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 솔로 앨범 제작기
저의 작품들을 통해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푸른 자전거>는 제가 이 땅에서 작곡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입니다. 지난 1편에서 <푸른 자전거>에 수록된 곡들이 어떻게 작곡되었는지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어서, <푸른 자전거>의 제작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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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음반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을 모은 것이어서, 가사를 대신할 이야기를 덧붙여 전체적으로 줄거리가 있는 컨셉 앨범(concept album)으로 만들기로 했다. 수록할 작품을 선곡한 뒤, 샘플로 마도원이 줄거리를 만들었으나 난장뮤직에서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홍보 담당자가 "페이퍼(PAPER)"라는 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작업에 어울릴 것 같다고 권하여 줄거리를 포함, 사진과 디자인까지 맡기기로 했다.
요즘 소개되는 피아노 솔로 앨범은 보통 작곡가들이 직접 연주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내 피아노 실력으로는 내 작품들을 멋지게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주는 서울대 동기인 피아니스트 한정희가 담당하기로 했다. 작곡가인 나와 프로듀서 마도원, 피아니스트 한정희는 이 해 여름 내내 난장뮤직 녹음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들 녹음 경험이 없었던 터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수록 곡목으로는 “음악모임 <열림>”에서 제작했던 <열림>이라는 음반에 실린 작품들과, 그 외에도 주위 사람들이 좋아했던 다른 몇 곡, 기존의 작품을 편곡한 곡들, 그리고 새로이 작곡된 2곡을 포함하여 총10곡이 선정되었고, 마도원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순서를 정해 배열됐다. 처음 선정된 곡들은 모음곡 <가족에게 제1번> 중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하얀 나무>와 <행복>, 한봉예 선배를 위해 작곡했던 <샘이 깊은 물>, 1993년 서울에서의 <어떤 여름>, 새로 작곡한 뉴에이지 풍의 곡, 마도원의 연애를 위해 작곡했던 <바람 부는 날>, 모음곡 <가족에게 제2번> 중 <다시 만나는 날>의 편곡, 피아노를 위한 작은 노래집 중 제10번의 편곡, 새로 작곡한 또 다른 곡, 사촌동생 성인을 위해 작곡했던 <새벽별> 등이었다.
당시 "페이퍼"의 편집장 황경신 씨가 몇 가지 줄거리를 써서 보냈는데, 여러 날을 논의한 끝에 “꿈꾸는 푸른 자전거”라는 이야기가 음악의 색깔,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그것으로 결정했다. 각 곡의 제목들도 줄거리에 맞춰 모두 바꿨는데 인쇄 직전까지 계속 수정해 나갔고, 앨범 타이틀은 <푸른 자전거>로 확정되었다. 마지막 통과된 최종안은 다음과 같다.
난장뮤직 측에서 모든 곡들이 가볍고 대중적이어서 음악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래서 새롭게 <신선도>라는 곡을 썼으나, 프로듀서인 마도원이 앨범 분위기와 너무 다르고 반대해서 부결되었고, 그 대신 <나의 오래된 꿈>를 변주한 <내 오래된 꿈을 위한 변주>를 마지막에 추가하기로 했다.
난장뮤직의 계획은 11월 중에 음반을 발매하고 12월에 음악회를 몇 차례 가질 계획이었으나, 11월 하순까지 배급사와 계약이 완료되지 못했고, 나는 여동생의 약혼식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우리 형제 중 처음 약혼하는 여동생, 한국에서 대학을 중도 포기하고 미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준 동생, 한국을 떠날 때 내가 <가족에게> 중 <커다란 집>을 작곡해 준 여동생은 키가 큰 약혼자를 맞이했다. 동생이 행복하길 기도했다.
12월 중순에 미국에서 돌아오니 음악회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우면산 젊은 난장> 시리즈 중 한 프로그램으로 1월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하게 되었고, 접촉하던 배급사와의 계약은 결렬된 상태였다. 음악회는 피아니스트 한정희의 연주와 더불어 영상과 배우의 연기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공연 형태로 계획하고 조승암 연출가를 섭외했다. 그리고 애니메이터 이성강 감독의 허락을 얻어 그의 단편 애니메이션 작품을 편집해서 공연 영상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예술의전당의 1997년 신년 행사 기획을 난장뮤직이 맡아 <우면산 겨울 난장> 페스티벌을 꾸렸다. 여러 가지 장르의 다양한 음악회와 간단한 영화제를 겸한 깔끔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의 페스티벌이었다. 내 공연, 피아니스트 한정희의 <꿈꾸는 푸른 자전거>는 1월3일 열렸다. 음악회 외에 본격적인 무대 공연 경험이 부족해서 미리 체크하지 못한 부분들이 공연 당일 확인되는 등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무사히 막을 올린 <꿈꾸는 푸른 자전거>는 상당히 독창적인 공연이었다. 피아노가 무대 좌측에 배치되었고 연주 사이 사이, 어둠 속에 희미한 조명이 들어오면 조금 높은 무대 위, 샤막(무대에 사용하는 투명 스크린. 영어로는 스크림(scrim)이라고 한다. 무대에서 조명을 비추면 샤막을 통해 배우나 무대 장치를 볼 수 있고, 막 뒤의 빛을 없애고 영상을 비추면 스크린처럼 사용할 수 있다) 뒤에서 배우가 연기를 했다. <언덕 위에서>와 <첫사랑의 푸른 아픔>에서는 샤막 위로 애니메이션이 흐르며 파스텔 톤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상과 함께 연주한 순서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더욱 좋았다. 이성강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잔잔하면서 분위기 있고, 음악과 잘 어울렸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받아들여졌고,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후에 나는 이런 복합장르 형태의 공연을 꾸준히 개발하게 된다.
공연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잘 끝났으나, 새로 섭외한 배급사와도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노래가 아닌, 피아노 솔로 연주곡 음반은 우리나라에서 낯선 것이었으니 배급사들도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난장뮤직이 자체적으로 홍보용 비매품 음반 500장을 찍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푸른 자전거> 음반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 달 여 뒤인 2월, 대학로에서 <꿈꾸는 푸른 자전거>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예술의전당 공연 반응이 좋아서 기대감이 있었고, 극장과 공동기획으로 준비되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이 일반 관객을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흥행이 좋지 않아 극장 측에서 실망한 듯 보였고, 제작사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공연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지 제작사와 극장은 서로 이해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두 차례 공연을 마쳤다.
드디어 배급사가 결정되었다. 당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던 웅진뮤직에서 <푸른 자전거> 음반을 배급하기로 결정되었다. 배급사에서 홍콩의 한 음반 전시회에 <푸른 자전거>를 들고 나갔다가 좋은 평을 얻었다고 전해 왔다. 피아노 솔로 앨범 <푸른 자전거>는 3월 초에 출시되었다. 1만장을 찍어 무조건 도매상에 풀어 놓았다고 했다. <푸른 자전거>에 대해서는 대체로 '순수', '동심' ,'수채화' 등의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공연과 음반은 '뉴에이지 클래식'이라는 장르로 홍보가 되어 나갔고, 큰 파장은 없었어도 조금씩 관심을 모아 갔다.
노래가 아니었으니 방송되기는 쉽지 않았고, 공연을 지속하기에도 형편이 안 되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출신의 세 친구들, 작곡가와 피아니스트, 프로듀서가 힘을 모아 만든 대중적인 연주곡 앨범이라는 점도 홍보 포인트 중 하나였지만 반응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난장뮤직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매된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만나는 모든 방송국 프로듀서(PD)들에게 <푸른 자전거> 음반을 선물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른 자전거>의 몇몇 곡들이 방송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반가운 일이 생겼다. 방송에서 아무 음악이나 마음대로 가져다 쓰던 우리나라의 방송 환경에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정립되어 가는 시기였고, 배경음악으로 쓰일만한 편안한 스타일의 피아노 음악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표된 것이 신선하게 다가갔을 듯하다. 그렇게 <푸른 자전거>는 온갖 방송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사연을 읽어줄 때 배경음악으로, 일기예보 배경음악으로, 각종 방송 프로그램 타이틀 음악으로,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다큐멘터리나 교양 프로그램 배경음악 등등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첫 번째 트랙인 <나의 오래된 꿈 하나>가 가장 자주 사용되었고, <행복>, <첫 사랑의 푸른 아픔> 등도 TV와 라디오에서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클래식 전문 라디오 방송이나 몇몇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음악 자체가 방송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렇게 <푸른 자전거>는 사람들 귀에 익숙해졌으나,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 작곡가나 연주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외국의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생각하곤 했고, 특별히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 작품과 음악가들에 대해 알아보는 정도였다. 당연히 음반이 팔리는 속도는 느렸고, 안타깝게도 1년 만에 절판되었다.
그래도 나의 음악적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푸른 자전거>와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여러 가지 악기 편성으로 만들면서 난장뮤직을 드나들고 있었다. 몇 년 후, 난장뮤직이 내게 원하는 작업들을 꾸준히, 자유롭게 같이 실험해 봐도 좋겠다며, 편하게 여러 가지 녹음을 해 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 입장에서도 좋은 제안이었고, 작품 활동을 더 폭넓게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욕심이 났지만, 함께 할 연주자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서 그리 많은 작업을 해 보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제자들과 함께 “미르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 대중적인 클래식 창작음악을 연주해 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난장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미르 현악4중주단”의 미니 앨범 시리즈 <저녁 풍경>이 언론에 큰 주목을 받아 보도가 많이 되었다. 하루에 2건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 음반들은 화제가 되었던 것에 비해, 미니 앨범의 판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생각지 못하게 이를 계기로 <푸른 자전거> 재발매 논의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자켓 디자인으로 2000년 재발매 되었다. 그동안 대단히 많은 방송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기대도 있었고, 그래서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에 광고를 붙이기도 하는 등 공격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럼에도 음반 판매는 희망한 만큼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 주일에 몇 십 장에서 많으면 100~200장 정도 판매되는 것으로 들었는데, 나로서는 적지 않은 팬매량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음반사 입장에서 수익성이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몇 년 후 난장뮤직은 결국 문을 닫았고 다른 음반사로 합병되어, <푸른 자전거>는 새 음반사에서 관리를 해 주었다. 그러나 판매가 계속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몇 년 못 버티고 음반 매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음반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푸른 자전거>는 꽤 오랫동안 여러 방송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꾸준히 사용되며 사랑받았다.
<푸른 자전거>는 작곡가와 연주가가 분리되어 있어 활동의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최초의 피아노 솔로 앨범으로, 이후의 다양한 뉴에이지 피이니스트들의 본격 연주 음악 활동을 위한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고, 이후에도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푸른 자전거>의 작곡가로 나를 기억해 주고 있다.
◆ 예술가 소개
한정희: 피아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졸업. 대학 친구지만, 피아노 솔로음반 <푸른 자전거>를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푸른 자전거> 외에도 내 작품 중 영화음악 <꽃을 든 남자>, <노란우산> 등을 녹음했다. 현재 크로스 오버 앙상블 “새바”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성강: 2002년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마리 이야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얀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링프리를 수상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얼랐던 이성강 감독은, 사실 1990년대 독립영화계에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였다. <푸른 자전거> 공연 중에 이성강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빌려서 한정희의 연주와 함께 상영하여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는데, <푸른 자전거> 음반 발매 후에 이성강 감독의 <우산>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의 모든 배경음악을 <푸른 자전거> 수록곡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푸른 자전거>가 애니메이션에 매우 적합한 음악"이라고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마리 이야기> 외에 <천년여우 여우비>(2007), <카이: 호수의 전설>(2016), 실사 영화 <살결>(2007) 등이 있다.
에필로그 : <푸른 자전거>와 관련한 추억 하나
신혼 초, 겨울에 몇일 동안 아내와 동해안을 여행했었다. 그 중 어느 날 오후, 강릉 오죽헌을 방문했는데, 추운 날씨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아 함박눈이 무거운 느낌으로 떨어지며 땅에 수북히 쌓여갔다. 오죽헌 입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날씨에 누군가 오죽헌에 구경올 리는 만무했겠지만. 눈 내리는 새하얀 풍경의 오죽헌을 바라보며 우리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오죽헌 바로 앞에 기념품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고, 스피커에서 <나의 오래된 꿈 하나>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푸른 자전거> 오리지널 피아노 음악, 전곡을 유투브에서 링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