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눈 온 뒤 창경궁

by 조명찬


화요일.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수요일까지 폭설이 온다고 한다. 예정대로 내일까지 눈이 온다면 아침 일찍 나서 창경궁을 가려고 한다. 눈이 듬뿍 쌓인 고궁의 회랑이 갑자기 걷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전에 눈이 내린 고궁의 회랑을 걸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눈이 펑펑 내리면 걷고 싶은 곳을 생각하다 보니 창경궁이 떠올랐다.


새해 들어 매주 수요일은 오직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회사를 관두고 시작한 자영업은 나를 좁은 매장 안에 가두었다. 4년이 지난 어느 날,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숨이 턱 막혔다. 더 이상 나의 작은 공간이 사랑스럽지 않았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지 않는 공간에서 손님을 받는 건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당장 그만두지는 못하니 대책이 필요했다. 일단 걷기로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걷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영업은 아르바이트.

수요일은 그런 날이 될 것이다. 걷는 게 직업이 되는 날. 아내에게 내 생각을 얘기하니 나 보다도 기뻐하는 눈치다. 자영업을 하며 답답해하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잠에 들기 전, 내일 아침 일찍 나설 생각에 설레었다. 그동안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내일이면 여행자가 된다.




수요일.


요즘 가장 즐겨 메는 cayl 배낭에 책 한 권과 스탠리보온병을 넣었다. 반나절의 짧은 시간이지만 여행자는 모름지기 배낭을 메야한다. 배낭에 넣을 게 아무것도 없어도 무엇을 채우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배낭은 필수다. 눈이 내렸으니 블런드스톤 부츠를 신었다. 여행 갈 때 자주 신어서 그런지 이 부츠를 신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여행기분이 난다.

신도림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탔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 혜화역에서 내려 창경궁까지 걸어갈 예정.


직장인들의 출퇴근이 끝난 9시 반의 1호선은 앉을자리도 여유가 있다. 이동하거나 쉴 때 읽으려고 챙긴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를 펼쳤다. 몇 정거장 안되니 책을 꺼낼지 말지 고민했지만 평소처럼 유튜브 숏츠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기가 싫었다.

시니컬하고 고집 센 것처럼 보이다가 따뜻하고 여유 넘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속마음을 읽다 보니 어느새 빠져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무원의 역 안내 멘트가 크게 들렸다.


-이번 열차는 한양대. 한양대역입니다


한양대? 어. 엥? 한양대면 지나쳐온 건데?

잠시 생각하다가 문이 닫히려는 찰나 가까스로 열차에서 빠져나왔다. (평소에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미리 준비하지 않고 왜 저러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지하철 어플을 눌러 역을 확인했다. 다섯 정거장이나 지나쳤다. 기분이 괜찮았다. 책에 집중했다는 거니까.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조금 돌아가면 어때?


혼자 하는 여행은 그래서 좋다.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큰길을 따라가다가 좌회전하면 창경궁에 금방 도착하지만 학림다방 쪽으로 뒤돌아 걸었다. 학림다방에서 모닝커피를 마셔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시작부터 앉아서 시간을 보내긴 싫었다.

학림다방 건물을 돌아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굳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는 아직 있나 확인해보고 싶은 가게가 한 곳 있어서다. 대학로에서 한창 술을 마시던 15년 전, 이 골목에는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두부전골집이 있었다. 층이 낮은 1층짜리 주택을 개조한 집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가끔 술을 마셨다. 전골하나만 주문하면 술을 시킬 때마다 안주가 조금씩 따라 나왔는데 지금 흔한 말로는 '오마카세'라고 할 수 있겠다.

단점은 술을 시키면 내주시는 안주가 자꾸 남아 술을 또 시키고 그러면 안주가 또 나와서 결국 술이 떡이 되게 마시게 되어 맨 정신으로 그곳을 나온 적이 없다는 것.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그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다. 모두 시끄러웠고 모두 배가 불렀고 모두 취해 있었다.

무척이나 추웠던 날, 함께 술을 마시던 형이 벗어 놓은 가죽점퍼를 다른 사람이 입고 가서 남자 둘이 덜덜덜 떨며 꼭 안고 대학로 거리를 배회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점퍼를 훔쳐 갔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취해서 잘못 입고 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화가 나고 괘씸하기는커녕 이 추위에 덜덜 떨게 된 우리의 처지를 보면서 낄낄대고 웃으며 추워서 술 다 깼으니 한잔만 더 하자며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직 그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대학로에 오면서 몇 번이나 생각이 났지만 이상하게 골목으로 들어올 기회가 없었다. 가지가 많지 않은 심플한 골목이라 그 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연히 그 집은 이미 없었다. 예상했어서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아마 그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리라... 15년 전에도 이미 70 중반은 넘어 보이셨으니.


골목을 조금 천천히 겉돌았다. 또 이곳을 올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한 때 나는 이 골목에서 울분을 쏟아내고 크게 웃고 친구와 싸우다가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잡고 걸었다. 추억이 확실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골목


작은 골목을 나와 주택가를 지나 큰길로 나오니 창경궁의 홍화문이 보였다.

입장권을 사서 궁에 들어섰다. 어제 내린 눈이 오늘 새벽에 내린 눈처럼 아직 단단하게 쌓여있다.

회랑을 걸었다. 창경궁의 회랑은 경복궁의 그것보다는 짧다. 왜 눈이 내린 회랑을 떠올렸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울을 걷는다 치면 궁이 먼저 생각나고 봄과 가을에는 자주 걸어봤지만 겨울에는 그러지 못해서였을까?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이곳을 오기 싶었던 이유를 생각하며 이곳을 걸으니 특별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와 있는 것이 중요했다.

창경궁을 지나 작은 문을 통과하니 다시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오른쪽 끝에 있는 대온실을 향해 걸었다. 나름 따뜻하게 입고 나왔어도 걷다 보니 조금 추웠다. 작은 식물을 키우고 있는 대온실을 가본 적은 없었다. 다만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통창의 흰 건물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눈이 단단하게 내린 창경궁
창경궁 대온실

대온실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작은 규모라 실망이 앞섰다. 식물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규모다. 분재 모으기를 좋아하는 돈 많은 할아버지의 정원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정할지도.

의자가 있어 잠시 앉았다. 몇몇 의자에는 중년의 여성분들이 앉아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재에는 각각의 이름표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모르는 것이다. 이걸 다 이름을 짓고 구분하는 것도 대단하다. 처음 들어보는 분재 사이로 멀리 익숙한 꽃봉오리가 보였다. 저건 틀림없이 그것이다.

동백! 드디어 아는 식물이 하나 보였다. 친하지 않은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밥을 함께 먹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반갑다 보니 동백이 새로 보였다. 자세히 살폈다. 이렇게까지 동백을 가까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악수라도 청하고 싶었던 동백꽃

들어왔었던 홍화문으로 나와 원남동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율곡터널을 지났다. 꽤 긴 도보용 터널을 걷다 보니 대낮인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긴 터널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도 여자 혼자 걷기에는 조금 위험해 보인다. 밤이면 더하겠지.

지금까지 궁 안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터널을 지나 펼쳐진 빌딩들이 새롭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옛 공간 사옥. 그 자리에 아라리오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기사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진한 회색 벽돌에 양각으로 붙은 '空間'이라는 한자가 주는 상징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져서 아쉽다. 큰길로 걷기가 싫어서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현대건설 뒤편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좋아한다.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되는 이 길은 북촌로라 하는데 나는 계동길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런던베이글뮤지엄'으로 가는 길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정확한 명칭은 있겠으나 길 이름은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걸로 계속 변한다.


북촌로를 끝까지 따라 걸으니 경복궁 담장이 나왔다. 광화문을 지나 서촌으로 향했다. 배가 슬슬 고파왔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하필이면 직장인들이 한창 점심 식사를 할 때다. 12시~1시 사이에 혼밥을 반기는 식당은 많지 않다. 잘 정해서 들어가야 한다. 칸다소바로 갔다. 거기는 혼자여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추운 날이지만 줄이 꽤 서있다. 직원이 입장까지 20분 걸린다고 했다. 여기저기 기웃할 바에 기다리는 편이 낫다. 미리 주문을 한다. 칸다소바에서는 으레 마제소바를 먹지만 날이 춥기도 하고 새로 출시된 메뉴라고 하니 돈코츠라멘을 주문했다. 당연히 생맥주 한잔은 필수!


기다리는 동안 조금 고민 됐다. 그냥 마제소바를 먹을 거 그랬나? 아니 그래도 새로운 걸 먹어보자. 그런데 맛없으면 어떡해? 이걸로 오늘 하루를 망치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여긴 잘하니깐 돈코츠라멘도 기본 이상은 하겠지. 그냥 밥 한 끼인데 왜 그렇게 고민됐는지….

수요일 걷기 여행의 첫끼니까 더 그랬을 것이다.


내 차례가 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점퍼를 벗어 벽면에 붙어 있는 옷걸이에 옷과 가방을 걸었다. 홀가분하게 먹고 싶었다. 나보다 5분 정도 먼저 들어간 손님의 옆 자리로 안내되었다. 30대 남자였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인근의 직장인일 것이다. 그는 아직 라멘을 받지 못했다. 나의 라멘도 조금 걸릴 것이다. 맥주가 먼저 앞에 놓였다. 레드락! 붉은기가 도는 맥주다. 밑반찬으로 내어놓은 우엉을 조금 덜어 맥주부터 한잔 마셨다. 그 시간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듯했다. 딱 한잔만 마시면 되니깐 평소보다 조금 아껴 마셨다. 추운 날이니 따뜻한 정종이 있다면 근사 했겠지만 꽤 걸어서 그런지 오늘은 시원한 맥주가 더 좋았다. (어차피 정종은 메뉴에 있지도 않다.)

옆에 앉은 남자가 흘끔흘끔 보는 것만 같다. 대낮에 마시는 맥주 한 모금에 묘한 해방감이 들며 괜히 우쭐해졌다.


옆 사람의 라멘이 나왔다. 그도 마제소바가 아닌 돈코츠라멘을 주문했다. 내 것도 이어 나왔다. 토핑은 추가하지 않았다. 기본으로 먹었다. 칸다소바에서 돈코츠라멘은 처음이니까….


칸다소바에서의 첫 돈코츠라멘

국물을 먼저 한술. 농도도 염도도 적당하다. 잘못 시켰으면 어쩌지라는 우려가 한 번에 사라졌다. 이제는 즐기면 된다. 김에 차슈를 싸서 먹었다. 그리고 맥주. 좋다. 지금 어디에 가도 이보다 더 맛있게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에 일렬로 주르륵 앉는 라멘집은 조금 천천히 먹어도 눈치가 덜 보인다. 아주 조금씩 나는 라멘을 씹었다. 평소같이 후루룩 거리지 않고 수저를 이용해 국물과 함께 한 수저씩 먹었다. 마지막 맥주 한 모금이 남았을 때, 딱 한 젓가락이 남았다. 조절을 아주 잘했던 것이다.


가게에서 나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국물까지 다 먹었더니 배가 불렀다. 다시 걷기로 했다. 수성동계곡 쪽으로 난 오르막길에 올랐다. 나는 원래 이 길이 좋다. 윤동주가 근처를 산책해서도 아니고 겸재 정선 산수화의 배경이 되어서도 아니다. 그냥 옛 서울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 동네의 분위기가 좋다.


수성동 계곡에 이르니 꽤 숨이 찼다. 쉬지 않고 그대로 계속을 통과했다. 계곡 옆으로 난 데크길을 따라 오르면 인왕산 자락길을 만난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자락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가면 윤동주문학관으로 가는 길이다.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초소책방도 나온다. 초소책방에 막상 가보니 실망이 컸다. 누구나 편하게 쉬었다가는 쉼터가 아니고 베이커리 커피숍에 가까웠다. 이름만 초소책방이지 이미 책이 주인공인 공간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베이커리 카페였다. 굳이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간단하게 책을 읽으며 쉬어 가는 것을 기대했는데 실망하고 나니 인근의 도서관을 찾고 싶어졌다. 조금만 더 걸으면 ‘청운문학도서관’이 있다. 사람들만 많지 않다면 한옥에서 편안하게 쉬다가 갈 수 있는 곳. 초소책방보다는 더 운치 있는 곳이다.

근처를 들르면 잠시라도 쉬어가고 싶은 청운문학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에 들러 가져온 책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차도 마셨다.

티백 실 끝에 달린 종이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 박자 쉬면 삶의 여유는 두 배가 됩니다.’


1시간 정도 책을 읽다가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매장으로 출근할 시간이다. 2만보를 걸었으니 발이 조금 무거웠다.


나에게 물었다. 최근에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