다. 미국에서 유학생, 이민한 음악가들이 모여 한국 창작곡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하던 “음악 모임 <열림>”에서 1994년 첫 음반을 제작했는데, 이 곡을 한봉예 선배의 연주로 녹음했다.
식구들이 없는 동안 이종사촌 동생과 친해졌다. 친동생처럼 가까워졌던 사촌동생은 당시 대학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피아노곡을 작곡해 주고 싶었다. 순수하고 착한 사촌동생에게는 <새벽별>이라는 제목이 어울렸다. 사촌 동생은 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피아노 학원을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이 당시에 나는 누군가를 위해 작곡을 하면 손으로 직접 쓴 필사 악보를 선물하고, 나는 그것을 복사해서 보관했다. 사촌동생에게도 손으로 쓴 필사 악보를 선물했다.
1988년 여름, 부모님 초청으로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해 미국에서 처음 맞았던 겨울, 식구들을 다시 만난 감회를 담아 <가족에게> 두 번째 모음곡을 작곡했다. 처음에 4곡을 썼다가 나중에 6곡이 되었다. 각 곡의 제목은 <다시 만나는 날>, <가을>, <겨울밤>, <가족>, <당신을 위한 노래>, <해가 바뀌고> 등이다. 낯선 땅이지만 가족이 있는 따뜻한 우리 집에서, 어느 겨울밤, 식구들을 모아놓고 이 모음곡을 연주했을 때,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내가 만든 음악에는 그래도 내 감정이 실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곡을 쓰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피아노 모음곡 <가족에게 제2번>은 후에 현악합주, 바이올린 독주곡 등으로 개작되어 여러 차례 연주되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지 5년 만인 1993년, 여름에 한 달 반가량 귀국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잠시 귀국하여 여행을 한 것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퀘퀘하지만 부드러운 서울의 공기가 반갑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돌아온 서울은 고향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마도원 등 친구 집에서 머물면서 2달 정도 서울에 있었다. 집 떠나서 잘 못 지내는 편인데, 내 고향인 서울에서는 우리 집이 아니어도 좋았다. 이 기간 동안 <어떤 여름>이라는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어느 교포신문사에서 기자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미국 내 한인 음악인들이 모여서 “음악모임 <열림>”을 결성하고, 매년 한국 창작곡을 중심으로 음악회를 치렀다. 그러다가 1996년 봄, 한국에서 음악회를 계획하게 되어, 회사에 2개월 정도 휴직 신청을 했다. 나를 신임했던 회사는 휴직 신청을 받아주었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음악모임 <열림>” 활동을 함께 하다가 먼저 귀국한 피아니스트 김수련 선배와 함께 <신동일 작품에 의한 김수련 피아노 독주회>라는 제목의 음악회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가졌다.
서울에서 음악회를 준비하는 동안, 역시 미국 유학하고 먼저 귀국한 친구 마도원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내 피아노 소품들을 모아서 음반사에 음반 제작을 제안해 보자고 했다. 기존에 녹음되어 있는 음원들을 활용하고 기획안과 함께 자료를 준비해서, 당시 새로 설립된 “난장뮤직”에 제안을 했다. “난장뮤직”은 마도원이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다시 입학한 버클리음악원에서 재즈 공부를 하면서 인연이 된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로 참여하고 있던 기획사였는데, 어쿠스틱 음악을 녹음하기 좋은 녹음실을 갖추고 있었다. "김덕수 사물놀이"의 새로운 이름, "한울림"도 이 회사를 함께 운영했었다.
우리가 제안한 피아노 앨범은 “난장뮤직”의 첫 번째 앨범으로 채택이 되었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몇 차례 미루다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마지막으로 신문사에 연락을 하니 편집장이 무척 난감해서 많이 미안했지만, 한국에서의 새로운 음반 제작 기회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피아노 솔로 앨범이었다.
마도원: 작곡가, 프로듀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나와 가장 가까운 대학 친구이다. New England Conservatory 대학원 졸업 후 Berklee 음대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피아노 솔로 앨범 <푸른 자전거>, 이건용의 아트팝 <혼자사랑> 등의 프로듀서. 현 동덕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크로스 오버 앙상블 “새바” 음악감독.
한봉예: 피아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졸업.1987년 음악대학 동문들이 모여 만들었던 “음악에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된 후, 오랫동안 내 작품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연주해 주고 가장 잘 해석해 준 연주자이다. 버팔로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Cameron Baird Solo Comnpetition 우승. 미국에서 “음악모임 <열림>” 활동을 함께 했고, 귀국 후 <즐거운 세상>, <노란우산>, 피아노를 위한 3부작 <멀리 멀리서> 등을 녹음했으며, <Extreme Piano>, <노란우산> 음악회 등 내가 제작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김수련: 피아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The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작곡과 교수, 학생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창작곡을 연주했던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만나 “음악모임 <열림>”에서 함께 활동했다. 내 작품 <허튼가락 제1번>을 초연했고, <신동일 작품에 의한 김수련 피아노 독주회>(1996), <Extreme Piano> 등 여러 공연을 함께 했다.
이렇게 작곡된 피아노 소품들이 어떻게 <푸른 자전거>로 탄생하게 되었는지,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f314b41122b2406/13
"푸른 자전거" 수록곡 중 방송으로 소개된 실내악 버전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오리지널 피아노 곡들은 다음 편에 링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