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3일, 저녁에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다. 파리의 삼인실 유스 호스텔에서 하룻밤 보내다.
2009년 8월 14일, 아주 맑은 오후, 이민가방을 끌고 릴 플랑드르 역에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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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1일, 릴 외각 위성도시의 단층 아파트. 설날 마지막 일요일에 살림을 하고 실컷 놀다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가? 어릴 적 나는 이 고정관념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여겼다. 어떤 대상의 아주 단편적인 면모만 보고 판단을 할 경우, 그때 가졌던 긍정적 감정이 대상의 진면모를 알게 된다 해도 유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서른 줄에 든 지금은 생각보다 이 날것의 '감'이 정확한 수치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전지식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던 열아홉 살에 떨어진 동네에 인생의 3분의 1은 훨씬 넘는 시간을 바쳤으니 말이다.
나는 14년 동안 노르 Nord 지방의 수도라 불리는 릴의 주변 도시를 전전하며 릴에게 푹 빠지게 됐다. 내 첫 기억 속 릴은 여름의 싱그러움을 품고 나를 따뜻하게 반겨준 고마운 도시였다. 두 달이 지나자 해라고는 좀체 보이지도 않는 우중충한 가을 날씨를 선사하며 내게 배신감도 안겨줬지만. 우중충한 날씨, 석회질이 그득한 물, 나쁜 대기질, 부족한 녹지와 비싼 물가... 욕을 하려면 끝도 없이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꾸준히 이 광역시에 머물려 한다. 강산이 이미 한 번 변하는 동안, 릴 메트로폴리스는 나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릴과 그 주변을 전전하는 국가 공인 가이드이자 문화 해설사가 되었다.
오늘날 내가 주되게 하는 일은 대중 앞에서 도시와 박물관 혹은 문화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 앞에서 그다지 한 적이 없다. 사실 꽤 오랫동안 내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해외로 나간 다른 이들의 웹툰이나 글을 보면 다사다난도 하고, 눈물도 있고, 스릴도 있던데 나는 안정 추구형 집순이다. 나라를 한 번 바꾼 것치곤 행동반경이 너무 좁으니 삶에 그렇다 할 자극적 소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에 친구들을 불러 감자칩이나 먹으며 보내는 저녁시간이나 요새 하는 게임 이야기를 남들에게 얘기하기는 너무 개인적이지 않은가.
그러다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라를 한 번 바꾼 것' 자체가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년이 되자마자 한국을 뜬 나는 한국의 시스템에 준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만,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아 본능과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이 이곳 사람과는 다르다. 사고방식과 생활방식도 미묘하게 융합하고 변화한다.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공간을 향한 이중적 향수를 짊어지고 사는 나는 두 나라에서 독특한 제 삼의 존재가 된다. 그러니 릴 광역시에 정착하기로 한 몇 년간의 과정 자체가 기억할만한,그리고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 기억을 나누기 위해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미 팬데믹 기간에 오 드 프랑스 지역의 박물관들을 소개하는 글을 다른 플랫폼과 월간 토마토라는 잡지에서 연재한 적이 있었다. 먼저 내가 대학생 시절부터 키운 관심사인 '플랑드르' 지역을 소개해볼까 한다. 동시에 곁들이로 프랑스 북부에서의 나의 삶을 다룰 것이다.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14년 전 연고도 없는 곳에 떨어져 일주일을 울기만 했던 열아홉의 나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봐, 네가 첫눈에 반한 도시와 지역이 이렇게나 멋지다.' 그러니 모두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줘도 좋다고 응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