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감상문과 해석 사이
엄마와 함께 영화를 한 번 더 감상한 후에 이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SNS-아마도 트위터-에서 '이 영화를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야말로 조부 투파키 짓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보고 마음을 접고 글을 썼다. 해석이라기엔 난삽하고, 그저 좋았던 점과 추측을 공유하는 글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21세기 정보과부하의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어디선가 비슷한 정보를 보았을 수 있다. 한 작품을 관람한 후 누군가와 해석이 겹친다는 것은 같은 지평에서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는 뜻인 것 같아 기껍다. 모든 사진자료의 출처는 다음영화이다. 이 글로 어떠한 수익창출도 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언질 주시기를.
본문은 22.10.12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거대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원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나지 않음'이다. 시작 장면을 떠올려보자. 원형의 거울로 비춰지는, 노래하는 에블린 가족. 카메라는 빠져들듯이 원형의 거울로 들어간다. 정겨워 보이던 시간은 눈 깜박할 순간에 아무도 없는 집으로 바뀐다. 카메라가 거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면, 마치 거울 반대편 세상에서 나오듯 세금조사에 제출할 영수증에 둘러싸인 에블린을 잡는다. (개인적으로 <유전>의 오프닝 장면 촬영방식이 떠올랐다.) 에블린에게는 표면적으로-그가 아는 경우-2개의 이벤트가 겹쳐있다. 세탁소에서 열기로 한 신년축하 파티와 세금조사. 그런데 점차 이벤트가 마치 국수 면발처럼 불어난다. 귀찮게 하던 남편은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사이가 언제 이렇게 틀어졌는지 모를 레즈비언 딸은 신년축하파티에-어쩌면 아버지를 뒷목 잡게 할 지도 모를-여자친구를 데려온다. 이것만 해도 좋았을 것이다-아마도-. 그러나 운명은 에블린을 가만두지 않는다. '평범한 세탁소 주인인 내가 우주를 구할 용사?!' 전형적인 모험형 플롯의 시작이다. 이 모든 일이 카메라가 거울로 들어간-혹은 나온-후에 벌어졌다. 거울에 맺힌 상처럼, 세상이 반전되었다는 암시일 수 있다. (이건 정말 <미드소마> 같다. 공교롭게도, 언급된 작품 모두 같은 제작사-A24-이다.)
이후 가장 대조를 이루는 '원형'의 이미지는 베이글-눈알이다. 세상의 멸망을 가져올 블랙홀 같은 것이 사실은 모든 것을 얹은 '베이글'이다. 이 얼마나 동그란가. 참깨까지 얹었다는 조부 투파키의 코멘트를 듣고나면 맥도날드 송을 들은 듯 배가 고파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봐도 세계 멸망을 가져올 만큼 뾰족하거나 거칠거나 흉악해보이지는 않는 것. 더구나 미국에서 전 생애를 보내고 있는 조이가 일상적으로 접했을 그것.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멸망과 허무는 가장 일상적인 것 부터, 그 위로 모든 것-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던졌을 때 찾아온다. 베이글만큼은 아니지만 위험한 까만 원이라면 또 있다.
세금 조사원 디어드리가 영수증에 마구 친 이 동그라미. 노래방 기계를 비롯한 에블린의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더구나 '취미'라고 소개했으니 더욱 개인적인-를 탈세 혐의라는 틀에 납작하게 가둬버리는 이 동그라미.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동그라미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 영화는 거울 같은 원형의 이미지를 통해 바라보는 몰이해-이해/폭력-친절의 전복에 관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제쯤 세상의 멸망을 가져온다는 '그것'이 왜 동그란 베이글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왜 뾰족하거나 거칠거나 흉악해보이지 않는지. 답은 베이글의 목적이 '세계 멸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파 웨이먼드가 틀렸다. 조부 투파키는 행위의 목적이 세계 멸망보다는 자살에 가까운 허무주의 빌런이다. 허무주의는 어느 책-생각이 나면 각주를 달아두겠다-에서 말하듯, '다수의 선택지 중 어느것도 더 낫지 않다'는 믿음이다. 삶과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는 믿음을 가진 인물이 조부 투파키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글'은 굳이 흉포한 모양새를 가질 이유가 없다. 목을 걸 올가미처럼, 혹은 무언가를 빨아들일 블랙홀처럼 그저 내부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 듯 보이기만 하면 된다.
허무한 죽음을 눈 앞에 둔 조부 투파키는 시시각각 바뀌는 매 분장 마다 우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언뜻보면 화려하고, 이렇게 보면 유아적이고, 또 달리 본다면 짜깁기한 옷을 입은 듯한 그의 얼굴은 반짝이가 적시고 있거나 블러셔가 울 때 얼굴에 몰리는 열을 표현한다. 그는 우는 얼굴로, 자신의 허무주의를 이해할 에블린을 찾고 있다. 전 우주를 돌아다니고, 적합하지 않은 에블린을 죽이면서까지. 그럼 조부 투파키는 왜 허무주의에 빠졌는가? 알파 에블린 때문이다. (이쯤되면 알파우주의 정신상태가 의심된다.) 조부 투파키는 알파 조이이고, 알파 에블린과는 최소 사제관계 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중 우주의 가능성을 빌려와 최고의 삶을 만들겠다는 알파 에블린의 욕심이 가장 가능성 있는 제자인 알파 조이를 몰아붙여 조부 투파키로 만들었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순간,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며 다중 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다 섭렵했다. 말하자면, 끝을 보았기 때문에 더는 남은 게 없는 인물이다. 이는 정확히 이 우주의 에블린-실패만 하여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최악의 에블린-과 반대이다.
모든 가능성을 전부 경험한 자와 어떤 가능성도 경험하지 못한 자. 양 극단에 있는 두 인물은 허무주의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까? 조부 투파키는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악의 에블린을 만나 베이글을 보여주자 그는 일정부분 동화된다. 심지어 여러 차례 엉터리 버스점프로 우주에 조각조각 존재함을 경험한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처럼 폭력적인 행동-최악의 웨이먼드를 찌른 것-을 보이기도 한다. 이대로 가다간 최악의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는 나란히 손 잡고 베이글로 들어가고 영화는 끝이난다.
그러나 조부 투파키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이 우주의 에블린은 자신이 최악의 에블린이라는 것을 알아도 허무주의에 포섭되지 않는다. 에블린이 최악의 에블린이 된 이유는 그가 최초의 분기점에서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쿵푸 고수가 되어 헐리우드에 진출했거나, 눈을 잃고 명창이 되었거나, 피자가게 홍보에 힘쓰는 원반 돌리기 마스터 혹은 칼질이 화려한 요리사가 되었겠지만 에블린은 사랑을 선택했고 이 모든 것들을 '취미'라는 이름의 가능성으로 남긴 채 최악의 삶을 살게 되었다. 에블린이 알파 웨이먼드의 말처럼 어떤 대단한 의지나 사명감으로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최악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에블린의 '특기'가 사랑이었으리라. 에블린은 알파 아버지 (아니 글쎄 알파우주 이상하다니까) 가 쥐어준 칼을 들고도 악의 화신-딸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딸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처단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특기가 사랑인 에블린은 공자가 설파한 인(仁)을 행한다. 인(仁)은 파자하면 두(二) 사람(人)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친애하고 협력해야 인간된 도리를 한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의 단서는 역지사지 즉, '남을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를 처단하고 가족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조부 투파키가 되어보기로-최대한 근사치에라도 접근하기로-마음 먹는다. 그리고 조부 투파키가 되어보는 과정을 통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잠시 잊었던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은 해결사처럼 나타나 에블린의 마음을 빼앗았던 듬직한 알파 웨이먼드가 아니라 한심하고 유약한 이 우주의 웨이먼드이다. 다들 혼란스러운 것을 알고있고, 그것이 제 잘못 같지만 서로에게 조금만 친절하자고 말하는 웨이먼드를 통해 에블린은 잠시 잊었던 사랑을 다시금 생각하며 이마에 눈알 스티커를 붙인다. 마지막 전투의 형태도 역시 사랑이다. 딸인 조부 투파키-이자 조이-를 사랑한 마음은 확장되어 에블린은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인물의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충족시켜주며 문제를 해결한다.
마지막 전투와 동시에 많은 우주에서의 에블린도 '역지사지'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돌' 장면이다. 돌이 되니 아무것도 행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조부 투파키에게 에블린이 세계의 물리법칙을 어기고 다가가는 힘은 사랑이다. 조부 투파키가 거부하며 뛰어내리자, 에블린은 끌어올리는 대신 함께 뛰어내리기를 택한다. "I'm gonna get you!"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술래잡기 할 때 주로 하는 말이다. 이는 어린 에블린이 뛰어다니자 뛰지 말라 윽박 질렀던 아버지와 달리, 어린 조이가 빨래방을 뛰어다닐 때 에블린은 윽박지르지 않고 함께 뛰며 술래잡기를 했음을 보여준다. 역지사지란 '남을 나처럼 생각하는 것'. 그러므로 내가 받았던 상처를 되물림하지 않는 것.
인이니 역지사지니 하는 동양적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좀 더 나아가볼까 한다. 영화가 포착한 사랑에 관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옷깃만 스쳐도 사랑'과 '사랑의 기회비용'이 되겠다. 조이가 레즈비언인 것을 이해한다고 했으나 사실 도통 받아들이지 못한 에블린이 레즈비언인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추후 에블린이 조이를 정말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는 물론 인류 진화의 분기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손가락이 핫도그인 종족이 승리해야 할 만큼 어렵고 말도 안되는 우주이지만, 어쨌든 존재한다. 심지어 이 우주에서 에블린의 상대는 세금 조사원 디어드리이다.
이 장면을 보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비록 옷깃만 스쳤을지라도, 인연(접점)이 있다면 그건 어느 우주에서든 사랑으로 개화한다. 다만 사랑의 형태가 다양한 것 뿐. 어느 우주에서는 디어드리와 에블린이 연인이고, 이 우주에서는 비슷한 삶의 문제-디어드리의 경우 사별-을 겪고 있는 동지이나 결국 서로를 자신과 같이 이해하고 끝내 포옹한다는 지점에서 이는 인(仁) 즉,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의 기회비용'은 쿵푸 마스터가 된 에블린이 헐리우드에서 재회한 웨이먼드와 나누는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화양연화 우주-공식에서 화양연화 포스터를 오마주했으므로 화양연화 우주라고 하겠다-는 에블린과 웨이먼드 모두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우주이다. 둘은 화려한 파티 이후 골목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 대화의 요지는 '우리가 사랑을 선택했다면'이다. 어쩌면 영화에서 보여준 여러 우주 중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사회적 성공을 거둔 유일한 우주라고 볼 수 있는데, 성공한 둘은 정작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금도 내는 삶-많은 경우의 수에서 실패한 최악의 삶-을 꿈꾼다. 이는 기회비용을 아쉬워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기회비용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으로 인해 포기해야하는 가치를 비용으로 환산한 것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사랑과 사회적 성공은 저울에 올라간다. 당연히 사랑이 더 무겁다. 화양연화 우주의 둘은 최악의 삶을 선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최악의 우주의 둘은 많은 삶의 문제가 있지만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이 우주 안에서 해결-이혼을 고려하거나, 세금 조사를 완수하려 하는 등-하려 할 뿐. 삶의 문제도 당연히, 사랑으로 해결된다. 동양인을 핍박하는 것 같던 디어드리와 서로를 이해하고, 한심하고 유약한 웨이먼드와 함께 친절해지는 방향으로. 골칫거리이던 조이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솔직해지는 방향으로. 다만,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