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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Feb 07. 2024

[세계여행] D+215 믈라카, 카메론 하이랜드

뜻밖의 폐허관광과 산만 가면 몰려오는 구름비

쿠알라룸푸르 근교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도시는 식민지 시대의 흔적으로 유럽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구시가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믈라카라는 도시다. 사실 하도 세계문화유산을 많이 돌아다녀서 이런 타이틀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유네스코가 어쨌든 유럽에 우호적인 편이라 정말 별 것 아닌 유럽 도시들까지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까지 공신력이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일정이 촉박하면 당일치기로 가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인데 나는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2박을 했다.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역시 중국 국숫집에서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외곽에 있는 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을 찾아가고 버스표를 사는 것도 고난의 연속이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외국인들이 이용하는데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았다. 다만 안일하게 사전예매를 하지 않고 터미널에서 현장구매를 했는데 버스는 자주 있지만 워낙 가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가까운 시간대의 차들은 거의 매진된 상태라 2시간 후 버스티켓을 사고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버스도 깔끔했고 교외 도로도 우리나라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믈라카에 진입하고 교통체증으로 인해 1시간 동안 차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빠르면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거리를 3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믈라카 시내는 음력설이 임박해서 그런지 부착해 놓은 장식들 때문에 들어서자마자 중국의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짐을 맡기고 그리 크지 않은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역시 해상거점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배를 거치고 현재는 많은 중국계 인구가 거주하는 만큼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관광산업을 위해 강변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게 도시의 미관에 굉장한 기여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질적일 것 같은 다양한 문화의 모습들이 서로 따로 놀지 않고 어우러지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를 만들어 낸 듯하다. 도시이동을 하면 도착이 늦어도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늘 첫날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된다. 특히 전망을 볼 수 있는 언덕이 있으면 웬만하면 올라가는 편이다. 이 날도 어차피 작은 도시에 하루 더 있을 예정이니만큼 대충 산책만 하다 들어가려고 했지만 돌아다니다 보니 식민시절 요새와 교회의 폐허가 있는 믈라카 언덕을 오르게 되었다. 바다가 멀리 보이고 많이 높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전망이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만 아니면 그냥 여유롭게 앉아서 도시를 내려다보거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괜찮은 포인트였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강제로 중국인이 되어버렸다. 벤치에 앉아있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커플이 한국사람들이었고 '여기 처음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그걸 보던 원주민들은 어땠을까?' 같이 여행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굉장히 예쁘게 하고 있었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모기를 물려 긁은 곳들이 심하게 덧나서 반창고를 붙이고 있으니 그분들이 '여기 벌레가 많아서 옆에 사람도 상처가 났나 보네' 하고 얘기했다. 당연히 한국인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말했을 거고 민망하실까 봐 끝까지 한국인이 아닌 척,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중간에 한 중국사람이 말을 걸어서 잠깐 들통날 위기가 있었으나 대충 봐도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아서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체를 숨겼다. 기분이 나쁘진 않고 오히려 재밌었지만 '내가 그 정도로 중국사람처럼 생겼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그렇다. 나는 그 정도로 중국사람처럼 생겼다. 해가 넘어가고 주거지역을 잠깐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와 마침 말레이시아와 있었던 아시안컵 경기를 재미있게 보고 잠에 들었다. 해가 넘어가고 주거지역을 잠깐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와 마침 말레이시아와 있었던 아시안컵 경기를 재미있게 보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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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항구도시에 왔으니 바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원래 휴양지가 아니라 항구로 쓰던 곳이라 그런지 의외로 도심 쪽에는 접근 가능한 해변이 없었고 구글 지도를 보니 근처에 믈라카 섬이 있어서 저기로 가면 바다가 보이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작정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도로는 바로 근처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제법 되었고 날씨도 너무 더워서 꽤나 힘들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하루종일 도보로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스타일인데 이집트에서부터 스리랑카를 거쳐 말레이시아까지 너무 심한 더위가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어쨌거나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걸어 도착한 믈라카 섬은 전혀 의외의 모습이었다. 시내에 붙어있는 야심 찬 조감도와는 다르게 나름 꽤나 넓은 지역에 지어진 건물들은 모두 미분양이거나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멀티플렉스가 되어야 했을 크루즈 모양의 건물도 위쪽은 철골이 다 드러난 채 방치되어 있었고 해변 쪽 아랍 스타일의 호화 주거시설들도 공사가 중단된 모습이었다. 도시 전체에 빈 건물이 가득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차가 거의 없으면서 영화에서처럼 비닐봉지만 바람에 휘날리는 뜻밖의 폐허 관광이 되었다. 아마도 도시계획이 코로나로 인해 중단되었을 거라 추측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 인터넷을 대충 찾아보면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중단된 사업들도 있고 다시 투자를 받아 시작되는 부분도 있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던가 하는 모습 없이 그냥 버려진 폐허의 모습이었다.



믈라카 섬에서 구글지도에 나오는 유일한 볼거리인 해상모스크는 방문시간이 아니라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었고 발전소 부지로 나 있는 옆 길 또한 통행이 불가했다. 결국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와서 바다도 못 보고 돌아가나 싶었는데 반대쪽에 바다 쪽으로 나있는 작은 길이 보였다. 들어가려는데 앞에서 간이매점을 차리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은 사유지라며 들어가려면 물을 한 병 사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더워서 시원한 물이 필요한 차에 잘됐다 싶어서 물을 사고 바다를 보러 들어갔지만 그다지 좋은 전망은 아니었고 해상모스크도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나머지 해변 쪽은 모두 사유지인지 바다로의 접근이 가벽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정말 폐허관광을 하고 싶다 하는 사람이 아니면 전혀 올 이유가 없는 섬인 것 같다. 그 더운 길을 다시 중간중간 쇼핑몰에서 쉬어가며 되돌아와 시내를 돌아다니고 야시장을 구경하며 믈라카 여행을 마무리했다. 야시장은 딱히 내 취향은 아닌 게 파는 음식들도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들이고 당연히 가격도 싸지 않으면서 사람 많고 시끄러운 내가 싫어하는 조건들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잠깐 돌아보는 정도로 충분하고 말레이시아에서 밥은 역시 중국식당이나 호커센터 들어가서 먹는 게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 같다.


다음 행선지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고민하다 결국 산간이라 그나마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카메론하이랜드로 정했다. 직행버스가 없어서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번 환승을 해야 했고 역시 산간지방으로 올라가다 보니 막판에는 굽이진 길을 오르느라 멀미로 약간 고생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시고 옆마을에 야시장이 서는데 가보라고 차로 태워주셨다. 이분께도 이제는 안 들으면 서운한 너 중국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은 현지인들 아파트단지 사이에서 서는 장이었는데 그래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주민들이 음식을 포장해서 집에서 먹는 곳인 듯했다. 예전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단지에 요일을 정해놓고 서는 장을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다. 앉아서 먹을 공간이 없어 불편했고 음식맛은 별로였다. 숙소까지는 산에 난 찻길을 따라 50분 정도 걸리는 위치였는데 택시를 타기 싫어서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돌아왔다.



카메론 하이랜드에서는 보통 차밭과 모시포레스트를 가는 투어를 하거나 산간 마을들 사이로 나있는 코스들로 트래킹을 한다. 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투어에 참여했다. 현지 가이드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는데 이 지역의 동식물에 대해서도 박식해서 오랜만에 설명을 듣는 맛이 있었다. 카메론하이랜드가 말레이시아에서 드물게 시원한 곳이라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반도에 공급되는 채소 대부분을 재배하는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나다니면서 꽤나 큰 부지에 이런저런 채소를 재배하는 밭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투어 중간중간에 길에 사는 강아지들에게 열정적으로 먹이를 챙겨주느라 계속 탔다 내렸다를 반복했지만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투어 자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회사가 운영한다는 차밭은 규모나 풍경 모두 스리랑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늘 구름이 가득해 현지인들은 클라우디 포레스트라고 부른다는 모시포레스트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글이라고 한다. 산 아래쪽은 날씨가 괜찮았어서 혹시 전망이 보일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역시 안개와 비가 가득해서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없었다. 투어가 끝나고 도시로 돌아와 인도식당에서 밥을 먹었지만 맛이 없어서 앞으로 인도음식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시간이 남아 트래킹 코스를 한 곳이라도 갈까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쉬고 내일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믈라카는 작은 규모에도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보다 만족스러웠고 카메론 하이랜드는 더위가 없는 산간지방임에도 딱히 전망이 인상적이지 않아서 매우 실망스러웠다. 어차피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천천히 가자는 생각으로 들렀지만 과감히 포기하거나 차라리 이포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이 즈음 다음 비행기표를 예매해서 마지막 도시는 공항이 있는 페낭으로 정해졌다. 원래는 일주일정도 남은 시간 동안 랑카위와 페낭 조지타운 두 곳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는데 결국 페낭 조지타운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일정으로 결론을 냈다. 유흥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 서양인들이 해변에서 술 마시며 놀러 가는 랑카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가는 교통도 버스, 기차, 페리를 갈아타며 길게 이동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랑카위-페낭을 오가는 페리가 코로나 이후로 없어져서 페낭으로 들어갈 때 또 긴 이동을 해야 하는 점이 문제였다. 조지타운이 여러모로 워낙 좋았어서 돌아보면 잘 한 선택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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