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강물
누군가의 취향을 알고 싶을 때 그 사람의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알고리즘이 아주 발달한 요즘 같은 시대엔 더더욱 내 취향의 한 곡만 선택해도 그 비슷한 류의 음악들이 자동으로 연이어 나오게 앱 자체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내 취향이 계속해서 견고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아무 노력 없이 손쉽게 내 취향의 새로운 곡들을 얻어갈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가끔은 알고리즘이 너무 고착화되어 계속 비슷한 류의 음악만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종종 친구들과 플레이리스트를 교환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것을 '알고리즘 세탁'이라 부른다. 실제로 알고리즘이 세탁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때가 되면 이불 세탁을 하듯 주기적으로 친구 중 한 명을 골라 살짝 술을 먹여 그 친구의 감수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뒤 서로의 은밀한 플레이리스트를 주고받는다.
굳이 친구의 취기가 오르는 이때를 노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미리 나에게 공개할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해 오라고 예고하는 게 아니다 보니 상대가 맨 정신일 때 플레이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하면 마치 본인의 치부를 보여달라고 한 것 마냥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걸 몇 번 겪은 이후로 생긴 노하우다. 이런 이유에선지 준비되지 않은 자의 플레이리스트를 받아 볼 때면 나도 마치 그 사람의 깊은 곳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이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흔히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이라 불릴만한 곡들도 많은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남들의 플레이리스트를 훔쳐보다 보면 단순히 숨듣명뿐만 아니라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다.
한 친구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 보게 된 날이었다.
탑 100 같은 인기순위 위주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의 플레이리스트를 두 개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플레이리스트의 제목을 어느 정도 카테고리화 해두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플레이리스트 제목은 정말 특이했다.
'굽이치는 강물'
'비자림'
'몽환적인 꿈'
.......
일단 플레이리스트 수 자체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리스트 제목들도 심상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굽이치는 강물'이라는 제목은 어떤 곡이 들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아니었어도 이 플레이리스트의 제목을 본 사람이라면 이 안에 어떤 노래가 들어있을지 궁금해서 눌러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제목은 뭐야? 굽이치는 강물?"
"노래 들어보면 알 거야. 그 노래를 들으면 난 굽이치는 강물이 떠올라."
그 안에는 플레이 '리스트'라는 말이 무색하게 김연우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단 한곡의 노래만이 들어있었다.
친구는 그 노래를 들으면 굽이치는 강물의 느낌이 강해서 플레이리스트 제목을 그렇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는 다른 곡을 찾지 못해 그 리스트 안에는 아직 한곡뿐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차마 바로 노래를 틀어보진 못했지만, 집에 가는 길에 그 노래를 들을 생각에 한껏 설레었다.
친구와 헤어져 집에 가는 길, 얼른 이어폰을 꽂고 아까 그 노래를 재생했다.
친구가 말한 굽이치는 강물이 어떤 느낌일까.
굽이치는 강물을 상상하며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재생했지만 친구가 말한 굽이치는 강물의 느낌이 내게 잘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느꼈다는 굽이치는 강물을 내 나름대로 떠올려보며 노래를 듣는 행위 자체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때의 기억이 인상 깊기도 했고, 친구의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도 노래를 저장할 때면 단순히 나중에 찾기 쉽게 카테고리화하기 적당한 명사를 찾아 저장하기보다는 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한 노래를 들으면 나한테 떠오르는 느낌과 장면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여기에 어울리는 형용사와 명사를 적절히 섞어 보려고 도전 중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노래를 듣고 단순히 '좋다'가 아니고 구체화된 느낌이나 형상화된 장면을 떠올리기 힘들뿐더러 플레이리스트에 당당히 적을 수 있는 적당한 형용사와 명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겨우 해냈다고 하더라도 첫 곡 외에 이 제목에 어울리는 또 다른 곡들을 찾아 넣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요새 가을날씨에 어울리는 내가 만든 or 친구로부터 받은 플레이리스트명을 살짝 공개해 본다. (플레이리스트 안에 노래는 아직 맨 정신이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 찬 공기가 느껴질 때
- 내 가을은 이래
- 먹먹
- 눅눅 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