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중헌디?
상담을 하면서 매우 다양한 부모님을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대동하고 상담을 오시지만 최근에는 아버지들의 방문 횟수가 늘고 있다. 물론, 주로 옆에서 듣는 역할에 충실한 아버지들인지라 대화의 상대를 어머니에서 아버지 쪽으로 돌리면 매우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저학년 아이들은 상담할 내용이 구체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초등 고학년과 중고등으로 올라가면 아이 개별적인 역량과 성향, 지금까지의 학습 환경이 달라서 그때그때 상담할 내용들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지곤 한다.
상담 유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아이를 크게 낮추며 잘하는 수준이 아니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헬프미형.
두 번째는 아이의 실력이 너무 출중한데 이 정도의 아이를 잘 케어할 능력이 되겠냐고 은근 협박하는 스카이캐슬형.
마지막으로, 내 아이는 두 번째고 학원 자체를 매우 의심스러워하며 따져 묻는 검사형.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의 부모님들은 언제든 궁금해하시는 내용들을 설명해 드릴 수 있는데, 세 번째 유형인 경우에는 학습적인 상담보다 그 외적인 내용들이 상담의 주가 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분들이다.
최근에는, 모 맘카페에 이 학원에 대한 글들이 올라왔는데 댓글 수가 적더라,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어머님이 계셨다. 수십 개의 아이디를 가지고 맘카페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여러 업체들을 상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답을 드리고는 싶었지만, 변명처럼 들릴 것 같고, 알지도 못하는 맘카페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왜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써 놓은 글들을 읽고 혹은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아이디로 다른 사람인 척 써 놓은 글들을 보며 나의 중요한 뭔가를 결정하며 사는 세상이 참 무섭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물론, 나도 어느 부분에선 그 어리석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통 상담은 한 시간 이상 진행된다.
와서 대충 어떻게 수업 진행되는지, 얼마나 역량을 책임져 줄 수 있는지, 수업료가 얼마인지 물어보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현재 역량과 미래의 역량은 단순히 학습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학습 환경이나 부모님의 성향에 의해서 크게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정확한 계획을 세우려면 학원의 학습 커리큘럼 이전에 학생과 부모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고, 그래서 더 긴 상담이 요구된다.
8년 전 한 부모님이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을 데리고 학원에 방문하셨다.
처음에는 아버님과 전화 상담을 먼저 했었는데 말씀하시는 내용이 고등학교 자녀를 둔 부모님과 상담하는 느낌이어서, 아이가 지금과 같은 환경에 계속 노출될 경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해 아버님뿐 아니라 어머님도 아이와 함께 오실 것을 말씀드렸고, 토요일 오후에 허리에도 오지 않는 귀여운 아이와 그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아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심지어 아버님은 겨우 1학년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이렇게 하면 수포자가 된다고 여러 번 화를 내고 겁을 주었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평소에 풀었다는 문제집도 들고 오셨는데, 그 문제집을 가지고 제가 한 시간만 같이 수업을 해 볼 테니 댁에 가셨다가 문자 보내드리면 와주십사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과 아이를 떼어 놓고 진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연산 문제집도 있고 진도 문제집도 있고, 수학 문제집 치고는 매우 화려한 핑크색 문제집도 있었다.
연산 문제집을 보니 이제 겨우 두 자릿수 덧셈과 뺄셈을 하는 아이였는데, 강렬한 빨간색 사인펜으로 오답 문제에 과감하게 대각선 칼자국을 낸 모양을 보고선, 아이에게 열 자리 수의 덧셈과 뺄셈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아이는 예상대로 자기가 어떻게 열 자리를 하냐고 웃으며 말도 안 된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잘 몰랐겠지만 넌 충분히 할 수 있는 아이라고 얘기하고선 두 개의 열 자리 숫자를 세로셈 형식으로 써서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앞의 아홉 자리를 손으로 가리고 열 번째 숫자만 먼저 계산하게 했다. 이후 여덟 자리를 가리고 아홉 번째 숫자들을 계산하게 하고, 그렇게 첫 번째 숫자까지 모두 계산한 뒤 얼마나 멋지게 열 자리 숫자의 연산을 해냈는지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늘 못하고 왜 틀리냐는 얘기만 들어서 수학이 싫었었는데, 스스로 무려 열 자리나 되는 수들을 더했고 수학학원 원장에게 매우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으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계산했던 종이를 자기가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아빠,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서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잘했다는 말을 내가 아니라 그동안 부모님에게서 듣고 싶었을 것이고, 만약 집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명랑하고 학습적으로 뛰어난 아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부모님께 오시도록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수학 문제집을 더 풀고 싶다며 가져온 세 가지의 교재를 모두 펼쳐 놓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조금 넘어 부모님을 다시 뵈었다.
그리고 아이가 수학을 못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모두 아버님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고, 아이가 두 시간 넘게 풀이한 세 개의 문제집을 모두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핑크색 문제집을 보며 지금까지 사놓고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고 무작정 싫다고 한 문제집이었는데, 아이가 정말로 이걸 자기가 꺼내서 풀었느냐고 물으셨다.
“아이가 왜 수학을 싫어하는지 이제 아셨죠?”
“죄송하지만 저는 이 아이를 받지 않겠습니다. 학습을 시키고 학원을 다니도록 하는 건 아버님이나 어머님의 결정이겠지만, 지금의 이 아이에겐 왜 풀지 못하는지 추궁을 당하는 학습보다는 다른 친구들과 건강하게 뛰어노는 환경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당연히 제가 정답은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얼마든지 다른 학원에 보내셔도 되지만,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 공감되는 바가 있으시다면 이 친구는 2년 후에 저에게 다시 보내 주십시오. 그때 다시 만나서 열심히 수학으로 놀아보겠습니다.”
2년 후에 정말로 아이가 아빠 손을 붙잡고 학원에 찾아왔다.
아빠와 아이는 2년 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고맙게도 아이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 말대로 학원을 보내지 않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 정도만 집에서 조금씩 공부하게 하셨다 했다. 물론, 수포자와 같은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으며, 학습을 할 때는 화도 한 번 내지 않았다고 무척 강조하셨다.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그동안 키가 훌쩍 자랐는데, 희한하게 다리만 길어져서 하체가 상체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부러운 몸매를 가진 멋진 놈으로 성장했다. 사춘기가 와서 얼굴 표정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동안 교육이 아니라 보육을 해왔던 나에게는 언제나 앳된 미소를 보여주는 착하고 노력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아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친구들이 상담을 많이 오는데, 그렇기 때문에 학습 역량이 아니라 환경적인 영향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혹시라도 내 아이의 부족한 학습 역량이 안타깝고 초조한 분이 계시다면 학습 외적인 요인은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길 권해드린다.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는 녹슬고 낡은 부품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면 다시 쌩쌩하게 돌아가는 기계처럼 생각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내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올려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나 설명은 매우 무지하고 위험한 것이다. 희망사항을 들어야만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수학은 생각하는 과목인데 그 생각과 이해를 누가 강요할 수 있겠는가?
해결의 제일 우선순위는 오로지 공부하는 아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인위적인 실력 향상을 바라기 이전에 아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환경적인 배려를 해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학원 상담 시 아이에게 그런 방향으로의 관심을 부탁하는 것이 올바른 상담 방법이다.
지금은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다그치지 말고, 아이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어른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