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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와가치 Sep 08. 2021

베트남으로

베트남 이야기 5

 "우리 베트남 가서 살아보는 거 어때?" 12년 간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자동차와 관련된 자영업을 성실하게 해오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때, 그의 눈빛은 강렬했고 목소리는 너무나 단호했다. 지금껏 함께 살아본 바로는 그런 엉뚱한 제안을 할 사람도 아닌데 왜 갑자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제안 탓에 어이가 없어서 그때 나는 그냥 피식 웃으며 내 남편 많이 지쳐 있구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일만 하느라 너무 열심히 달려오긴 했다. 쉬고 싶었을 것이다. 넉넉지 못한 부모님 형편에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감히 손을 벌릴 처지도 아니라서 우여곡절 끝에 조그맣게 시작한 사업은 그야말로 폭풍 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 단 배처럼 자주 위태로웠다. 본사 마감이 돌아오는 말일이 가까워 오면 남편은 쉬 잠을 못 이뤘다. 사업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달으며, 또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 혼자 몰래 눈물을 훔치던 날도 있었다.


초창기에는 남편만 혼자 나가서 일을 하다가 일이 하나 둘 늘어나 나까지도 출근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바빠지기 시작하면서는 직원들도 하나둘씩 늘어갔다. 일은 점점 많아져서 통장의 잔고는 조금씩 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마감일은 언제나 녹록지 않았다. 

한 번은 남편이 사무실 안에서 걸어가다가 바닥으로 지나가는 전깃줄 커버에 걸리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 남편이 스트레스와 과로로 쓰러지는 줄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남편이 쉬고 싶은가 보다. 떠나고 싶은가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던가. 남들처럼 스트레스받는다고 술 한 모금을 하는가, 담배를 입에 대는가 말이다. 오로지 집과 사업장을 오가며 성실하게 일했고, 그러고도 집에 와서는 성실한 남편으로, 든든한 아빠로서의 책무를 다 해왔으니 나도 할 말은 없다. 충분히 이해된다... 만!


"왜 하필 베트남이야? 아니, 그 많은 근사한 나라들 다 놔두고 왜 베트남이냐고. 설사 근사한 나라여도 그래, 나는 해외에서 살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가셔. 내가 여기서 당신 대신 사업장 운영하고 돈 벌어서 부쳐줄 테니까 당신 좀 쉬다 와도 나 아무 말도 안 할게."  나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어느 날부터인가 인터넷으로 혼자 베트남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조금 저러다 말겠지, 했다. 어느 날에는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논문이라도 쓰려는 사람처럼 늦은 밤까지 베트남의 문화와 지리 등을 연구하는 거다. 그리고는 마치 베트남 사람이 자기 나라를 자랑하듯 매일 베트남 이야기만 하는 거다. 소 귀에 경을 읽어주듯 별로 관심도 없는 아내에게 남편은 열심히 베트남을 소개했다.  그러나 소는, 예쁘게 자라 가는  두 딸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만족했고, 통장에 잔고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남아있는 것에 안심했고,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계획하며 이 평온한 날들을 감사했다. 남편의 말에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이던 큰 딸이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딸보다 먼저 왕따를 당하던 친구가 안쓰러워 중간에서 도와주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자기를 왕따 시켰던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서는 오히려 딸을 왕따 시키는 묘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울었다. 친구들과 두루 좋은 관계 맺고 싶었는데 괜히 중간에서 이상하게 되었다고, 억울하다고, 딸은 매일 침울해했다.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왕따를 주도하는 한 아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딸 말고도 여러 아이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중이어서 선생님도 그 아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어찌어찌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새 학년에 되었는데 그 아이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 아이는 여전히 친구들 사이를 갈라놓고, 반에서 문제가 되는 일을 만들곤 했다. 딸은 전학을 가고 싶어 했다. 집과 가까운 다른 중학교를 알아보니 정원이 차서 학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무렵 사춘기를 시작한 딸은 학교 생활이 불안정해 보였고, 집에 와서는 제 방 안에 콕 박혀 점점 말수가 적어갔다.




남편이 몇 달에 걸쳐 달콤한 말로 그렇게 꼬드겨도 눈 하나 꿈쩍도 안 하던 내가 베트남에 대해서 질문을 시작했다. 점점 방 깊숙이 몸을 숨겨가는 딸을 위해서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니 거기가 베트남이 아니라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땅끝 나라라고 해도 일단은 좀 알아보고 싶었다.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지, 수도는 어디고, 인구는 얼마나 되며, 언어는 무엇을 사용하는지, 치안은 좋은지, 유명한 관광지로는 어디가 있는지 등 내가 묻는 그 많은 질문들에 자동 대답 버튼이 눌린 듯 남편의 입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정보가 좔좔 쏟아졌다. 베트남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긴 한가 보다.


아빠가 매일 저녁마다 베트남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던 걸 알고 있던 큰 딸에게 우리 거기 가서 살아볼까? 물으니 딸의 표정이 밝아지며 좋다고 한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감 가득 담은 눈빛을 하고서.

혹시나 남편이 김칫국 먼저 마실까 봐 조심하면서 4학년인 작은 딸에게도 가서 은밀하게 물어보았다. 만약에 우리 가족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어떨 것 같아? "재미있겠다. 엄마 아빠랑 있으면 나는 다 괜찮아."


가족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그동안 공부한 베트남 정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주 준비를 시작했다. 동생네 사업을 도와주려고 일부러 지방으로 내려와 5년 전부터 함께 일해오신 아주버님께서 사업장 운영을 해주시기로 했다. 남편은 형님께 베트남에 가서 마땅한 사업을 알아볼 것이며 그것을 시작할 때까지만 우리 가족의 최소 생계 비용을 책임져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남편이 먼저 베트남으로 떠났다. 집도 구하고, 아이들의 학교 문제 등 여러 가지로 남편이 미리 가서 해 놓아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딸들의 1학기 수업이 끝나는 날, 나는 학교에 가서 딸들의 자퇴서를 제출했다.

 



2014년 7월, 두 딸들을 데리고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공항 대기실로 나가니 어느새 검게 그을려 베트남 사람 다 된 얼굴로 남편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차를 타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내 입에서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한 여름에 비닐 온실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다. 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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