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부숴버리는 날씨의 변덕
원래 스리랑카는 12월부터 4월까지 건기라고 한다. 이미 비행기표를 예약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미에서 비가 안 오는 건기여행의 가치를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굉장히 기대를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스리랑카에 도착하니 12월 말부터 1월 초중순까지 2주 동안 오후에 비가 조금이라도 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만나는 현지인들에게도 물어보니 원래 건조한 시기가 맞지만 올해 날씨가 이상한 거라기에 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오전에는 날이 맑을 때가 많아서 일찍부터 여행을 하고 오후에 비가 쏟아지면서부터는 쉬는 일정으로 돌아다녔지만 산간지방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스리랑카는 인터넷으로 버스노선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웰리가마에서 엘라까지 기차를 타면 콜롬보로 돌아가야 하고 12시간이 넘게 걸려서 어떻게든 버스로 이동하고 싶었고 근처 도시 마타라에서 하루에 몇 번 엘라까지 직행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아침 일찍 웰리가마를 떠났다. 마타라까지 1시간 정도 버스를 탔고 정류장에서 엘라 행 버스를 찾아다녔다. 한 버스 수금원이 엘라 행 직행버스는 10분 전에 떠났다며 자기 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가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한다고 알려줬다. 아직 이집트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사람들을 무조건 신뢰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약간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버스에 탑승했다. 지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버스로는 5-6시간을 이동하는데 가는 길 창문 밖으로 거대한 불상, 사원 안에 묶여있는 코끼리, 도로변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걸어 다니는 공작새 등 정말 스리랑카 같은 풍경들이 펼쳐졌다. 엘라 근처 도시인 웰리와야에 내리니 역시 택시 호객꾼들이 많이 붙는다. 엘라까지 가는 버스는 2시간 후에야 온다며 택시를 타라고 영업하지만 무시하고 3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이래서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
산길을 타고 올라가는 마지막 버스로 1시간 정도 이동하니 엘라에 도착했다. 마을은 현지인들보다 백인 관광객들이 더 많고 비싸 보이는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서있는 전형적인 관광지의 느낌이었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날은 흐렸지만 웬일로 비가 오지 않아서 바로 엘라를 오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나인아치 브릿지로 걸어갔다. 나인아치 브릿지 근처에 도착하니 역시 갈림길에 표지판 설치가 안 되어있다. 옆에 관광객들은 현지인들 말을 믿고 아래쪽 길을 택하지만 나는 사람보다 구글지도를 더 믿었던 터라 윗길로 올라갔다. 두 군데 다 다리로 향할 수 있는 길이긴 했지만 위쪽 길이 높은 곳에서 다리를 조망하는 장소를 거쳐가서 결론적으로는 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지 뷰포인트에서 다리까지 가파르고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흙길을 내려가느라 신발과 손이 더러워졌지만 이제 여행하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100년 전 식민지 시절에 철골을 사용하지 않고 지어졌다는 나인아치 브릿지는 엄청나게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정글 한가운데에 있는 곡선철로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영화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행 열차가 지나가는 다리의 느낌도 났고 다리 자체의 색깔이 칙칙해서 흐린 날이었지만 충분히 예뻤다. 기왕 왔으니 다리 위로 내려와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보았다. 역시 예상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좀 많이 꾸미고 다니는 것 같은 서양인 여자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웬일로 괜찮은 사진을 건졌다. 기차는 30분 정도 늦게 다리를 지나갔고 오래 기다릴 정도로 별 건 없었지만 그래도 안 봤으면 후회했을 터라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음날에는 전망을 보기 위해 리틀아담스피크에 오르기로 했다. 원래는 일출을 보는 장소로도 유명해서 일찍 일어난 김에 빨리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새벽부터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보는 일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도 들고 사실은 그냥 귀찮아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침이 되고 슬슬 일어나려던 참에 내가 가장 가고 싶은 학교에서 인터뷰 제안 메일이 왔다. 2월은 되어야 올 줄 알았던 인터뷰 제안 메일이 새해가 되고 4일 만에, 그것도 하필이면 인터넷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한 스리랑카에서 날아오니 다소 당황스러웠다. 학교 측에서도 가능하면 당장 이번주에 일정을 잡자고 하고 마침 다음 숙소를 싱글룸으로 예약해 뒀던 터라 바로 다음 날 저녁으로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머릿속을 정리할 겸 서둘러 리틀아담스 피크로 올라갔다. 마을을 벗어나 차밭을 걸을 때만 해도 동네 뒷산 정도일 줄 알았는데 마지막 계단이 이어지는 구간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특히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해나 나오면 꽤나 더워졌다. 풍경은 엄청난 절경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치였다. 정상에서 보는 모습도 좋았지만 올라오는 길에 차밭과 함께 보이는 산이 훨씬 멋졌다. 정상에서 앉아서 쉬려는데 여기도 러시아인들이 정말 많았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를 하면 안 되지만 러시아인들이 다른 곳 사람들에 비해 무례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두 번이나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비켜달라고 하면서 정작 비켜주면 고맙다는 말도 안 해서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
리틀아담스피크에서 내려오니 11시도 되지 않고 날씨도 좋아서 나인아치 브릿지를 다시 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아침 일찍 움직이느라 몸도 피곤하고 어차피 인터뷰 생각에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서 빠른 점심을 해결하러 마을로 돌아갔다. 분명 치킨 생선 볶음밥을 시켰는데 한참 먹다 아채계란 볶음밥이 나온 걸 알아차렸지만 귀찮아서 그냥 먹고 숙소로 돌아와 인터뷰 준비를 했다. 잠시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합석했던 독일인과 잠깐 떠든 걸 제외하면 하루종일 면접 때 예상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기차를 타고 하푸탈레로 이동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타는 2등석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시설도 큰 차이가 없는 3등석 표를 한화 약 240원에 샀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자리가 많이 비어있어 창가자리에 앉아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이동하는 동안 스리랑카 산간의 풍경을 감상했다. 개인적으로는 서남부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기차가 더 좋았지만 왜 관광객들이 이 구간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충분히 이해되는 낭만적인 기차여행이었다. 오래된 철로와 부딪히며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달리는 기차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산, 종종 그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들과 작은 마을들, 그리고 밭일을 하다가도 기차를 향해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을 보는 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공항에서 환전한 현금이 서서히 떨어져 가고 있어서 하푸탈레에 도착한 후 기차역 앞 은행에서 환전부터 했다. 고작 200유로를 환전하는데 한참이나 컴퓨터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수기로 장부작성도 하느라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 나름 은행이라고 한 자릿수 동전까지 정확하게 챙겨주는데 전달받은 돈에 10루피짜리 동전이 빠져 있었다. 고작 40원이라 귀찮았고 또 한참 걸릴까 봐 따로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봤던 맑은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11시가 지나니 온 마을이 안개에 덮여버렸다. 하푸탈레에는 정말 묵을만한 숙소가 없어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그나마 평이 괜찮았던 곳을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가격 대비 방 컨디션이 정말 좋았다. 2박에 2만 원 가격에 여느 호텔 더블룸 부럽지 않은 방 크기와 청결에 스리랑카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온수까지 문제없이 나왔다. 시내에서 처음에 올 때는 구글지도대로 오느라 한참 내리막을 내려간 후 다시 등반을 해야 해서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는데 숙소 주인이 지름길을 알려주어서 그 이후로는 큰 문제없이 시내로 왔다 갔다 했다.
산지라 인터넷 속도를 많이 걱정했지만 나름 괜찮은 것 같았고 이 날은 하루종일 방에 박혀서 쉬엄쉬엄 저녁에 있을 면접준비를 이어나갔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꽤나 비가 많이 왔고 날씨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점심에 잘 되던 인터넷이 면접 1시간을 앞두고 상당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와이파이는 많이 끊겼고 데이터는 채 5 Mbps 속도도 나오지 않아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는데 결국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해 면접 세션에 접속했다. 인터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나에게 오는 질문보다 오히려 면접관으로 들어온 교수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정치학부와 산하 연구소의 향후 몇 년간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든지 합격이 되면 지도교수와의 관계설정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내 지원서류가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았고 이렇게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만약 나중에 불합격을 통보받으면 정말 억울할 것 같은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했던 인터넷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아직까지 몇 주 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합격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더 초조한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열어본다. 그래도 여행 일정 중에는 초조함을 잊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날에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하푸탈레의 명소 립톤싯(Lipton's Seat)으로 향했다. 보통 사람들은 툭툭을 빌려 일출을 보러 가지만 많이 일찍 일어나야 하고 숙소 주인이 연결해 줄 수 있다는 가격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비싸서 그냥 오전에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일출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숙소 발코니로 잠깐 봤는데 이 찰나가 스리랑카에서 본 일출 중 가장 아름다웠다. 7시 30분에 시내에서 립톤싯 근처에 내려준다는 버스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막상 도착한 버스는 산 아래의 차 공장까지만 운행하는 버스였다. 그래도 버스를 타고 차 공장까지 가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차밭의의 풍경이 참 좋았다. 주말임에도 학교를 가는지 버스 안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종점에서 같이 내리고 립톤싯쪽으로 학생들, 그리고 차밭으로 출근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버스에서 뿐만 아니라 산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학생들은 단정한 교복을 맞춰 입고 여학생들은 모두 같은 스타일로 양갈래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귀여우면서도 매일 등하굣길에 몇십 분씩 등산을 해야 하는 게 안쓰러웠다. 노동자들은 머리로 무거운 찻잎자루의 무게를 지탱하며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나치면서 눈을 마주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돈을 요구할 법도 한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인사만 한다. 이집트에서 잃은 인류애가 스리랑카에서 충전되고 있다.
학교를 지나쳐 꽤 높은 곳으로 올라오니 사람도 별로 없어 고요한 상태에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차밭 사이를 걸으니 정말 좋았다. 사진에서 보듯이 올라가는 길에서 날씨는 정말 좋았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그렇게 아름답다는 정상에서의 뷰가 혹여나 구름에 가려질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상에 오르니 역시 다른 세상인 것처럼 구름이 산을 모두 가리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30분 정도만 빨리 올라왔으면 경치가 보였을 것 같았는데 도저히 대중교통과 도보 등산으로는 맞출 수가 없는 스케줄이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올라오는 1시간 반의 차밭 트래킹이 워낙 만족스러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상에서 혹여나 구름이 걷힐까 1시간이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 소득 없이 돌아 내려가려는데 한 현지인 부부가 내려가는 길에 차를 태워줄까 물었다. 산 아래쪽 날씨도 흐려져서 굳이 걸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차를 얻어 탔는데 남자분이 한국에서 오래 일하신 분이라 굉장히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셨다. 한국에서 일하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낮에 공장에서 본업을 하고 밤에는 택배일을, 일요일에는 또 추가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말 열심히 돈을 벌었다고 한다. 돈을 충분히 모아 불과 몇 주 전 귀국해서 결혼을 하고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툭툭을 타며 사기는 안 당했냐며 한국 택시기사들과 여기 툭툭 기사들이 비슷하게 양심이 없다고 하시는데 한국사람으로서 굉장히 부끄러웠다. 딱 봐도 힘든 직종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등쳐먹고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일까. 또 웰리가마에서 만난 분과 이 분 모두에게 한국에 나쁜 사람들도 많은데 힘들지는 않았냐고 물었을 때 부정하지 않고 많이 힘들었다는 대답을 들은 것도 굉장히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고국의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모르니 쉽게 차별적이고 멸시적인 발언을 쏟아내지만 정말 그들 중 누가 이 분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국에서 오랜 시간 고생하며 번 돈으로 고국에서 평균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며 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다행이었다.
하푸탈레로 돌아가는 동안 중간에 멈춰서 간식과 짠 우유로 만든 밀크티도 사주셨고 나는 갈 계획에도 없던 근교의 아디샴 방갈로까지도 태워주셨다. 이곳은 원래 차 산업과 관련된 영국 귀족의 저택이었던 곳을 개조해 현재는 수도원으로 사용되는 곳인데 외국인들은 많지 않고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것 같았다. 규모가 크거나 볼 게 많지는 않았지만 잘 꾸며진 정원과 몰려다니는 원숭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아저씨가 조카들 주겠다고 딸기를 사는데 10개도 안 들어있는 팩에 한화 약 3만 원인 7500루피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다른 곳은 너무 더워서 산간지방 쪽에서만 나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데 한국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가격이라 계산할 때 보니 750루피를 잘못 말하신 거였다. 아무리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딸기 몇 개에 3일 치 호텔 숙박비를 쓸 사람들은 없다. 망고도 사서 같이 먹었는데 매운 걸 좋아하는 스리랑카 사람들 답게 여기에도 고춧가루를 뿌려먹는다. 스리랑카에서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매운 것에 대한 자부심을 어느 정도 숨길 필요가 있다. 로컬 음식을 먹어보면 이곳 사람들이 한국인들 이상으로 매운맛에 진심인 걸 알 수 있다. 빵집에서 파는 사모사나 피쉬번 등도 잘못 걸리면 하루종일 속이 쓰릴 정도의 매움을 선사한다. 어쨌거나 이 스리랑카 부부가 베풀어준 친절 덕에 혼자는 하지 못 했을 여행의 경험이 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리랑카 여행의 낭만이 계속 갈 줄 알았다.
다음 행선지는 정말 오랜 고민 끝에 누와라엘리야로 정했다. 원래는 해튼으로 가서 스리파다를 오르고 싶었지만 앞으로 며칠 동안 오전에도 천둥번개가 칠 예정이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푸탈레에서 호튼플레인스를 가고 누와라엘리야를 스킵하는 방안도 생각해 봤지만 툭툭을 혼자 대절하기에는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숙소에 나를 빼면 아무도 없어서 동행을 구할 수도 없었고 주인들이 좋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와라엘리야에서 동행을 구해 호튼플레인스를 갈 목적으로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이게 스리랑카 여행 최악의 실수가 될 줄은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누와라엘리야 근처 마을 나누오야로 가는 기차에 탑승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간을 스리랑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구간이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고 대부분 서서 오느라 창 밖의 풍경은 즐기지 못했다. 나누오야에서 버스를 타고 누와라엘리야에 도착한 후 점심을 먹고 숙소까지 걸어가려는데 우연히 숙소 주인을 만나 툭툭을 얻어 탔다. 숙소 바로 밑이 골프장과 고급 호텔, 맨션들이 늘어선 곳이라 유럽 부촌의 느낌이 났다. 체크인 후 주인에게 내일 호튼플레인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한 후 바로 싱글트리 전망대로 걸어 올라갔다. 숙소에서 꽤나 걸어야 했는데 오르는 길에 건설 중인 불상을 향해 줄지어 서 있는 수도승들이 인상적이었던 자그마한 사찰을 구경하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전망대가 있어야 할 위치에 송전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당황했지만 구글 리뷰를 보고 숨겨진 길로 들어가는 곳을 찾았다. 전망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도시로 다시 내려와 자그마한 시장을 구경하고 현지인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도시도 전혀 매력적인 모습이 없어서 도대체 사람들이 여기를 왜 오는지 의아할 정도였고 호스텔에서 같이 얘기한 다른 여행자들도 비슷한 생각이라 다들 일정을 당겨 이 도시를 빨리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숙소 주인에게서 호튼플레인스를 고민하고 있던 한 여행자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정 자체에는 여유가 있어 하루를 더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이틀 후 날씨는 정말 최악이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혼자 가기로 했다. 혼자 가면 왕복 툭툭 대절 비용에 입장료와 각종 수수료까지 9만 원이나 들었지만 다음날 예보가 나쁘지 않았고 사파리, 시기리야 유적 등 다른 비싼 입장료를 받는 곳은 건너뛸 생각이라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5시부터 툭툭을 타고 호튼플레인스로 향했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왔고 날이 서서히 밝으니 사방에 자욱이 낀 안개가 보였다. 툭툭 기사가 오늘은 날이 아니라며 어제가 정말 좋았다고 말해줬다. 어제 이동 대신 하푸탈레에서 혼자서라도 여기를 올 걸 하는 후회가 세게 들었다. 그래도 기사가 가끔 아침에 날이 갤 때도 있다며 위로해주려 했지만 도무지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안개 사이를 걸어가는데 한 중년 부부가 보였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해외에서 동아시아인들을 보면 한중일 중 어디 사람일지 프로파일링을 한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국사람들 같으면서도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외모였다. 결정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니 인도 사람이라고 했다. 의외의 대답에 내가 인도 어디냐고 물어보니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 분들이라고 했다. 원래 이 분들이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독립된 왕국이었는데 70년대에 인도로 흡수되었다고 하고 사용하는 언어는 부탄어라고 했다. 이분들은 안 그래도 외모 때문에 한국사람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도착한 Little world's end와 World's end 모두 안개가 자욱이 껴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동안 날씨가 좋아지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짙은 안개가 몰려왔고 3시간가량 트래킹의 막판에는 진흙이 되어버린 길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왔다.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순록도 나는 정말 멀리서 머리만 살짝밖에 보지 못했다. 날씨가 좋으면 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이곳이 내가 갔을 때는 날씨 때문에 9만 원이 공중분해 되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칠레에서 Cerro Toco 화산을 올라가며 풍경은 좋은데 여기가 왜 10만 원이냐 하냐며 툴툴댔던 기억이 있는데 호튼플레인스를 경험하고 나니 화산에게 미안해졌다. 결국 동행을 구해 돈을 아끼려던 누와라엘리야 행이 날씨, 비용, 시간 측면에서 모두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계여행 중 가장 아쉬웠던 곳이고 정말 여행에 있어서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왕가의 계곡이 그랬듯이 스리랑카에서는 이때를 기점으로 여행의 설렘과 의욕이 깨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곳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쁜 기억이 없었는데 워낙 강렬한 실패라 타격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날씨가 좋을 때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스리랑카 여행의 분기점이 된 중부 산간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