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못 내리는 어트렉션, <샤이닝>

<샤이닝> 리뷰

by 정신차려 moziri



미제 노스탤지어의 혼합물

8~90년대에 제조된 미국산 완구나 생활용품을 파는 소품 숍(그 원조 격인 연남 ‘네온문’은 2013년에 문을 연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드 센추리 혹은 하이틴 풍 카페, 한차례 지나간 하이틴 룩의 유행 등, 이제 한국인들은 직접 경험 유무와 상관없이 미제 노스탤지어에 푹 절여졌습니다. 제겐 영화 <샤이닝>이 그런 노스탤지어의 중요한 한 장면입니다. 2018년 여름, 불 꺼진 거실에서 한 번도 안 끊고 핸드폰 작은 화면으로 <샤이닝>을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샤이닝>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1910년대, 서부개척시대 또한 품고 있습니다. 그 시절 식료품과 책이 가득한 덴버의 작은 집, ‘미드 센추리 인테리어’라기엔 차라리 한국의 옥색 타일 화장실을 연상시키는 호텔 방, 1910년대식 무도회장, 인디언 양식으로 장식된 중앙 홀 등 여러 시대가 큰 공간 안에서 중첩되죠. 또, 영화 내내 현대 음악같은 스코어들이 제한적으로 쓰이다가, 잭이 환각을 보는 장면에서부터 올드 재즈가 나옵니다. 마지막 장면의 ‘midnight the stars and you’을 부른 가수 알 보울리의 노래들을 듣다가 1940년대 재즈, 뮤지컬 영화들로까지 흥미가 이어졌죠. 그해 겨울엔 ‘white christmas’를 듣다가 캐롤이 흐르지 않는 한국의 길거리가 지긋지긋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의 크리스마스 파자마 파티에선 또 <샤이닝>을 봤고요. 그만큼 제게 <샤이닝>의 여운은 길었습니다.


모던한 연출

그런데 사실 <샤이닝>은 상당히 모던합니다. <컨저링>, <인시디어스>, <블라이 저택의 유령>, <힐 하우스의 유령> 같은 여타 하우스 호러 장르 영화들이 서양식 저택을 열심히 활용하며 벽난로나 짐 이동용 엘리베이터에 귀신을 출현시킬 때, 원피스를 차려 입은 쌍둥이 소녀를 말끔한 모습으로 대니 앞에 등장시킵니다.

<샤이닝>의 톤은 차라리 <나 홀로 집에>에 가깝습니다. 일반 가정집과 같은 밝은 조도의 호텔에, 예사로운 모습의 귀신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정적인 공포 이미지를 연출합니다. 피가 폭포처럼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장면도 고요히 연출합니다. 강조를 위한 효과음도 쓰지 않습니다. 스코어를 통해 중요한 장면 이전 고조되는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자동차 와이퍼가 움직이는 듯한 음, 야구 방망이로 빠르게 공기를 부웅 가로지르는 듯한 음 등 소리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여러 가지 생활 소음이 섞여 들리는 듯 합니다.

<샤이닝> 속 귀신 출현
인시디어스 시리즈 속 죽은 영혼들이 머무는 공간


또한, 핸드헬드 촬영이 돋보입니다. 숏을 끊지 않고 움직이는 인물을 길게 트래킹 하죠. 오버룩 호텔의 구조는 B1층(기계실 등)과 1층(메인홀/객실) 전 층 ㅁ형인데다 대부분의 공간은 양면에 출입구가 있어서 가로막히지 않고 인물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핸드헬드 촬영과 현장음을 살린 사운드 덕분에 <샤이닝>은 참 실감이 납니다. 커다란 사건 없이 심리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하우스 호러 속 지박령

저는 시간에 대해 일종의 폐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삶이 죽음으로 맺어진다는, 혹은 끝없는 윤회로 반복된다는 공포감(특히 니체의 무한회귀는 거기서 얻는 교훈은 차치하고 개념부터가 공포스럽습니다. 죽음에 천착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를 읽고선 공포감이 더욱 심화됐어요.)이 어린 시절부터 저의 가장 큰 노이로제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속이 울렁댈 정도로 말이에요. 사람의 인생은 길고, 윤회는 억겁의 시간을 보장하겠지만, 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폐소공포를 유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이라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꿔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 의식이 인생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는 거라고. <샤이닝>에서 잭은 여러 번 다시 태어나며, 늘 오버룩 호텔로 돌아와서 살인을 저지릅니다. 잭은 두 가지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죠. 살인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삶과, 오버룩 호텔이라는 공간입니다. 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호텔에서 ‘백인의 원죄’를 되풀이하는 도구가 됩니다. 잭은 지박령입니다.

지박령은 <블라이 저택의 유령>, <여고괴담4-목소리>, <인시디어스2>같은 하우스 호러 장르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귀신을 피하는 주인공보다, 저택이나 학교에 갇힌 채 npc처럼 하나의 경로만을 배회하는 귀신들에 공감하고 고통을 느껴왔습니다. 그 중 <디 아더스>, <비틀 쥬스>처럼 죽은 자에게 이입하도록 그들을 주인공으로 세운 영화들도 드물게 있죠. <샤이닝>도 비슷합니다. 이미 호텔에 동화한 잭, 잭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는 웬디와 대니 양쪽의 시점을 비추기 때문에 잭에게도 이입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여운 없는 이야기

절뚝이는 다리, 퀭한 눈, 탈모가 심한 머리, 작은 키…. 미국의 가부장도 노쇠한 신체로 연민을 자아내긴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스탠리 큐브릭의 캐스팅은 ‘신경질적인 작가’인 잭 토랜스에게 지나친 매력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언제나 남을 웃겨주려는 듯 애쓰며 안면 근육을 씰룩이는 그의 이타심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적인 유머가 홀로 있을 때의 퀭한 안면과 대비되어 더욱 짠함을 자아냅니다. 물론 잭의 매력 덕분에 시청자는 지루해하지 않고 그가 천천히 미치는 과정을 보아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셜리 듀발은 한 종류의 연기만 합니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덜덜 떨고, 남편에게 순응하는 연기죠. 개인적으로는 셜리 듀발의 이미지와 연기 모두 뛰어나다고 느꼈으나, 그녀의 연기를 비난하는 반응이 많았다고 합니다. 확실히 웬디는 잭보다 무미건조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잭은 웬디보다 오컬트적인 인물입니다. 앞서 말했듯 잭은 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호텔에서 살육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지박령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 1970년대의 가부장을 그런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도 걸까요? 잭의 사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나는 과중한 업무 책임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내게 맡긴 일을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대니와 웬디가 나를 모함하고 괴롭혀서 내가 그 일을 못 하게 막는다. 이제, 그들을 교정해 주는 것이 내 또 다른 책무다.’

잭은 사회가 부여한 정상 가족의 가부장 지위는 누리고, 응당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았으면서 (대니와 웬디는 반년 동안 이유 없이 호텔에 고립되어야 했으며, 잭의 어떤 협조도 없이 생활해야 했죠.) 본인이 가부장이란 이유로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우리에겐 퍽 익숙한 합리화 과정이죠? 가해자가 피해자 탓을 하고, 강자가 약자에게 부채감을 지우는 사고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기 식의 분노 투사이고요. 제가 이 작품을 처음 봤던 2018년에서 6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엔 ‘잭 토렌스’ 사건과 유사한 범죄가 점점 늘었고, 친밀한 여성을 폭행하거나 살해한 가해자 남성의 심리에 대한 연구들도 이뤄졌습니다. 저의 결론은, <샤이닝> 속 잭 토렌스는 상당히 현대적인 심리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해의식을 여성에게 투사하는 면이 현대의 여성 혐오적 심리에 가까웠습니다.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의 수는 한 세기 전에 더 많았겠지만요.


잭이 처음 호텔에 갔을 때 지배인 얼먼은 말합니다. 10년 전 호텔에서 처자식을 토막 살해하고 자살한 남자가 ‘밀실 공포’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던 것 같다고.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알고 있죠. 자신과 친밀한 약자를 정확히 공략한 그런 범죄가 이상 심리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성, 약자 혐오는 현실에 뿌리 한 감정입니다.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살육과는 또 다릅니다. 그런데 <샤이닝> 속 초현실적 공포 효과들이, 잭 토렌스 사건을 똑바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잭이 집단 무의식에 조종당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백인이 저질러 온 살육의 무의식이 아닌, ‘내가 잘 못하고 있는 건 다 저년 때문이다.’라는 무의식일 것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웬디와 대니를 호텔에서 탈출시키고, 잭은 얼려 죽여버립니다. 동결된 잭의 모습은 분명히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지만, 찝찝한 엔딩입니다. 호텔은 어떻게 되나요? 10년 전 사건 이후에도 멀쩡히 운영되어왔듯, 이번 사건도 잭의 정신 이상으로 매듭짓고 운영을 계속할 것입니다. 창작자라면 살육의 신화 안에 현실의 혐오 범죄를 묻어둘 게 아니라,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 처리할 의무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50년 전, 스탠리 큐브릭이 ‘사적인’ 가정사를 살육의 역사로 본 것은 꽤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큐브릭은 1980년대 미국의 풍조를 내다봤던 걸까요?

백래시는 로널드 레이건 통치로 상징되는 1980년대 뉴라이트의 부상 및 보수화와 함께 사회 각계각층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났고, 여기에는 ‘나를 버리고 떠나서 내 밥그릇을 빼앗는 여자들’에 대한 분노가 놓여 있다. (중략)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성차별이 공고한 상황에서 이런 신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수백 명이 넘는 남자를 인터뷰한다. 그리고 화가 난 남자들의 혼란에는 ‘배신의 경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건 여자들의 배신이 아니었다. 그건 해고, 비정규직화, 부동산 가격 폭등, 복지의 몰락, 정치적 무시 등의 형태로 나타났던 국가와 자본의 배신이었다. 출처: 한겨레21 <여기는 지옥, 그렇다면 지금 4B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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