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야기 6
오기 전에는 도저히 살 자신이 없던 이곳 베트남에서, 지금은 별로 불편하다고 못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마도 맨 처음 살았던 집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지 아파트에서 4년 살았던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아파트 안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일에 나는 별로 놀라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축구를 해도, 소리 지르며 뛰어놀아도.
우리 가족이 살기 시작한 2014년의 하노이는 높은 빌딩이 거의 없었다. 한국 회사가 건설한 72층 경남 빌딩 외에는 고만고만한 빌딩과 오래된 아파트들 뿐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하노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변해있다. 고층 빌딩들 외에도 여기저기 고급스러운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많이 들어서 있다.
맨 처음으로 남편이 구해 놓은 집은 오래된 베트남 현지 아파트였다. 우리가 예상하는 최소한의 생활비로는 고급 경남 아파트나 그 외의 이름 좀 있는 아파트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아이들도 나도 당연게 받아들였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비닐하우스 속에 들어온 듯한 찜통 무더위에 한 번 놀라고, 남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면서 '감옥 같다'는 느낌 때문에 두 번째로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문과 나란히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쇠창살 문이었다. 남편이 열쇠로 자물쇠를 풀고 쇠창살로 된 문을 연 후에 나무로 된 현관문을 한 번 더 열쇠로 또 열어야 하는 2중 구조. 여덟 가구가 한 층에 살고 있다고 들은 집들은 늦은 시간인 탓인지 하나같이 이중문이 잠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감옥'같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4년을 살았고 정이 들었다.
낮이 되면 집집마다 2중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여덟 가구가 함께 이용하는 그 좁은 복도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지곤 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음악을 크게 켜고 감상하는 집, 노래방 기기를 틀어 놓고 가족들이 어울려 노래 부르는 집, 또 아이들이 축구를 하기도 하고(아이들 놀이터가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어떤 날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탁구대가 설치되어 종종 탁구 시합이 펼쳐지곤 했다. 어느 한 집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거나, 혹은 명절 같은 때에는 복도에다 잔치상을 차려서 손님들이 함께 먹고 마시고 했다. 그런 상황이 서로서로 익숙한 듯 이웃집 사람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 조그만 공간에서 날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 자주 벌어졌다. 처음에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여긴 외국이고 당연히 우리나라의 문화와 다르다고 내 마음을 바꾸니 점점 이 문화가 재미있게 생각되어졌다. 나를 바꾸고 본 세상은 확실히 어제와 다르다.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다양한 곤충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퀴벌레였다. 베트남의 바퀴벌레는 크기가 엄청나다. 큰 놈은 우리나라 매미 수준이다. 바퀴벌레가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것을 베트남에 와서 처음 알았다. 한밤중에 자다가 뭐가 날아들어 내 얼굴에 부딪쳐서 불을 켜고 보니 매미만 한 그 넘이 하필 내 얼굴에 떨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어지간한 바퀴벌레에도 놀라지 않고 얼른 휴지 풀어다가 냅다 한 방에 잡아버리는 실력까지 늘었다. 도마뱀도 집안에 자주 출몰했다. 그러나 도마뱀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살지, 사람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로운 곤충이라는 걸 안 뒤로는 그냥 제 집 드나들듯 들락거려도 내버려 두었다. 안팎으로 쉴 새 없이 재미있던 현지 아파트였다.
그런 집에 우리가 4년이나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음씨 좋은 집주인 덕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여인이 성격이 어찌나 좋은지, 언어가 안 통하는 나에게 바디랭귀지로 아주 천천히 설명해 주곤 했는데 베트남어를 막 시작하는 나도 바로 이해될 정도로 친절했다. 풀옵션(오래된 베트남식 가구들뿐이었어도) 중에 뭐가 하나 이상이 있다고 전화를 하면 수리 기사를 대동하고 바로 달려와 처리해 주고, 낡아져서 고장이 난 것은 새 것으로 바로 교체를 해주었다. 집에 올 때마다 아이들 주라고 과일이며, 음료수를 사 오곤 했다. 모든 베트남 집주인이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오래된 낡은 아파트였대도 집주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지만 4년을 살다가 이사한 이유가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베란다 바닥 아래로 스며든 물이 집 안으로까지 영향을 주면서 거실 벽을 점점 부식시키는 바람에 벽에 곰팡이가 생기고, 벽 페인트(베트남은 습도가 높아서 도배를 거의 안 한다) 가루가 날마다 쌓이니 공기도 안 좋고 불편했다. 집주인이 기사를 불러 베란다와 거실 벽을 수리하도록 했는데 수리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내 질문에 수리 기사는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할 거라고 말해 주었으나 그 공사는 8일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집 공사가 아니고 건물 공사였다면 분쟁의 소지가 다분한 공사였다.
그 과정에서 욕실 문제, 주방 문제 등이 발생하면서 수리할 일들이 자꾸 생기고 일이 또 커지게 생겼기에 우리가 이사를 하려고 하니 마음씨 좋은 주인은 그동안 우리와 정이 들은 탓인지 그러면 우리 짐은 비닐 같은 것으로 덮어두고 가까운 호텔 같은 데서 생활하다가 공사 다 끝나고 들어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는 거다. 그에 대한 비용은 지불해 주겠다면서. 집주인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남편과 나만 사는 거라면 몰라도 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과 그런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집주인을 잘 설득하여 그 집에서 이사 나오게 되었다. 그 집주인과는 지금도 가끔 서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두 번째로 이사한 집은 근처에 새로 막 지어진 아파트였다. 오랫동안 낡은 아파트에 살아봤으니 기타 생활비를 조금 줄이고, 월세를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이번에는 아이들과 깨. 끗. 한. 아파트에 살아보고 싶었다. 정말 깨끗한 집이었다. 아파트 광장 한가운데에 수영장까지 있는, 꿈에 그리던 아파트였기에 우리는 너무 좋았다. 그 집에서 오만 년 살 거라고 착각했다.
우리 같은 마음으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빈 집 없이 입주민들이 꽉 들어차자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월세를 올려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2년을 계약했으나 그것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 계약이었다. 집주인은 월세를 올리는 것이 난처한지 집이 팔렸다면서 2주 안에 집을 비워 달라고 말했다. (베트남은 한국처럼 서너 달 전부터 미리 계약하지 않고 보통 2주에서 한 달 정도로 시간을 짧게 두고 해결한다) 이 상황을 전혀 미안해하지도 않고 당연한 듯 행동하는 집주인의 태도에 질려 이사를 결정했다. 베트남 집주인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세입자 우선주의 같은 게 있지만 아직까지 그런 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니 화를 내봤자, 머리만 아프지 싶어 6개월 만에 다시 이사를 했다.
세 번째로 얻은 아파트를 들어갈 때는 욕심을 버렸다. 무난하고 가격도 부담 없는 아파트를 구했다. 아이들 학교와 가까운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과 약속을 했다.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 2년 약속을 하고 살았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아 마음이 힘들었었다, 2년 계약 중간에 해지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1년을 딱 살고 났는데 집주인이 정말 미안하다면서 이사하기를 원하는 거다. 약속한 것은 알지만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연로해서 도시로 모셔와야 하는데 이 집 밖에 없다고 양해해 달라니 우리는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번째 살았던 집주인보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인 걸 생각하며 화내지 않고 다시 이사를 했다. 바로 옆 동,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최근 베트남은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대부분의 아파트와 거리 곳곳을 봉쇄한 상황이다. 아파트 밖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경비를 서면서 꼭 필요한 사람만 출입을 허가한다.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회사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불편한 상황이다. 얼마 전까지는 시장에 갈 수 있는 통행증이라도 주더니 며칠 전부터는 그것도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아파트 안에 있는 마트에 가서 4일에 한 번만 시장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으니 주민들의 불만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사회주의 나라인 걸 요즘에서야 확실히 체험하고 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계속 방송을 내보낸다. 코로나로 서로 주의해야 하니 각자 집의 현관문도 열지 말고(새로 지은 아파트들은 쇠창살 문이 없어서 콘도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이 복도에 나와서 놀지 못하게 하라는 방송이다. 그럼에도 문들을 열어 놓는 집들도 있고, 아이들이 가끔 나와서 놀기도 한다.
오늘은 우리 동이 마트에 갈 수 있는 날이어서 큰 딸과 함께 1층 마트에 다녀왔다. 다녀오다 보니 바로 옆집이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현관문 열지 말라고 방송하던데..." 나는 별 뜻 없이 말했다.
"나오지도 말라, 현관문 닫아라, 정말 너무해... 답답하니까 저렇게라도 하는 걸 뭐라고 하겠어..."
딸의 그 말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딸의 마음이 커진 것 같아서.
그래, 그냥 이해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우선 우리 스스로가 스트레스 안 받으니까...
4년 전에 살았던 그 집을 우리 가족은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그때는 물론 코로나가 없을 때이기도 했지만, 인정 많던 집주인도 그렇고, 그 좁은 복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북적거리던 사람들의 모습이야 말로 그것이 진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