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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만에 끝난 이혼

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7

by 임선민

그와의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조정기일이 잡혔고, 서울에서 현재의 주소지 관할인 춘천지방법원까지 먼 길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혼이 흔한 요즘이라 꽤나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그날 춘천의 법원에서 이혼하는 부부는 우리 둘 뿐이었다. 먼저 도착해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현재도 도착한 듯 인기척이 들렸다.


그와 눈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힐끗 보고는 눈을 돌렸는데 웃기게도 그도 나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끝까지 어른스럽지 못하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항상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동안 어른인 척을 해 왔던 걸까. 그래도 한때는 사랑했고 이제 의미 따위 없지만 서로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사이인데, 몇 달만의 대면에 인사도 사과도 없는 예의 없는 사람. 얼굴 마주하고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할 자신도 없는 비겁한 사람. 이게 그의 진짜 본모습이었다.


이윽고 조정실엔 중년의 여성 판사가 들어왔고 몇 가지 되지 않는 우리의 이혼 합의서에 적힌 내용을 질문했다. 조정조항에 ‘피신청인의 유책사유(부정행위)로 이혼한다.’는 조항이 명시됨을 알려주고, 현재에게도 동의하냐고 물었다. 그는 별말 없이 짧게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연금분할 및 재산분할에 대하여 일체의 추가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항 등을 묻고 우리는 미리 합의한 대로 모두 동의한다고 답했다. 판사의 마지막 멘트는 이러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결혼이 종결되었고, 두 분의 건승을 빕니다.“ 조정에 걸린 시간은 딱 9분이었다.


내 변호사는 저런 남자와 이렇게 빠르게 모든 걸 해결한 건 하늘이 나를 도우신 거라 했다. 나도 수고하셨다고 짧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 길로 바로 법원을 나왔다. 그는 뒤늦게 변호사에게 와서는 “선민이 갔어요?” 라며 물었다고 했다. 그 얘길 듣자 이젠 현재가 소름 끼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는데, 모두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둘이 남아 할 말이 과연 뭐였을까? 미안하다는 말이었다면 그날 마주치자마자 했을 테고. 돈 좀 다시 돌려달라고 하고 싶었으려나.


그는 그렇게 나와 이혼을 마치고 그날 바로 상간녀와 여행을 갔다. 정식으로 유부남 신분을 벗어나 둘이 사랑할 수 있으니 마음이 가벼웠으리라. 아, 이젠 그녀를 상간녀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조정 후 며칠 뒤 조정조서가 송달되었는데, 이혼 신고를 하러 구청에 갔더니 이미 현재가 신고를 마쳤단다. 그는 이혼 신고를 하자마자 그 여자와 혼인신고까지 끝냈다. 그게 나와 그토록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나와의 혼인신고로 받은 관사에서 그 여자와 계속 살려면 다시 결혼 서류가 필요할 테니까. 알면 알수록 놀랍기만 한 둘이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변호사가 한 말처럼 그와의 관계가 빠르게 끝나서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합치지도 않았고, 같이 산 적도 없이 허무하게 끝난 결혼이 어쩌면 다행스럽다. 그는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든 바람을 피웠을 것이고, 난 내 삶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저렇게 인생을 생각 없이 사는 남자와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게 나에겐 잘 된 일이다. 그리고 그와 잘 어울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여자라는 걸 안다. 그의 본모습을 알았다면 나는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한다지 않는가.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이제서야 자기와 완벽하게 잘 맞는 여자를 만난 거라 생각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유부남에게 그런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여자, 드물지 않을까? 그 둘의 양심과 도덕관, 수준도 비슷하니 이제 서로 영원히 놓치지 않길 바란다.


억울하게도 결혼 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너무나 많다. 여태 그가 나에게 숨겼던 것일 수도 있겠다. 처음 그의 본가에 초대받았을 때 자식 자랑을 늘어놓던 그의 어머니, 아들 잘 키웠다고 상견례 자리에서도 결혼식날도 말이 많던 그의 아버지. 잘 사는 척 겉치레했지만, 결혼할 때 장남에게 한 푼 보태줄 돈이 없었던 이유를 이혼하며 뒤늦게야 알아 버렸다. 알고 보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집안이었단 것을. 그 잘났다던 아들이 이렇게 대책 없이 사는 놈이란 걸 그들은 모르실 테지. 그리고 나이를 서른 일곱이나 먹어놓고 모은 돈이 왜 없는지 그 이유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줄곧 이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란 걸. 그런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나를 가족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한다. 후회스러운 건 그거 하나다. 모든 걸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


짧은 결혼만큼 나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가 나에게 “내가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라고 했던 말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듯하다.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을 나는 사랑 하나만 보고 너무나 쉽게 결정해 버렸던 것 같다. 난 그가 가진 부족한 조건을 뒤로하고 그의 사람 됨됨이와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고, 그 사랑조차 영원할 수 없다는 걸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었다. 게다가 사람도 아주 완벽하게 잘못 본 것이었고. 어쩌면 나와 달리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이기적이었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감정에 취했으며, 책임질 마음도, 감정을 통제할 의지도 없었고, 그저 지금 당장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었으니까.


이혼이 마무리되자 나 자신조차 놀라우리만큼 감정 정리가 빠르게 마쳐졌다. 현재와의 모든 걸 차단했고, 이젠 정말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정리됐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인 것처럼 기억도 추억도 생각도 희미해졌다. 그냥 너랑 나랑 그렇게 만났다가 연이 여기까지라 이렇게 다시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싶다는 생각에. 그래서인지 요즘의 내 일상은 자유롭고, 더이상 이 일로 인해 아프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의 나보다 더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결혼과 이혼을 통해 지금 나는 정말 많은 걸 봤고, 느꼈고, 성장했다.


내 결혼과 이혼 모두 쉽게 끝났지만, 쉽게 끝났다는 건 그 사람의 깊이가 그만큼 얕았다는 뜻일 뿐 나의 진심이나 결혼이 가벼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또한 이혼이 흠이 아니라 할 순 없겠지만 이게 절대 내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잘못 들어간 문’ 하나 닫힌 것이고, 이제는 진짜 나한테 어울리는 인생 문을 찾을 차례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문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는 결혼으로 인해 어른이 되겠지만 나는 반대로 이혼으로 나 스스로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모든 시간이 공허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재료로 여기려 한다. 슬픔은 이미 다 소진된 지 오래고, 나를 다시 살필 수 있는 시기가 이제야 찾아왔으니.


이젠 누굴 먼저 사랑해야 할까? 그 답은 내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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