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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Feb 23. 2024

[세계여행] D+235 라오스

자연스럽게 열정이 사그라들며 8개월의 세계여행을 마무리하다

마침내 세계여행의 종착지인 라오스에 도착했다. 동남아 국가들을 여행하려면 국가별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유럽인들과는 달리 한국과 일본인은 무비자로 라오스 입국이 가능해서 기내에서 간단한 입국신고서만 작성한 후 빠르게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유심은 확실히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저렴했고 공항 환전소에서 남아있는 태국 돈도 처리할 수 있었다. 공식 환전소임에도 구글에 나오는 공식 환율보다 훨씬 높은 환율을 적용해 주는 게 어떤 이유인지 궁금했다. 달러는 공식환율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집트나 볼리비아와 비슷하게 라오스도 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암환율로 10% 정도 높은 가격에 거래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본격적인 환전은 나중에 시내 금은방에서 진행했다. 루앙프라방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없어 공항에서 여럿이 타는 미니밴을 이용해야 했는데 밖을 살펴보려다 운전기사에게 잡혀버렸다. 공항 건물 내 사무실에 부착되어 있던 가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가격을 물었을 때 대답하는 속도가 애매했던 걸 봐서 분명히 정가보다 조금 더 부른 것 같긴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고작 몇백 원 차이일 금액이라 그냥 탑승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있는 상태라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바로 앞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동남아로 넘어온 이후 사람들이 너무 귀찮아져서 몇 주동안 계속 혼자 다니고 마주치는 사람들과는 정말 가끔 짧은 대화만을 나눴는데 합석한 미국인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식사를 하며 제법 길게 얘기를 나눴다. 그래도 여전히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하고 길어지는 대답을 집중하는 척 듣는 게 귀찮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식사 후에는 메인 도로에 서는 야시장을 구경했다. 길에서는 주로 옷가지나 수공예 기념품을 팔았고 길 끝쪽에는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많았다. 딱히 인상적인 부분은 없었고 이곳 역시 작은 마을이 관광객들로 지나치게 포화된 인상을 주었다. 메인 거리를 벗어난 바깥쪽은 그나마 조금 조용한 것 같았지만 너무 어두워서 다음날 돌아보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첫날 도시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던 건 상대적으로 빈국이다 보니 말레이시아, 태국과는 달리 스리랑카 수준으로 현저하게 떨어진 와이파이와 데이터의 속도였다.


태국에서 왼쪽 발목의 상처가 악화된 이후 라오스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붓기가 생기고 통증까지 있어서 꽤나 고생을 했다. 뒤늦게 소독약과 연고를 사서 바르고 샤워를 할 때에도 물이 닿지 않게 신경을 썼지만 상처가 이미 너무 커져버린 상태라 딱히 차도는 없었다. 일어날 때같이 갑자기 피가 쏠릴 때에 압통이 심했고 걸어 다닐 때도 가끔 통증이 느껴져서 평소의 활동량보다는 조금 덜 돌아다니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점심에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꽝시폭포를 가기 전에 환전을 하고 마을을 돌아보았다. 동남아 중에서 그나마 라오스를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는 태국이나 베트남보다 볼거리는 적을지 몰라도 관광객이 덜한 조용한 분위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낮에 본 루앙프라방도 너무 많은 관광객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을의 모습이었다. 메콩강 뷰는 생각보다 별로였고 구시가지에 넘치는 사원들도 이미 방콕에서 너무 큰 스케일의 사원들을 보고 온 뒤라 가장 유명한 것 같은 왓시앙텅 사원에만 잠시 들어갔다. 관광객이 없으면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을 것도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이른 점심을 먹고 투어밴에 탑승해서 거의 1시간을 달려 꽝시폭포로 이동했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반달가슴곰들이 살고 있는 보호소를 지나면 폭포를 따라 짧은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풍경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멕시코에서 방문했던 똘란똥꼬와 약간 비슷하면서 못한 느낌이라 엄청 신선하거나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장 큰 폭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등산로를 통해 폭포의 맨 윗부분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데 정비가 잘 되어있지 않아 꽤나 미끄럽고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데 비해 정상에서의 전망이 탁 트여있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다. 



약 두 시간가량의 폭포구경을 마치고 다시 미니밴을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돌아왔다. 투어밴에는 한국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정체를 숨기고 있었지만 기사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국적이 들통나버렸다. 오후에는 푸시산 전망대에 올라갔다. 오전에 밑에서 걸어 다닐 때는 마을이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높은 곳에서 보니 낮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마을의 전경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렇지만 역시 더 이상 볼거리는 없어서 남은 시간 크게 무리하지 않고 식사 후 휴식을 취했다.



지도상으로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 간 거리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아서 이동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전날 기차표를 예매하려니 많은 관광객 탓에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미니밴으로 이동하는 방법뿐인데 가격도 기차보다 비싸고 시간은 두 배 이상 걸렸다. 또 밴을 꽉 채워서 가다 보니 운이 나쁘게도 등받이가 없는 자리에 걸려서 더위와 불편한 자세를 5-6시간 동안 견디며 이동해야 했다. 훨씬 긴 장거리 이동도 밥먹듯이 했지만 이렇게 힘든 이동은 오랜만이었다. 방비엥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였고 원래는 강에서 일몰시간 때 보트를 타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루앙프라방에서부터 같이 내려온 폴란드 사람과 외곽으로 걸어 나가 일몰을 보며 떠들게 되었다. 틈틈이 일을 하면서 거의 10년 가까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 친구와도 주로 동남아에서 볼 수 있는 무례한 관광객 얘기를 했다. 이 친구는 관광객들이 무례한 건 근본적으로 현지인들을 깔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남아에서 늘 마주해야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현지인들 때문에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화가 나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들의 소득구조를 망쳐놓는 관광업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농사를 짓는 것보다 잘 모르는 관광객들에게 버스티켓을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면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편법을 모른척하기는 쉽지 않다. 또 관광객들이 본인들의 화를 동남아에서만 유독 무례함으로 표출하는 건 기본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고 비교적 천성이 순한 동남아인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유럽이나 동아시아 관광객이 스위스 같은 나라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선 넘는 무례함을 보이는 사례는 현저히 적지 않은가.



방비엥은 몇 년 전 한 티비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로 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롯데리아나 한식당들이 그동안 가본 어느 곳보다 많이 보였고 '라오스걸 항시 대기'라는 역겨운 말이 한글로 적혀있는 노래방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방비엥 근교에 아름다운 색깔의 물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블루라군들이 특히 유명한데 거리가 꽤 있고 꽝시폭포보다 못하다는 말도 많아서 스킵하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먼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탐짱동굴에 갔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굉장히 습하면서 내부에 흐르는 물로 인해 살아있는 것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동굴들과는 다르게 건조한 게 죽은 동굴의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동굴 내부에 출입금지구역이라고 적혀있는 선을 당당히 넘어가는 백인 관광객들이 또다시 보인다. 별로 볼 건 없었지만 시원한 그늘에 들어온 김에 앉아서 쉬어가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식사를 하고 강가로 내려가 30분간 강을 둘러볼 있는 롱보트를 탔다. 원래는 일몰시간대에 타는 게 일반적인데 전날 보니 보트가 너무 많아서 시끄러웠기에 아무도 없는 한낮에 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마을에서 멀리 조용한 구간까지 배가 나갔고 물소 떼까지 있어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보트까지 타고나니 방비엥에서도 할 게 없고 염증도 붓기가 많이 올라와 걷는 게 불편해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길었던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한국행 비행기가 출발하는 비엔티안이 되었다. 많은 국가들의 수도들 중 가장 조용하고 볼거리가 없다는 걸로 유명한 곳인데 정말 소도시 같은 인상이었지만 오히려 관광객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루앙프라방이나 방비엥과는 달리 정말 현지인들이 생활하는 곳 같아서 라오스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비엔티안에 머무르는 3일 내내 날씨가 정말 더웠지만 늘 그랬듯 뚜벅이로 강변 야시장, 시내, 개선문, 내부는 거의 비어있는 쇼핑몰 등을 돌아봤다. 나름 공산국가라고 라오스 곳곳에 깃발 옆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공산주의기가 같이 걸려있는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경제체제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은 이후 여행보다 대학원 생활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고 동남아가 예상과 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여행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남미에 더 오래 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이쯤 되니 여행을 미련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엔티안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는 거의 한국사람들만 탑승하는데 워낙 성격들이 급하다 보니 체크인, 짐검사, 비행기 탑승까지 모두가 일사불란하고 빠르게 진행한다. 느릿느릿하면서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 카운터 직원들과 실랑이하느라 뒷사람들을 한없이 기다리게 만드는 외국인들만 보다가 빠릿빠릿한 한국인들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8개월 만에 밟는 한국 땅이지만 늘 그렇듯 어제 온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다시 돌아온 건 혐오스럽다. 추운 날씨에 돌아오자마자 감기에 걸렸고 다리의 염증은 쉽게 낫지 않고 있다. 돌아오고 이틀이 지나 귀신같이 예비군에서 전화가 왔다. 곧 일상이었던 여행이 다시 특별해지겠지만 일단 지금은 휴식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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