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의 계절이 되기까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숨어 썼던 소설을 덮었다. 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마음이 묵직했다. 좋은 책을 읽고 난 후의 그 특유한 무게감, 잘 익은 과일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 어딘가에 걸리는 감각.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랬을까.
기쁠 때도, 힘들 때도, 결국 나는 책을 찾는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음악을 틀고, 누군가는 사람을 부른다. 나의 위로는 대부분 두 가지로 좁혀진다. 여행, 그리고 책.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둘도 결국 하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그 지역 서점을 찾아 들어가는 버릇이 있으니까. 통영의 골목 서점에서 집어든 책이든, 제주 구도심 헌책방에서 꺼낸 책이든, 그 책은 그 여행의 냄새를 함께 품고 돌아온다.
기쁠 때 그 기쁨에 맞는 책을 찾고, 힘들 때 그 무게를 견뎌줄 책을 찾는다. 슬플 때는 더 슬픈 책을 읽어서 제대로 울고 싶고, 지칠 때는 조용하고 담담한 문장들 사이에 기대고 싶다. 이것이 처방인지 중독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래된 습관이다.
언제부터인가 책 앞 면지에 날짜를 적는다.
연도, 그리고 그때의 느낌 한 줄. 아주 긴 문장은 아니다. “2019년 봄. 회사 그만두기로 결심한 직후.” 혹은 “2022년 여름 끝. 아버지 퇴원하고 나서.” 때로는 그냥 날씨 하나. “비 오던 날.”
이 메모들이 나중에 감회가 새롭다는 말은 너무 작은 표현이다. 몇 년이 지나 우연히 그 책을 다시 꺼내면, 글씨체부터가 그때의 나다. 조금 흐트러진 필압, 서두른 것 같은 받침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해의 공기가 돌아온다. 책이 타임캡슐이 되는 것이다. 내가 직접 묻어둔.
첫사랑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고들 한다.
책도 그렇다. 어떤 책은 특정한 감정의 지문이 된다. 『자기 앞의 생』은 아마 오늘 이 묵직함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오십의 어느 봄날, 오래 살아남은 사람과 일찍 늙어버린 아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알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웠던 그 저녁.
모모가 로자 아줌마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결국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어둠 속에 머물렀다가 나온다. 책도 그 어둠 중 하나다. 혼자 들어가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누군가 묻는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 뭐가 남느냐고.
남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그 책을 읽던 내가 남는다. 기억은 흐릿해져도, 그때의 나는 면지 한편에 글씨로 살아있다. 연도와 느낌, 딱 두 가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책을 덮었다. 그리고 면지를 폈다. 펜을 들었다.
2025년 봄. 마음이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