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국제공항에서 LA까지 11시간, 다시 LA에서 페루 리마까지 8시간 반. 이것이 서울에서 리마까지 가는 정석 루트이다. 기내에서 자리 선점에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2-4-2 좌석 배치 중 4, 그 중에서도 가운데 자리에 배정받았다. 내 왼쪽은 왠지 LA에서 오래 사신 듯한 한국인 아주머니였고 오른쪽은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검은 머리 외국인 청년이었다. 서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우리는 11시간을 나란히 앉아서 가고, 비행기가 착륙해서 짐을 뺄 때에서야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을 스치듯 확인한다.
저녁 9시 비행기였지만 시차를 고려해보았을 때 서울에서 LA까지 가는 비행기에서는 잠을 자지 않고 LA에서 리마까지 가는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 최적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비행기에 오르고 기내에 소등이 되고나자 희미해졌다. 결국 잠을 자긴 했는데, 잘 잔 것은 아닌, 그렇다고 다시 잠을 청하면 잘 잘 자신도 없는, 기분 나쁜 찜찜한 상태로 LA 공항에서 글을 쓰고 있다.
LA 공항에 있는 Panda Express에서 요기를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국적을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현저히 적어지고, 한국에서는 아무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컬러풀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무표정으로 지나간다. 내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해주지 않는 영어임에도 오히려 이런 환경에 던져지고 나니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한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일 것만 같은 한국에서 빠져나와 임의의 공간에 놓이면 뭐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지구는 이렇게나 넓다. 내가 속해 있던 한국 사회, 그 중에서도 특정 지역, 특정 학교, 특정 업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사회는 정말 수많은 방 중 하나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