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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Feb 04. 2024

[세계여행] D+211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으로 살아보기

스리랑카에서 그나마 감당 가능한 가격에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목적지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전부였다. 싱가포르는 물가도 비싸고 도시국가라 볼거리도 없을 것 같아 자연스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가 스리랑카 다음 행선지가 되었다. 사실 스리랑카 이후로 고생하고 모험하는 느낌의 배낭여행은 끝났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말레이시아는 물가도 낮고 먹거리도 만족스러운 가운데 여행인프라 또한 지금까지 방문한 국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어서 약 2주간 돌아다니는 동안 미친듯한 더위를 제외하면 힘들다는 느낌이 거의 든 적이 없다.


배낭여행의 느낌이 사라진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말레이시아는 원주민인 말레이인을 제외하고도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주한 중국계와 인도계의 비율이 각각 25%와 7%에 달할 정도로 다민족 국가다. 특히 여행객이 많이 가게 되는 도시, 특히 돈이 모이는 시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꽤나 자주 말레이계보다 중국인들이 훨씬 많이 보인다. 나는 선천적으로 머리가 워낙 직모라 조금만 길어도 너무나 지저분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장기여행에 있어서의 편리함 때문에도 짧은 스포츠머리를 고수한다. 옷차림도 전혀 꾸미지 않고 초록색 반바지에 기본 티셔츠 한 장을 걸치고 다녀서 다른 나라에 있을 때도 딱히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나를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 지금까지는 동양계가 워낙 없는 국가들이라 누가 봐도 여행객이었지만 가뜩이나 중국계가 많은 나라에서 중국인 같은 행색으로 돌아다니고 식사도 거의 중국계 현지식당에서 해결하니 아무도 내가 현지인이 아닐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현지인, 여행객 할 것 없이 나에게 길을 묻고 가게에서는 당연히 중국어로 응대한다. 가끔 중국계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내가 한국인임을 밝혀도 너 참 중국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이 돌아온다. 남미나 스리랑카같이 동양인이 없는 여행지에서 동양인이 돌아다니면 당연히 튀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때로는 힐끔힐끔, 때로는 대놓고 쳐다보고 궁금해하는 모습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현지인 취급을 받는, 여행하고 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나도 말레이시아가 다른 동남아 국가들같이 평범한 개발도상국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쿠알라룸푸르는 1인당 GDP가 통계에 따라 3만 불이 넘어갈 정도로 부유한 지역이다. 공항에서부터 숙소까지 이동하는 동안에 보이는 시내의 모습과 교통수단의 깔끔함도 결코 서유럽이나 한국에 뒤처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터라 숙소에 짐을 맡기고 찾아놓은 근처 식당에 커리락사를 먹으러 갔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풍기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아시아로 넘어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대부분 나라에서 아침식사는 빵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침을 거르기 마련이지만 말레이시아는 아침부터 밥이나 국수를 파는 식당이 많아서 웬만하면 세끼를 모두 챙겨 먹었다. 또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식당 수도 많지 않고 음식의 종류도 많이 없어서 며칠씩 같은 곳에서 같은 메뉴를 먹기 십상인데 여기는 마음만 먹으면 몇 주 동안 매 끼 다른 음식을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음식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식사 후에 체크인 시간까지는 부킷빈탕 시내를 마냥 걸어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임에도 상업시설들로 가득 찬 시내라 그런지 분주한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맛집이 있고 대형 백화점들이 가득한 모습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곳곳에 걸려있는 중국풍의 장식들과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익숙한 듯 이국적인 모습을 만들어냈다. 쿠알라룸푸르를 돌아다니면 새삼 한국 브랜드가 정말 많다는 게 느껴진다. 공항에서부터 이마트 24가 있었고 시내에도 코웨이, 파리바게트, 32cm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익숙한 브랜드들부터 조선미녀 같은 각종 화장품 브랜드의 가게들이나 광고가 가득했다. 백화점에 유동인구가 많은 자리에 들어선 파리바게트 카페에서 빵을 고르는 서양인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 중 누가 이 브랜드가 한국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한 백화점 뒤쪽으로 나있는 육교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더운 날씨에 이동을 위해 만들어놓은 시설인 듯싶은데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인 트윈타워 표지판을 따라 걸으니 2km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에어컨이 나오는 육교와 쇼핑몰 지하들을 거쳐 트윈타워가 보이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지하도에서 KLCC공원으로 나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층빌딩들이 가득한 산업지구 한가운데에 작은 밀림을 조성해 놓은 듯했는데 나무들이 과하게 빽빽하지 않고 딱 사람들이 쉬기 좋은 정도의 규모와 시설로 너무 잘 꾸며놓은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정도면 할 맛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래 고층빌딩들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공원에서 보이는 트윈타워의 모습도 생각보다 인상적이었다. 한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지금도 쌍둥이 빌딩 중에는 최대 규모라는데 생각보다 얇은 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압도적인 느낌은 적었지만 그럼에도 대도시의 랜드마크로 손색없는 자태였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 저녁에는 식당이 밀집한 푸두 (Pudu) 지역에서 말레이시아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중국식 말레이 요리 바쿠테를 먹었다. 갈비탕 같은 국물에 돼지 살코기와 내장을 넣고 끓은 음식인데 오후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찾아간 보람이 느껴질 정도의 맛이었다. 푸두쪽은 거리별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른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식당, 인도식당, 말레이식당이 각각 다른 거리에 밀집해 있는데 바로 옆 길이여도 파는 음식, 풍기는 냄새, 앉아있는 손님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길 하나만 건너도 중국에서 인도로 넘어온 듯 한 인상을 준다. 말레이시아가 특이한 점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지만 미국과는 다르게 이들이 잘 섞이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 종교 음식과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인종적 갈등이 크지 않아 보인다. 물론 깊게 들어가면 대부분 상류층인 중국계에 대한 거부감이라던가 유교적 성취의욕이 없어서 사회의 짐처럼 인식되는 인도계에 대한 대우 등 나름의 문제도 있다고 하지만 대놓고 종교적 충돌을 일삼는 다른 다문화 국가들보다는 훨씬 평화롭고 이상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모스크, 중국식 도교 사원, 불교 사찰, 힌두교 사원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방의 종교와 문화를 문제 삼지 않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다문화 국가들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어 단어들을 공식 표기법이 아닌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점이었다.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스리랑카에서는 심지어 관공서 간판에 까지도 오탈자는 무지하게 많았지만 그래도 공식 표기법을 고수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경찰을 Polis, 약국을 Farmasi, 레스토랑은 Restoran, 택시는 Teksi라고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다. 다양한 문화와 함께 이런 부분까지 더해져 쿠알라룸푸르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중동까지 근처에 있는 모든 문화들을 모조리 섞어놓은 듯한 정말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트윈타워의 야경을 보러 갔다. 해가 넘어가고 더위도 누그러지면서 공원에 쉬러 온 현지인과 여행객들이 여유로움을 풍기고 화려한 도시의 조명과 우뚝 솟은 트윈타워의 모습이 어우러져 완벽한 야경을 만들어냈다. 음악분수가 나오는 시간도 겹쳐서 봤는데 별 건 없었고 돌아오며 지나간 숙소 앞 잘란알로 야시장도 그냥 사람 많은 먹자골목 느낌이라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날 쿠알라룸푸르의 다채로운 모습은 그저 그런 동남아 도시일 거란 생각을 깨기에 충분했고 결국 나는 막연히 계획했던 2박 일정에서 이틀을 추가하게 되었다.


다음날은 전날 밤비행의 여파로 늦게 일어나 중국식 호커센터에서 시원한 조개국수로 아침을 해결한 후 힌두교 사원이 있는 바투케이브로 이동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면서 다른 개발도상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대중교통의 접근성과 깨끗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또 구역이 바뀔 때마다 같이 바뀌는 인종 구성을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도시 외곽 쪽으로 나와서 전철로 환승을 하려고 보니 바투케이브로 가는 다음 열차가 1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명색이 장기여행자인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 다음 역까지 걸어가며 졸지에 아무것도 없는 외곽 주거지역을 구경하고 간식을 사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찌어찌 도착한 바투케이브 역에서 사원으로 걸어가는 몇백 미터 거리는 관광지답게 각종 상인들이 가득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사원 앞에는 비둘기들이 미친 듯이 많았고 동굴로 걸어 올라가는 계단에는 원숭이들이 가득했다. 동굴 안에 지어진 사원은 신기하긴 한데 엄청나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개 여행자가 뭘 감히 평가하겠냐만은 다른 종교시설에 비해 힌두교 사원은 알록달록한 외부와는 다르게 성직자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대규모의 종교의식을 구경할 기회도 거의 없으니 외부인에게 딱히 흥미로운 부분은 없는 느낌이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지만 별 것 없었던 므르데카 광장 인근을 둘러본 후 숙소 밑 빨래방에서 오랜만에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세탁했다. 스리랑카부터 너무 더워서 땀도 많이 나고 가방에 오래 있던 옷이 다 눅눅해진 상태였는데 세탁 후 건조기까지 깔끔하게 돌리니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셋째 날에는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러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침 10시에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하는 무료 가이드 투어가 있다고 해서 시간을 맞춰 도착했는데 한국어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의 가이드도 한국사람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긴 두 시간 동안 굉장히 열심히 진행하시는데 너무 아마추어시라 내가 생각했던 정도로 깊이 있는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박물관 전시품들도 그다지 볼 건 없지만 그래도 현대사에 관련된 부분은 흥미로워 보여서 따로 찾아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박물관에서 같이 투어를 들은 한국사람에게도 당연히 중국인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 투어 후에는 뒤쪽에 위치한 공원에 가려다 너무 덥고 이상하게 가는 길도 막혀있어서 빠른 포기 근처 국립모스크와 이슬람 미술관도 밖에서 훑어만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다시 바쿠테 집으로 가는데 현지인들이 나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길을 물어본다. 바쿠테 집에서는 내가 이틀 전에 왔던 건 기억하지만 당연히 중국사람으로 생각해 중국어로 반겨주고 내가 중국어를 못 하는 걸 들었음에도 잊고 1분 후에 바로 다시 중국말로 말을 건다. 완벽히 현지화가 완료되었다.



쿠알라룸푸르가 맛집을 찾아다니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것 말고 객관적으로 볼거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하루 남은 일정에 뭘 할까 생각하다 다음날에는 국립갤러리를 방문했다. 규모도 적당하고 재미있는 작품들도 꽤나 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확실히 여행자 입장에서 비유럽국가 미술관을 방문하면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 보다는 현지의 색채와 삶의 방식이 보이는 작품들이 흥미롭게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레이시아에 대해 아는 게 문화의 혼합 쪽에 국한되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내가 어떤 작품을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미술관을 가장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설치미술, 현대미술과 스케치는 과감히 버리고 중간중간 로비 소파에서 쉬어가면서 맘에 드는 그림 앞에서 잠깐씩 멈추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마침 이곳은 입장료도 없어서 아깝다는 느낌 없이 좋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시내로 걸어서 돌아가면서 현지 식당에서 나시고랭을 먹는데 차를 주문하니 식당 할머니가 뜨거운 차를 내주었다. 이 더운 날씨에 종종 뜨거운 차를 먹는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열치열 삼아서 마시긴 했는데 앞으로는 더 명확하게 차가운 음료를 달라고 해서 이런 참사를 방지해야겠다. 숙소에서 밀린 블로그를 쓰고 마지막으로 트윈타워 야경을 봤다. 가는 길에 런던 이후로 거의 4년 만에 파이브가이즈를 먹었다. 그때도 돈 없는 학생이었고 지금도 돈 없는 여행자라 감자튀김과 셰이크는 먹을 수 없다. 런던에서 워낙 맛있게 먹었어서 기대했지만 이번에는 가격에 비해서 딱히 맛이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역시 나는 쉐이크쉑이 맞는 것 같다.


확실히 고난과 역경 없이 매 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기저기서 쉬어가며 하는 여행이라 몸은 편했다. 마음까지 편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때까지만 해도 학교 지원 결과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늘 불편한 상태로 이메일과 정보공유 포럼을 뒤적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알라룸푸르는 놀라울 정도의 발견이었다. 솔직히 숙소에서 쉬면서 매 끼 맛있는 음식만 찾아다녀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의 여행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번이나 적었지만 기대치가 전혀 없었던 동남아에서 반전의 첫인상을 얻으니 적어도 말레이시아 여행에 대한 기대는 조금씩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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