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지에서의 선물

by blank

1월 10일 아침,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 무려 경유 대기 5시간을 포함하여 25시간에 걸친 비행을 마치고, 피곤함과 긴장감을 안고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온갖 호객행위가 이루어지는 몇 나라들과 달리, 리마 공항은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풍경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만 건너면 숙소를 예약한 미라플로레스 지역으로 가는 공항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 출발 시간이 40분 정도 남아 공항 밖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말차라떼를 마시기로 했다.


시간 맞춰 버스에 들어서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나는 앞 쪽에 앉은 내 또래 여자에게 옆에 앉아도 되겠는지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괜찮다고 하며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고, 한 손으로는 영어로 계속해서 통화 중이었다. 시내로 가는 길, 페루의 풍경은 나를 매료시켰다. 내가 이래서 남미를 오고 싶었었지.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자동차, 통일되지 않았지만 창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식물들, 과감하게 그려진 벽화들은 내가 살던 곳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알록달록한 것들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차분하고 획일적인 것에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하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누구보다 그러한 삶을 내면화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알록달록한 것들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걸까? 여튼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는 나를 설레게 하고 영감을 준다.


버스의 이동방향에 따라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풍경 감상에 여념이 없던 내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혼자 여행왔냐고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이번에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대답을 듣고는 현재 자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한국인이라고 했다. 알고보니 지금 공항에 온 이유도 사장님을 공항에 모셔다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장님은 페루에서 건축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 교포인데, 몇년 전 건축 전공자인 나탈리를 고용했고, 관리자 직급으로 나탈리가 승진한 후부터 꽤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탈리는 한국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자신이 먹어본 한국 음식과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를 열거하며 나탈리는 굉장히 신나보였다. 나 역시 나탈리가 살고 있는 리마에 대해 궁금한 것이 태산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내로 가는 한 시간 내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첫 여행지라 괜히 걱정이 되었던 리마에서의 날들은 나탈리로 인해서 훨씬 더 재밌고 알찬 시간이 되었다. 공항버스에서 내리자 나탈리는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고, 체크인을 하고 재정비를 하는 것을 기다려준 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식당에서 내게 점심을 사주었다. 그리고 함께 미라플로레스의 케네디 공원, 라르코마스 쇼핑몰, 사랑의 절벽 등 관광 포인트들을 다녀주었다. 해가 지면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하여 숙소에 콕 박혀있으려던 원래의 계획과 달리 미라플로레스는 생각보다 안전하고 깔끔해서 우리는 리마에서 유명한 칵테일인 피스코 사워와 마추픽추를 마시며 저녁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나탈리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가 정말 좋다고 했다.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출장을 많이 다니는 사장님은 나탈리를 깊게 신뢰하고 있었고, 나탈리는 그만큼 성실하고 사장님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넉넉한 급여와 자율성을 보장 받아서 자신은 어릴적 경제사정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점차 안정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나는 한국에 온 우연히 만난 외국인에게 이렇게 베풀 수 있었을까? 내가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돌려받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호의를 타인에게 마음껏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내가 쿠스코로 가는 날, 나탈리는 나를 공항까지 택시로 데려다 주었다. 나의 남미 여행을 축복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준 수호천사가 아닐까 싶은 나탈리. 나탈리는 여름에 엄마를 모시고 중국 여행을 갈 계획이 있었는데, 나의 적극적인 권유로 며칠을 빼 한국에서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 역시 나탈리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여행에서 가장 운이 좋을 때는 멋진 동행이 생길 때이다. 나는 리마에서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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