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안녕 나야! - 방배동에서 역삼동까지

by 조명찬

집을 나서긴 했는데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동네를 배회하려다 지하철을 탔다. 2호선 방배역으로 가보기로 했다. 방배역에서 내리면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다. 언젠가 한번 정도는 가보고 싶었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맘만 먹으면 쉬운 일이었겠지만 진심으로 내키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 좋은 기억이 많았다면 계속 추억했겠지만 잊고 싶은 기억이 많다. 나에게 고등학교는 그렇다. 이제는 좋은 마음도 싫은 마음도 희미해졌다. 그래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이다.


방배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플레이.

스산한 바람소리에 이어 피아노 독주가 시작됐다.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드럼 비트.

패닉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였다.


내 바닷속에는 깊은 슬픔과 헛된 고민들 회오리치네

그 바다 위에선 불어닥치는 세상의 추위 맘을 얼게 해


이적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에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걷기로 했다. 그때의 난 '패닉'을 즐겨 들었다. 패닉 시절의 이적은 시인이었다. 모든 가사에 은유가 넘쳐흘렀다. 나는 그게 좋았다. 패닉의 또 다른 멤버인 김진표는 내가 그토록 싫어해서 25년 만에 가고 있는 그 고등학교의 선배이기도 하다.

방배역에 내려 학교로 가는 길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난 버스를 타고 다녔으니까. 학교로 가는 마지막 사거리에 다다랐을 때 기분이 좋지 않게 떨렸다. 나는 3년 동안 이 길을 다녔었다. 억지로.


학교를 가는 게 싫었다. 친구들도 사귀고 싶지 않았다. 두루두루 친구들을 사귀었던 중학교때와 다르게 존재감 없이 3년을 보냈다.

서울연고대를 많이 보내서 강남의 명문사학이라고 불리는 곳. 하지만 나에겐 학교보다는 학원으로 기억되는 곳. 사춘기의 십 대들을 윽박과 폭력으로 사로잡아 오로지 공부만 시키는 곳. 야간 자율학습을 밤 9시~10시까지 필수로 시키면서 과외를 받는 사실이나 학원을 다니는 증서를 보여주면 야간자율학습을 제외시켜 주는 곳. 그래서 야간 자율학습에 남아 있는 얘들은 자연스럽게 집안 형편이 좋은 않은 얘들인 것으로 구분지어 지는 곳. 성적만 잘 나올 수 있다면 사교육을 오히려 권장했던 학교.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글을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교의 첫 백일장에 정성스럽게 글을 써서 냈는데 매번 최고의 상을 받던 중학교때와 다르게 입선조차 하지 못했다. 입상은 모두 상위권의 반장, 부반장들에게 돌아갔는데 그때의 난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 살고, 글까지 잘 쓰는 얘들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올라온 입상자들의 글을 보니 생각보다 별로여서 평가 기준을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선생님에게 따지진 못했다. 그랬다간 시계를 성급하게 푼 손이 뺨으로 날아올 확률이 높았으니까. 유난히 번쩍거렸던 국어선생님의 금장시계는 손목에서 자주 풀렸다. 그리고 얘들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2학기에는 전국에서 개최하는 백일장 같은 게 있었는데 학교 대표로 나갈 사람을 지원을 받았다. 나는 당연히 지원을 했고 선생이란 사람은 나를 가짢다는 듯 보며 얘기했다.


"네가 뭔데. 학교를 대표해? 글 쓰고 싶어? 그래서 먹고살겠냐? 논술이나 잘 준비해 새꺄!"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 없었고 눈물이 났다. 그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어금니가 바스러지도록 꽉 깨물고 있었고 교무실 문을 닫고 나오며 학교를 뛰쳐나오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행동을 몇 년 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그대로 했다. '대학민국 학교 다 좆 까라고 그래.'라고 외치고 학교를 성큼성큼 나오는 장면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정말로 똑같이 그러고 싶었으니까. 알고 보니 감독이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었고 그래서 영화에서 묘사된 몇몇 선생의 모습이 익숙했었다.


교내에 설립자 문중의 묘가 있는 것도 기괴하다


학교 교문 앞에 섰다. 교문에 들어가자마자 언덕이 시작되는 곳. 나는 상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방학이라 수업이 없을 것 같아 안에 들어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낯이 익은 누군가가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어볼 것 같았다. 학교 건너편으로 건너가 한참을 바라봤다.

어깨가 축 처진채로 나는 그 교문을 3년 동안 통과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때 집에 가면 늘 아버지가 있었다. 갑작스레 회사에서 밀려나게 된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아침에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누워 있었고 밤에는 술에 취해 혼자서 넋두리를 하는 게 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집에 가는 게 싫었다. 버스를 타고 15분이면 가는데 일부러 걸어서 다녔다. 매일같이 그렇게 한 시간씩 걸었다.


그 길을 25년 만에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빼서 다시 패닉을 플레이했다. '달팽이'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곡이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물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그때보다는 인도가 더 넓어졌다. 그래서 걷기 좋았다. 국제전자센터를 지나 뱅뱅사거리 방향으로 걸었다. 국제전자센터가 처음 생겼을 때 이제 게임팩이나 CD플레이어를 사러 남대문이나 용산까지 가지 않아도 돼서 기뻤던 기억이 있다. 친구 중에 한 명이 게임팩 하나만 사러 간다고 해도 대여섯 명씩 몰라가 같이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국제전자센터는 노후된 용산이나 남대문과 달랐다. 건물도 깨끗했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세련돼 보였다.

지금의 국제전자센터는 한눈에 봐도 노후된 건물이다. 하긴 97년에 준공한 건물이니 28년이나 됐다. 그때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돌아다녔던 나도 이제는 누가 봐도 아저씨다.


계속 걸어 영동중학교로 향했다. 영동중학교는 이사를 가서 이제는 더 이상 중학교가 아니지만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 그대로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나는 중학교 때가 그립다. 친구들이 그립고, 선생님이 그립다. 학교가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얘들하고 실컷 놀았고 놀다가 만만한(?) 선생님이 퇴근을 하는 걸 보면 떡볶이를 사달라고 졸라 얻어먹었다. 국어 선생님은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고 자신이 읽은 고전 책을 선물해 주었다. 대학로에 데려가 연극도 보여줬었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 얘들에게 학교 사진을 보여주니 다들 반가워했다. 얼마 전에 함께 모여 소주를 마셨던 친구들은 빨리 또 뭉치자고 난리였다. 평소에는 잠잠하지만 어떤 일로 누군가가 말을 먼저 걸면 하루종일 단톡방이 난리다. 여전히 우린 그때처럼 재미있고 싶다.

신기했던 건 그때 종종 가던 미용실 자리에 그대로 미용실이 있었다는 건데 그때 학교 앞에 생긴 미용실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었다. 원래 학교 앞에는 3,000원에 머리를 자를 수 있는 이발소가 있었는데 60대 정도의 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당시에는 짧은 스포츠머리가 두발규정이어서 한 달에 두 번은 이발을 했어야 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집에서 5,000원을 받아 3,000원에 머리를 자리고 2,000원을 따로 챙기곤 했었다. 그런데 학교 앞에 새로 미용실이 생겼는데 헤어디자이너가 너무 예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한창 사춘기였던 남자중학생들의 입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하교 후 미용실엔 길게 줄까지 늘어섰다. 미용실의 이발비는 5,000원. 더 이상 2,000원을 꽁으로 챙길 수 없어도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이발소에서 미용실로 전향했다.


실컷 뛰어 놀았던 운동장



미용실 안을 슬쩍 보았다. 손님은 없었고 중년의 여성이 청소를 하는 듯 보였다. 키득대며 미용실 안을 훔쳐보던 그때의 나와 친구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중학교까지 온 김에 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 보기로 했다. 20분만 걸으면 되니깐 멀지 않은 거리다. 뱅뱅사거리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오늘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역삼초등학교에는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이십 대 초반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동창들을 만나 함께 와 본 적도 있다. 학교 안에는 야구부들이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야구부가 있었다. 야구부 중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세븐업 사이다에 얼음을 타서 주곤 했었다. 그때의 내가 뭘 알겠냐만은 유리잔이 너무 고급져서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와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나중에 들은 소식으로는 선배의 폭력으로 야구를 관뒀다고 했다. 건너 건너 통해 들은 소식이었는데도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정문에 가서 살짝 안을 들여다 보고 학교와는 멀어졌다. 길 건너 골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많이 다녔던 길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올 때 빠른 길이 있음에도 나는 일부러 휭 돌아 그 길로 다녔다. 초등학교 때 첫사랑이 살던 집 쪽으로 다닌 것이다. 이층 집에 살았던 그 친구와 멀리 서라도 마주치면 나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 집인 것 같은 집을 찾았다. 그 친구가 어느 골목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전화기를 꺼내 다시 음악을 틀었다.

윤종신의 '이 층집 소녀'였다.


저녁교회 종소리 노을에 퍼지고

성급한 거리 위의 불빛이 눈을 뜰 때면

내 기억의 동네에도 켜지는 불빛

아직도 나를 설레게 만드는 내 첫사랑 그녀


이층집 소녀가 살았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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