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평일을 보낸 후 맞는 어느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이번 주말엔 내년에 7살이 되는 아들에게 방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던 방을 아들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기엔 나름의 결심이 필요했다. 꽉 찬 살림 속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건, 무언가를 비워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필요 없는 살림을 버리려고 생각하니 아내에게 보일 눈치와, 맘대로 치웠다고 서럽게 곡소리를 낼 아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결국 내 뜻대로 버릴 수 있는 건 내 살림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들 방 만들기 프로젝트는 결국 내 살림 치우기 프로젝트가 되었다.
내 살림 중 가장 큰 부피를 갖는 것은 의학 원서들이었다. 의대생과 레지던트였던 시절, 배게보다 두꺼운 의학원서들의 존재 의미는 무엇보다 '폼'이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그 여러 과목의 교과서 하나씩은 모두 구비해놔야 한다고.. 철없던 나는 그렇게 호기를 부렸었다.
하지만 오늘 열어본 원서들에 밑줄 친 흔적은 음.. 1/100 아니 1/1000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의사 면허증을 만들어준 것은 교과서가 아닌,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기출 내용, 소위 족보라는 것이었다.
졸업을 하고 의사가 된 후에도, 원서를 보지 않을 나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장식품이 된 원서들을 책꽂이에 꽂아놨었다. 아직은 폼이 났으니까...!
아들의 방을 만들어주려 오랜만에 살림을 정리하는 오늘, 나는 스스럼없이 원서들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버릴 준비를 했다. 얼마 전까지 보지도 않을 원서를 가지고 망설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예전의 원서는 나에게 의사로서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병을 치료하는 임상의사라는 직업은 철저히 교과서에 따르는 직업이었다. 의과대학에서는 얼마나 교과서를 잘 숙지하고, 잘 기억하고, 그것을 환자에게 얼마나 그대로 적용하는지가 평가의 척도였다.
그래서 교과서는 설령 보지 않더라도 의사로서 갖고 있어야 하는 기준 같은 것이었다.
오늘 나는, 그런 의미의 원서들을 홀가분히 재활용 수거함으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의사란 직업은 온전히 내가 선택한 직업은 아니었다. 사회가 인정하던, 부모의 기대에 충족하던, 내 미래에 안정을 주는 그런 직업을 갖기 위해 그저 달려왔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40대를 관통하며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두꺼운 원서들을 노끈으로 묶는 작업,
그것은 내가 앞으로 맞이할 인생엔 스스로 고른 책들로 책장을 채워보겠다는 다짐이었다. 줏대 없는 내 인생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보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또렷이 중요한 일은 아들의 자리를 위해 내 것을 비워주는 일이었다.
사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한 없는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그 막연한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망망대해의 자유는 오히려 도피하고 싶어지는, 그저 나약하고 평범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그런 것일 거다.
모두가 좋다는 것을 쫓는 평범한 일상에, 가끔은 나만의 취향이 있기를.
모든 일에 이익을 따지는 마음속의 계산기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일상에, 가끔은 멈춰 서서 생각하는 대로 사는 시간도 있기를..
그저 그런 것일 테다.
여러 권을 묶어서 벽돌같이 무거워진 원서 더미를 재활용 수거함으로 몇 번에 걸쳐 날랐다. 역시나 허리가 아팠다.
재활용 수거함에 넣기 전, 책들을 쓱 훑어보았다.
군데군데 문장 위에 그어진 형광펜들이 내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은 절반의 삶은 누가 써놓은 문장을 따라 줄을 치기보단, 나만의 문장을 직접 써 내려가 볼 거라 다짐했다.
그리고 원서들을 재활용 수거함에 던져 보냈다.
오늘 밤에 동창들과 오랜만의 모임이 있었다.
친구들과 몇 년 만의 재회였지만 오늘은 왠지 나가고 싶지 않아 졌다.
"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나가겠다. 친구들~ 좋은 시간 보내길~"
문자를 보내고, 화장실 욕조에 물을 받았다.
원서 꾸러미를 옮기느라 수고한 나의 허리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파란색 입욕제와 오리 장난감을 욕조 위에 띄우고 아들을 불렀다.
오늘 밤 내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나만의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