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성북동을 오르며

by 조명찬

성북동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길상사에 가고 싶었다. 며칠 전 우연히 백석의 시를 다시 한번 읽었다. 그랬더니 길상사가 생각이 났다. 백석이 '자야'로 불렀던 애인, 김영한이 소유했던 요정. 그녀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보시하게 된 길상사. 그래서 잘 나가던 요정에서 사찰로 변하게 된 곳. 내가 아는 것은 그 정도다.


제대하고 한동안 백석에게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그래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 성북동 일대를 많이 걸었다. 길상사에 앉아 백석의 시집을 오랫동안 읽고 혼자 감명에 젖어 절의 이곳저곳을 눈여겨봤었다.

그리고 한동안 백석을 잊었다. 백석을 잊고 나니 성북동에 올 일이 없었다. 아주 가끔 성북동 아랫자락에 있는 돼지불백 식당을 종종 찾기는 했다. 그게 다였다. 밥을 먹으러 들렀을 뿐, 차분하게 성북동을 걸은 것은 십 년도 넘었다.


한성대입구 5번 출구로 나와 길을 따라 쭉 걸었다. 멀리 북악산이 보이고 그 아래 주택이 첩첩으로 겹쳐져 있다. 그래. 성북동이 이런 곳이지. 단번에 성북동이 느껴졌다. 4차선 차도 옆 인도를 따라 걷다가 골목이 보인다 싶으면 샜다. 다세대주택이 촘촘하게 있는 골목에는 오래된 한옥들이 남아 있었다. 국가에서 보존하는 문화재가 아닌 삶의 때가 묻어 있는 생활한옥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성북동으로 가는 길


집에서 조금 늦게 나왔기 때문에 점심때가 가까웠다. 차도에 있는 몇몇의 백반집에서 구수한 냄새가 진하게 새 나왔다. 된장국이다. 밥을 먹고 길상사에 오르는 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천천히 다녀와서 아무 데나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성북구립미술관을 지나니 ‘금왕돈까스’ 본점이 보였다. 돈가스를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 유명한 식당의 위치를 꾀고 있진 않지만 ‘금왕돈까스’ 정도는 알고 있다. 온 김에 돈가스나 먹고 갈까?

지하철 출구로 나오자마자 계속 식당에 길게 줄지어 있는 데다가 간판만 봐도 알 수 있는 유명 식당들이라 자꾸 먹을 생각만 들었다. 옆에 누구라도 함께 있었으면 고민 없이 바로 들어갔을 것이다. 혼밥은 여러모로 고민이 된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오는 시간을 피한다. 그래야 돈을 내고도 눈칫밥을 안 먹을 수 있다.


오르막으로 계속 걸었다. 성북동 고급주택단지로 가는 길이다. 대사관도 종종 보인다. 계속 오르면 삼청각에 다다른다. 내친김에 삼청각까지 걸었다. 차로 오르기도 꽤 가파른 오르막을 계속 걸으니 땀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따뜻한 날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삼청각 앞에서 지도를 보니 길상사까지 20분은 걸어야 할 것 같다. 대사관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경찰들이 많이 보였다. 평일 낮에 성북동을 걷는 사람은 없었다. 나 혼자였다. 담이 높은 건물이 모여 있어서 넓은 길임에도 답답하다. 주택가치곤 차도가 넓지만 인도가 따로 없다. 여기는 걷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

가파른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니 길상사가 보였다. 그리고 길 옆으로 좁은 인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일반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높은 담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길상사에 들어서며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도 인사는 한다. 방문하는 사람으로서 그게 예의다. 게다가 아버지가 아픈 이후로는 짧게나마 주문을 외듯 기도를 한다.

마침 공양시간이라 사람들이 한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절밥을 한번 먹어볼까 하다가 내려가서 마실 맥주 생각에 관두었다. 생각보다 많이 걸어서인지 시원한 맥주가 간절했다. 지나가는 스님들의 승복이 바람에 가볍게 하늘 거렸다. 절 한편에 흐르는 물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미세한 바람에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확실히 봄이 오나 보다. 볕이 좋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일본 작가의 음주 예찬론인데 절에서 이런 책을 읽고 있자니 불경스러운 맘이 들어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승복의 색감이 멋졌다


길상사를 나와 내리막길로 내려왔다.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인도가 넓어지고 담이 낮아졌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오늘 걸었던 길과 다시 마주쳤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금왕돈까스‘에 가기로 맘을 먹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맥주에 돈가스 몇 점이면 오르막을 걷느라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풀릴 것만 같았다.


조금 걸으니 ‘금왕돈까스‘가 보였다. 오전에 걸었던 길이라 더 가깝게 느껴지긴 했다. 그런데 식당 앞 주차장에 차가 너무 많이 보였다. 1시 반이 넘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계속 차에서 내렸다. 망설여졌다. 바쁜 집에 혼자 들어가기가 애매했다. 발길을 돌려 인근의 ’서울왕돈까스‘로 향했다. 맛이야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5분을 더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혼자임을 밝히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안내받았다. 됐다. 일단 맘이 편했다. 안내받은 자리는 카운터 옆의 창가 자리였는데 나는 창을 등지고 손님들이 다 보일 수 있는 곳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봤는데 아뿔싸! 맥주가 메뉴판에 없다. 맥주가 없는 돈가스는 필요가 없다. 일단 당황하지 않고 물어보는 게 우선이다.


"저기 혹시 여기 음료나 맥주 같은 건 없나요?"


"맥주 있죠. 카스, 테라 뭘로 드려요?"


정말 다행이다. 수프가 먼저 나오고 맥주가 나왔다. 한 컵 먼저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슬쩍 보니 지금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보란 듯이 거품이 넘치도록 한 잔을 더 따랐다.

돈가스와 생선가스가 함께 나왔다. 혼자 먹기는 많은 양처럼 보이지만 얇은 돈가스라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돈가스 한점 먹고 매운 고추를 조금 물고 마지막으로 맥주 한 모금. 그게 기사식당의 돈가스를 먹는 클래식이다.


서울왕돈까스

밥을 먹고 나와서 혜화로를 따라 내려왔다. 다세대 주택이 모여 있는 주택가를 지나면 혜화로 로터리가 나온다. '혜화칼국수'가 보였다. 여기가 그렇게 괜찮다던데 올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외관만 봐도 맛집이다. 꼭 시간 내서 와 봐야겠다. 혜화로터리를 지나 대학로로 향했다. 모처럼 들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편안했다. 한낮의 마로니에 광장은 묘하게 평화롭다.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사람들의 차근차근한 말소리만 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아르코미술관의 전시를 봤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서 전시를 본 기억이 있다. 어떤 전시를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시보다는 마로니에 광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아르코예술극장은 故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다


종로 5가를 향해 다시 걸었다. 이상하게 맘이 편안했다.

2024년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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