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도 어김없이 저물어간다.
얼음 팍팍 넣은 아이스커피만 찾던 나도, 언제부턴가 따뜻한 라떼를 찾고 있었다. 추운 날씨지만 마음만은 더 따뜻해지길 바라는 연말이 됐다.
12월 어느 날, 한 지역 단체의 송년회에 가게 되었다.
영향력이 있는 단체라 그런지, 높은 지위의 공인들이 많이 참석했었다.
그중, 그 지역에서 -속칭- 가장 높은 분이 있었다. 그 지역의 구청장님이었다. 성대한 소개와 환호로 그분의 축사는 시작됐다. 연말을 맞아 고생한 사람들을 격려한 후, 본론으로 넘어가셨다.
" 우리 구는 최근 몇 년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이제 강의 남쪽이 아닌, 명실상부한 강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정치인 연설의 본론이야, 본인의 치적임이 당연할 것인데... 내가 높은 분들의 높은 식견, 그리고 따뜻한 식견을 기대해서일까. 그분의 언어는 추위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강남이란 도시는 그에게 어떤 면에서 1등이었다.
다른 도시는 그 1등을 쫓아가야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만의 동네에서 오랜 세월 쌓아가는 고유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1등을 향한 경쟁과 우월감이 느껴졌다.
부동산 투자에 있어 흔히 말하는 상급지란 단어가 있다. 사는 동네에도 상하관계가 있다는 씁쓸한 단어였다.
부동산 커뮤니티에선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좋은 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다른 동네의 아파트는 비하하는 글이 많았다.
남의 동네를 깎아내려야 나의 등수가 올라가는 걸까? 그런 글과 댓글에서 보이는 자기 우월과 상대 비하에선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다.
높은 분들은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어 주길 바랐던 나의 마음은 공허한 것이었다.
" 그리고 우리 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OO동은 재개발이 완료되어 35층의 아파트들이 마천루를 이루고 있습니다. OO동은 이제 재개발 촉진지구로 지정되어 낡은 구도심에서 완전히 새로운 아파트 대단지로 변신하게 될 것입니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곳은 재개발 사업설명회는 아니었다. 송년회 자리가 맞았다.
그분의 축사는 개발에서 시작하여 개발로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동네의 모든 곳은 재개발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곳을 헐어버리고 있었다. 어떤 이슈의 설문에도 나오지 않을 90% 의 동의율이 재개발 동의에선 나오고 있었다. 또 그것을 아파트 벽면에 자랑스레 홍보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동의율이라면 재개발은 선택이 아닌, 선과 악의 문제 같았다.
선이라 여겨지는 재개발의 가치와 구청장님의 추진력은 또 하나의 멋진 빌딩 도시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 빌딩들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알파벳 신조어 이름이 붙여질 거라 생각했다.
"에.. 또 하나 얘기드리자면 우리 지역 보건소의 평가가 1등입니다. 서비스, 시설, 인력부문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주거와 보건 부문에서 지금처럼 발전시켜서 최고의 명품도시를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훌륭한 보건소의 소식에 아픈 사람의 이야기는 없었다. 평가와 등수만이 있었다. 공공기관의 등수란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정하는 것일까.
이미 줄 세우기로 가득 찬 세상에 보건소의 등수까지 매길 필요가 있을까. 공공의 선이란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명품도시. 분명 좋은 뜻일 것이다.
명품은 이 사회에 좋다는 뜻의 대명사이니까.
아니, 그래서 더 씁쓸했다.
가치가 아닌 물건이, 싼 것이 아닌 비싼 것이,
내 것이 아닌 남들이 좋다는 게, 좋은 것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구청장님의 연설은 모두의 박수를 배경으로 마무리 됐다. 송년회에서 흔히 듣게 될, 흠 없는 달변의 연설이었다. 그 속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연설 속 문장들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구청장님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표가 구청장의 자리를 있게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거울과 다름없었다.
하루 매출을 확인하며, 이해타산을 따진 후 병원을 나왔던 나였다. 송년회에서 다시 우리의 욕망을 마주하고는 뭔가 불편해진 마음에 자리를 일찍 빠져나왔다.
12월의 찬 공기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그곳은 이 동네에서 가장 화려한 사거리였다. 이곳 번화가의 아파트와 빌딩은 높고 멋있었다.
연말을 맞아 나무에 걸린 수많은 불빛 조명이 화려했다.
내년 연말의 조명은 더 화려해지고, 빌딩은 더 높아질 거라 생각했다.
나무를 휘감은 수많은 불빛에 나무는 너무 아프지 않기를, 더 높아진 빌딩이 만든 그늘은 너무 깊어지지 않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