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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Feb 09. 2024

[세계여행] D+222 페낭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한결 여유롭게 즐기는 조지타운에서의 일주알

의외로 말레이시아가 정말 마음에 든 것과는 별개로 이곳은 여행할만한 도시가 그렇게 많은 나라는 아니다. 그래서 마침 볼 것도 꽤나 많고 음식도 맛있다고 하니 말레이시아를 떠나기 전까지 비는 일주일을 온전히 페낭에서만 보내기로 했다. 페낭여행의 중심 조지타운은 페낭 섬 내에 있어서 들어가려면 다리로 해협을 건너는데 그 길이가 8.5km나 된다고 한다. 맑은 날씨 덕분에 인천대교를 건널 때 느껴지는 시원함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산악지방이라 긴소매를 입을 정도로 시원한 날씨였던 카메론 하이랜드와는 달리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섬에 들어왔으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강렬한 더위가 온몸을 때렸다. 버스터미널이 조지타운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지금까지 다른 여행지들에서 에어컨은 고사하고 앉을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승하차 위치나 출발시간도 현지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버스와는 달리 구글지도가 알려주는 스케줄대로 운행하는 쾌적한 버스가 너무나 반갑게 느껴진다. 버스에서 보는 페낭의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바다에 접한 부산과 애매한 높이의 낡은 아파트와 상가들이 서 있는 여의도 주거지역을 섞어놓은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더위를 식히다 저녁을 먹고 동네를 돌아봤다. 페낭은 인구의 70% 가까이가 중국계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길거리도 기본적으로 중국의 느낌이 많이 나면서 식민지식 유럽 건축물과 다양한 종교사원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믈라카와는 또 다른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말 길에 서서 한 바퀴를 돌아보면 불교, 힌두교, 이슬람, 도교 사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도 흔하다. 이렇게 많은 종교가 큰 갈등 없이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면 어쩌면 다문화의 해법은 사회적으로 통합(integration)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레이시아가 택한 방치와 공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15년 난민위기 이후 독일에서 한동안 가장 큰 화두는 대다수가 무슬림인 이민자들을 어떻게 독일의 시스템에 통합을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이민자들이 현지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에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동시에 주류사회가 언젠가 그들이 언어를 배우고 생활방식을 맞춰가면서 통합을 이루면 이민자들이 독일인들과 동등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는 부분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외모가 다르고, 모국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이민자들은 그들의 적응 여부와 관련 없이 이방인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독일어를 잘하고 독일에서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다녔고, 졸업식에서 교장이 통합의 우수한 사례라고 칭찬했어도 나도, 그들도 나를 독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민자들을 정해진 틀에 끼워넣기보다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민자들에게 행하는 간섭을 줄이고 불법적인 절차로 들어왔거나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이민자들에게는 추방을 포함한 적극적 제제를 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면서도 이민에 대한 반감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통합이 아니라 적법한 공존에서 해답을 찾아볼 필요가 느껴진다.



섬에 들어온 이상 첫날은 아무리 피곤해도 바다를 구경하게 된다. 조지타운의 동쪽 바닷가에는 수상가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 길을 따라 기념품점이나 식당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꽤나 여러 곳의 수상가옥 밀집지들이 있는데 해가 질 즈음 간단하게 산책하고 일몰을 구경하기 좋다. 다만 나무로 만들어진 부두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허술해서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게 되면 상당히 무서웠다. 언 듯 보이는 수상가옥 안은 때로 가정집인지 사당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국식 도교나 불교 장식들로 꾸며져 있는 곳들이 많았다. 상수도나 전기선은 데크 위로 보였는데 하수도는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궁금해졌다. 조지타운에서 유명한 벽화와 중국식 조명이 켜진 거리를 거쳐 숙소로 돌아왔다. 조지타운의 첫인상은 시골은 아니면서 복잡하지 않고 은은한 따뜻함을 풍겼다.


내가 지원한 대학교들 중 한두 곳이 대부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결과를 발표해서 이 즈음에는 습관적으로 메일함과 Gradcafe, Reddit을 뒤져보는 게 일상이었다. 결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기다림의 초조함의 발현은 어쩔 수가 없다. 첫날밤이 지나고 새벽에 일어나서 언제나처럼 무의식적으로 핸드폰부터 만지면서 밤새 온 메일이 없나 확인했고 드디어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결과가 나왔으니 지원 사이트를 확인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지원 사이트에 로그인하는 그 몇십 초 동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고 합격증을 확인하고는 '드디어 됐다' 하는 생각이 들며 그동안의 초조함이 다 풀렸다. 거의 4주 전에 진행했던 면접 이후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드디어 끝났다. 면접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사전에 내가 학부생 때부터 정말 좋아했던 교수와 짧지만 긍정적인 컨택을 해서 합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긴 기다림이 더 초조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마음 편하게 여행할 있을 같아 좋았다.



점심을 먹고 페낭 시내를 그냥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유명하다는 벽화들은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이 많아 보여서 지나다니다 우연히 볼 때를 제외하면 따로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아무렇게나 걸어 다녀도 옛 중국분위기가 많이 나는 건물들이 가득한 거리가 참 예쁘다. 조지타운 북쪽 바닷가에는 낚시를 하고 있는 현지인들이 많았고 근처 선착장에 거대한 크루즈도 입항해 있었다. 다만 바닷가와 물은 좀 더러웠다. 낮 시간대가 되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숙소로 잠시 피신해 있다 저녁을 먹고 또 한참을 돌아다녔다. 걷다 보니 어제와 같은 곳을 지나치고 같은 곳에서 일몰을 봤지만 여전히 도시가 주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새벽까지 아시안컵 사우디전을 보고 다음날 아침에는 숙소를 옮겼다. 원래 지내던 곳이 좋았는데 연장을 하려고 보니 이 날짜에만 가격이 올라있어서 잠시 숙소를 바꿔야 했다. 하루를 온전히 쉴까도 생각했지만 정말 몸이 많이 피곤하지 않은 이상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휴식일을 최대한 가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해가 중천이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페낭힐로 향했다. 페낭 섬의 많은 부분을 조망할 수 있다는 페낭힐은 굳이 걸으려면 걸어서 올라갈 수 있고 나도 웬만하면 그렇게 했겠지만 이 날씨에 등산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 원짜리 푸니쿨라 티켓을 결제했다. 푸니쿨라를 타니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많이 올라가서 정말 잘 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전망은 나무에 가려지고 쉬면서 편안히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않았고 힌두교 사원 옆에서 풀을 뜯어먹던 원숭이는 너무 사람과 행동이 비슷해 약간 징그러웠다. 확실히 만원 값어치를 하는 곳은 아니었다.



기왕 버스 타고 여기까지 온 김에 근처에 있는 극락사까지 들려보기로 했다. 사실 스리랑카에서 불교사원은 지겹도록 가봤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동남아식이 아닌 중국식 사찰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의 사원들이 대형 스투파와 불상을 제외하면 솔직히 별 게 없는 반면에 중국식 사찰은 역시 여러 건물과 구조물들이 어우러지며 익숙한 듯 이국적인 느낌을 만들어냈다. 이름값을 하는지 너무 아름다운 모습에 여기서만 두 시간가량을 보낸 것 같다. 건물들과 장식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동양 문화에 익숙한 내가 봐도 이 정도인데 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는 서양인들이 보면 환장할 것 같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탑에 올라가서 보는 도시와 산의 모습도 꽤나 괜찮았다. 사실 중국여행이 비자나 숙소 같은 면에서 제약이 많고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면 난이도가 꽤 있는 탓에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중국 문화권을 경험해 보고 살짝 궁금함이 생겼다. 땅덩어리가 큰 만큼 정말 어마어마한 볼거리도 많다는데 언젠가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족스러운 구경을 마치고 조지타운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옮긴 숙소에 2층침대를 받았는데 정말 기본적인 2층침대라 사다리를 디딜 때마다 발이 너무 아팠다. 여행자들이 2층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이유가 있다.


조지타운 4일 차 아침에 일어나니 학교 방문 행사 초청 메일이 와 있었다. 비행기표와 숙박, 식사를 제공해 준다기에 행사는 1박 2일이었지만 앞뒤로 일정을 조금 붙여 정말 갈 생각으로 일단 세계여행을 마무리하는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생각보다 갑자기 세계여행의 마지막이 정해진 것이다. 방문행사는 결국 비자문제 때문에 못 가게 되었지만 어차피 말레이시아 다음으로 이어질 동남아 여행에 전혀 미련이 없어서 돌아봐도 딱히 후회는 되지 않는다. 중남미 일정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첫 장기여행이 된 것 같다.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그 후로 예상로 커리어가 흘러가면 언제 또 이렇게 길게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늘 뜻하지 않은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날은 오랜만에 트래킹이나 할 겸 페낭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15000원 정도 하는 나름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국립공원은 관리가 안 돼서 지저분하다는 평이 많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당연히 덥지만 그래도 숲 속 그늘에서는 걸을 만하고 정글과 바다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또 걷는 동안 도마뱀, 뱀, 엄청난 수의 개미떼 등도 볼 수 있었다. 목적지였던 터틀비치까지는 산을 한번 오르내리는 코스인데 약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조지타운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시원한 해변이 더운 날씨에서의 트래킹을 보상해 준다. 해변에는 수영금지 표시가 여러 군데 되어 있어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바다에 독성 해파리가 굉장히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터틀비치에는 이름이 말해주듯 다소 허접한 거북이 보호소도 하나 위치하고 있다. 몇 마리의 새끼 거북이들과 한 마리의 성체 거북이를 볼 수 있었는데 이 작은 생명체들이 저렇게 큰 바다거북으로 자란다니 정말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보다 트래킹이 빨리 마무리되어서 돌아가는 길에 다른 코스도 한번 돌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잠깐 걸으면서 더위를 느끼고 신속하게 미련한 생각을 정리했다. 땀을 실컷 뺀 터라 숙소로 돌아온 뒤 이 정도로도 상당히 피곤했으니 잘 한 선택이다.


남들과 함께 쓰는 호스텔에는 언제나 빌런들이 넘친다. 안 그래도 두 번째 호스텔이 10인실이라 불편한데 새벽에 누가 급하게 들어와서는 저혈당 증상을 느꼈는지 설탕이 들어간 물이 필요하다고 울어대는 탓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깼다. 나는 2층이라 누워서 듣느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본인이 죽어도 못 가겠다고 해서 결국에는 다른 남자 하나가 대신 음료수를 사주러 한밤중에 나간 것 같다. 본인 입장에서 위급하게 느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10인실 호스텔에서 사람들을 다 깨워가며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것도 문제지만 유럽인들의 배려 없는 이기주의도 여행하다 보면 지겹게 마주하게 된다. 같은 날 첫 숙소로 다시 옮겼는데 이곳은 캡슐식으로 본인 자리에서 커튼을 치면 주변과 분리되는 곳이었다. 하루를 통째로 쉬려고 커튼 뒤에서 꼼지락대고 있는데 어떤 한 여자가 다른 여자 여행객에게 이 방에 혹시 남자가 있냐고, 남자가 있으면 위험한 것 아니냐고 망발을 내뱉는다. 본인이 혼성 도미토리가 싫으면 여성 숙소를 예약할 것이지 왜 굳이 여기로 들어와서 듣는 남자 기분 나쁘게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 피해망상도 병이다. 이럴 때마다 정말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다.



대충 페낭 섬에서 볼 건 다 본 만큼 남은 3일은 식사, 산책 시원한 숙소에서의 휴식을 반복했다. 말레이시아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페낭은 대충만 검색해서 찾아가도 정말 싸고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세끼 밥만 챙겨 먹고 조금씩 산책만 해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계산실수 환전을 많이 해버려서 돈을 쓰려고 해도 하루에 식비로 15000원 이상 쓰기가 힘들었다. 어느덧 말레이시아의 마지막 날이 되고 바닷가에서 일몰을 보니 정말 오랜만에 한 나라를 떠나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특히 페낭에서의 유유자적은 너무 만족스러워서 남들이 한 달 살기를 어떤 재미로 하는 건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심리적으로 여유로워진 것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정말 매력적인 도시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의외의 발견이었던 말레이시아를 뒤로 하고 방콕을 거쳐 라오스에서 세계여행을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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