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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Jan 27. 2021

"꽃을 든 남자" 영화음악 제작기

1997년 작, 영화 <꽃을 든 남자>의 음악 작업은 저의 첫 앨범 <푸른 자전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푸른 자전거> 때문에 맡게 된 작업이었고, <푸른 자전거>의 음악을 영화 속에 많이 활용했습니다. 

https://brunch.co.kr/@f314b41122b2406/13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생겨서 영화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학 시절 영화음악과 컴퓨터 음악 관련 수업도 듣고, 당시 한인 2세 중에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들의 단편영화음악 작업도 해보았는데, 마침내 장편 극영화 음악을 맡게 되어 꿈을 이루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여러가지 경험을 했지만,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 스스로에게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첫 영화음악 실패담입니다. 



나의 첫 음반, <푸른 자전거>가 1997년 3월 초에 출시되기 전, 2월 즈음 영화음악 제의가 들어왔다. MBC에서 제작하고 황인뢰 감독이 처음 연출하는 <꽃을 든 남자>였다. 황인뢰 감독이 방송국에서 우연히 <푸른 자전거> 음반을 듣고 난장뮤직을 통해 나를 찾은 것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가벼운 영화 분위기를 보완하기 위해 내 음악의 클래식한 분위기를 빌려 격조를 높였으면 한다는 게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전해주었다. 영화음악은 난장뮤직에서 직접 제작하게 되었다. 


이 영화음악을 맡을 때는 이미 촬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음악이 삽입될 장면들에 대한 의견 교환은 여러 차례 계속 되었다. 나는 음악을 아낄 생각이었으나 황인뢰 감독님은 관객들을 위해 친절하게 음악으로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싶어 하여, 영화 장면 약 30곳을 위해 새로 작곡해야 했다. 제작진은 내가 영화음악에 전념하기를 원했고, 학교 강의 등으로 바쁘다는 점을 염려했으나, 학생들을 섭외하여 오케스트라 음악을 녹음할 수 있다고 얘기하자 수긍하고 진행됐다.  


영화 촬영이 끝난 3월말부터는 실제 음악 작업에 서서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엔딩 크레딧에 들어갈 노래를 먼저 구상했다. 감독님은 노래 1곡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제작사 측에서 4곡을 요구했고, 난장 뮤직에서 2곡으로 절충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나는 <푸른 자전거>에서 함께 작업한 월간 "페이퍼(PAPER)"의 황경신 편집장에게 가사를 부탁했고, 여러 개의 가사들을 받을 수 있었다. 황경신 편집장은 나와 동갑내기여서 이야기가 잘 통했고, <푸른 자전거> 작업하면서 편한 사이가 되었다. 받은 가사 중에서 <다시 나에게>와 <하늘 가까이>에 멜로디를 붙여 난장뮤직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작사자인 황경신 편집장은 <하늘 가까이>를 좋아했으나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쓸 수 없었고, <다시 나에게>는 가사 내용에 불만이 있었고, 빠르고 경쾌한 노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시 나에게> 가사를 수정하여 빠른 노래를 만들어 갔으나 이번에는 난장뮤직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영화 후반 작업을 호주에서 하기로 해서 4월 초에 일단 제작팀이 호주로 떠나야 했다. 난장뮤직에서도 음반 판매를 위해 노래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노래를 많이 넣겠다는 입장을 정했다. 우선 <다시 나에게>와 난장 스튜디오 이훈석 대표가 작곡한 <당신 생각에>를 제작하기로 했다. 가수 섭외는 특히 고심을 많이 했는데, 당시 <지하철 1호선> 주역으로 활약했던 뮤지컬 배우 이미옥 씨에게 <다시 나에게>를, 가수 이상은 씨에게 <당신 생각에>를 맡기게 되었다. <당신 생각에>는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씨가 편곡을 주도하여 녹음을 마쳤다. <다시 나에게>는 <푸른 자전거>의 피아니스트 한정희를 영화음악에 합류시켜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클래식 분위기의 피아노 반주를 중심으로 만들었는데, 드럼 리듬이 잘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드럼 연주자를 교체하고 여럿이 아이디어를 내어 반주 녹음을 끝냈다. 완성된 음악 테이프를 만들어 호주로 보냈으나 감독님은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4월 하순 영화 1차 편집을 마친 비디오 테이프를 받았다. 난장뮤직 식구들과 만나 고민하던 끝에, 나는 노래 작업에서 후방으로 물러나 영화음악 제작에 주력하기로 했고, 난장뮤직에서는 “유앤미블루”의 방준석 씨를 섭외하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황인뢰 감독님은 우선 나에게 각 장면의 테마 음악들을 확인한 뒤 호주에 가고 싶어 했다. 나는 간단하게 데모를 만들어 갔으나 감독님은 전체의 테마들을 모두 듣기를 원하던 것이어서 결국 내가 사흘 정도 호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강의가 없는 주말을 빌려 호주로 향한 나는 4박5일 간 시드니에 머물게 되었다. 1차 편집을 마친 후 처음으로 극장 시사가 있었고 진행 상황을 함께 체크한 뒤, 나는 숙소에 틀어박혀, 비행기에 싣고 갔던 무거운 신서사이저를 이용해서 작곡을 했다. 그리고 저녁마다 감독님과 함께 음악 체크를 했다. 떠나기 전 날까지 많은 내용들이 바뀌었다. <푸른 자전거>에 수록된 곡을 활용해 재편곡하여 여러 장면에 활용하기로 했고, 새로 작곡한 곡들 중에서도 쓸 것과 아닌 것을 모두 가렸다. 그러는 사이 영화의 후반 작업 일정은 계속 늦어졌다. 


귀국한 뒤 영화음악 녹음 계획을 세웠는데, 오케스트라 연주할 학생들과 시간이 맞지 않고 영화 제작 일정도 늦어져, 한정희의 피아노 솔로로 연주되는 곡들을 먼저 녹음하고 오케스트라 녹음은 미루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관악 파트가 모두 내가 가르치는 반 학생들로 이루어졌으나, 현악파트는 인원이 부족하여 가깝게 지내던 학생들에게 추가 섭외를 부탁했다. 현악 12명, 관악 10명, 타악 1명 등 총 23명이었다. 

호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작곡 마무리와 편곡에 들어갔다. 수업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쉴 새 없이 작업했다. 각 곡마다 계획을 세워 구성하고 전체적인 지도를 만들고 나면, 생각할 여지도 없이 연필을 놀렸다. 대학원 제자 두 명이 파트보 제작을 맡아 내 방을 드나들며 악보를 챙겼고 녹음 전날에는 계속 밤을 샜다. 

녹음 첫 날, 현악합주와 피아노만 녹음했다. 문제가 많았다. 녹음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쉽게 짜증을 내었고 통제가 안 되었다. 템포도, 앙상블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대충 음악적 그림을 만들어 놓고 녹음을 마쳤다. 소리에도 문제가 많아서 결국 피아노와 관현악을 따로 녹음하기로 했다. 

녹음 둘째 날은 관현악 녹음. 목관 파트가 먼저 와서 더빙을 하고 나서 전체 녹음에 들어갔다. 연습 때는 문제가 별로 없는데 녹음만 시작되면 템포가 끝없이 휘청거렸다. 학생들과 나 사이에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이날도 겨우 겨우 녹음을 마쳤다. 내가 가르치는 반이 아닌, 추가로 섭외한 현악전공 학생들이 특히 불평을 심하게 했다.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조그만 일에도 갈등이 생기는 것이리라. 피곤함과 더불어 내게도 짜증이 일어났다. 현악 주자들은 먼저 가고 관악 전공 학생들이 남아 추가 녹음을 한 뒤 저녁 식사를 했다. 

녹음 세째 날, 피아니스트 한정희가 더빙했다. 피아노가 들어가니 음악이 좀 더 활기차졌다. 다음 1주일도 쉴 새 없이 편곡을 하고 다시 녹음을 맞이했다. 파트보는 이 날 제 시간까지 완성되지 못해 녹음 도중 배달되었다. 관현악 녹음은 많이 편해졌다. 나는 템포에 대한 감각을 다시 잡았고 학생들도 좀 더 익숙해졌다. 전체 녹음을 조금 일찍 마치고 현악합주 보충 녹음과 목관 앙상블 곡들을 따로 녹음했다. 관악 전공 학생들은 정말 성의껏 녹음에 임해 주었다. 이날도 현악 전공들은 먼저 보내고 관악부만 더 녹음을 한 뒤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현악파트 학생들에게 갖고 있던 불만을 관악 파트 학생들애개 애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신한 셈이었다. 타악기 연주자는 아예 녹음이 다 끝난 후 따로 더빙을 했는데, 고맙게도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그 다음 주에 피아노 추가 녹음을 하고 믹싱을 했다. 엔지니어는 한 가지 세팅으로 전체 오케스트라 곡들을 하루에 모두 믹싱할 수 있을 것으로 쉽게 생각했으나, 성격이 다른 곡마다 전부 새롭게 믹싱을 해야만 했기에 시간은 한없이 흐르고, 결국 밤을 꼬박 새웠지만 끝내지 못했다. 호주 출장이 예약되어 있었기에, 추가 믹싱을 했고, <다시 나에게> 노래를 새로 녹음하느라 하루를 더 쓴 뒤 나는 호주로 향했다. 

노래는 결국 4곡이 만들어졌다. <다시 나에게>와 이훈석 대표의 <당신 생각에>, 방준석의 <꽃을 든 남자>, 그리고 난장 식구들과 영화 팀이 홍대 앞 카페에서 발견해서 섭외했던 인디 밴드가 만든 <헤이 헤이 헤이>가 그것이었다. 네 곡을 영화와 음반에 다 삽입하기로 한 것이다. 황인뢰 감독님의 반응이 궁금했다. 


호주에서 2주일 간 작업했으나 컴퓨터그래픽, 편집 등 후반 작업이 계속 늦어져서 도저히 마지막 믹싱까지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의 학기말시험이 있었고, 여동생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미국에도 가야 했다. 녹음된 영화음악을 들은 황인뢰 감독님은 컴퓨터를 쓰지 않고 전체 음악을 어쿠스틱 악기만으로 해낸 것이 생전 처음이라며 기뻐했고, 학생들이 연주를 잘한다면서 "음반은 잘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겠다"고 만족해 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음악 편집만 끝내고 믹싱 참여를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귀국해서 기말시험을 치르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동생 결혼식을 치른 뒤 2주일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여동생은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동생을 축복해 주었다. 미국에서 동생의 결혼식으로 가족들과도 다시 만나 푸근한 시간을 보냈지만, 돌아와서는 숨 가쁘게 진행된 일정 속에 영화음악은 믹싱을 끝까지 챙기지 못해 조바심이 일었다.  

귀국해서 보니 <꽃을 든 남자>의 음반은 이미 출시되어 있었다. <푸른 자전거>의 표지에 이어 이번에도 표지가 예쁘게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꽃을 든 남자> OST 앨범 발표회가 홍대 근처 한 클럽에서 파티 형식으로 열렸다. 난장뮤직 사람들은 좋은 감각을 갖고 있었다. 


7월 말에 영화 시사회가 있었다. 음악은 계획했던 것의 반 이상이 삭제되었고 그나마 남은 음악들도 믹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믹싱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속상했다. 다른 영화의 음악감독 인터뷰에서도 믹싱에 관한 비슷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영화음악은 끝까지 책임을 지고 확인을 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는 그해 8월15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먼저 개봉한 외화가 흥행을 이어가고 있어서 연장 상영하게 되었고, <꽃을 든 남자>는 가을로 개봉이 연기되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시내 1개의 개봉관에서 개봉하고 2차, 3차 상영관으로 옮겨가는 방식이었다.  

제작사는 영화 자체보다 음반과 부대사업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고, 난장은 영화수록곡 중 <헤이 헤이 헤이>를 만든 인디 밴드와 계약하고 <헤이 헤이 헤이> 홍보전에 들어갔다. 인디 밴드는 이름을 “자우림”으로 고쳤고, <꽃을 든 남자> OST는 “자우림”의 출발점이 됐다. 그리고 “자우림”의 첫 앨범이 난장뮤직에 의해 제작되었고, “지우림” 난장뮤직의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신인 밴드가 데뷔하여 성장하는 과정을 곁에서 어렴풋이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제작사는 "꽃을 든 남자"라는 이름의 화장품 시리즈를 런칭하고 OST가 성공적인 반응을 얻어서 다양한 부대사업을 벌인 것에 만족했다고 들었고, 난장뮤직은 이 영화를 통해 발굴한 "자우림"으로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영화에 들어간 음악들도 아쉬웠지만, 이 영화 이후의 후속 작업을 만들어내지도 못했으니 실패한 셈이었다. OST에 대해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도 다른 영화 음악 작업으로 이어지지 못했기에 더 아쉬움이 컸다.  

이렇게 나의 첫 장편영화 음악 작업이 성공적이지 못한 채 마무리되어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나의 작곡 활동을 쉽없이 계속 전개되었다.  


https://youtu.be/kJkZAVlOvqs

"다시 나에게"(영화 "꽃을 든 남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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