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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Mar 18. 2024

빨래를 개며

거창한 일주일의 시작이다. 지난주에도 별다를 바 없이 거창하게 한 주를 시작했다. 시작이란, 늘 그렇다. 지난날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앞서 올 날들에 실수들을 모두 다 대비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을 품는다. 어떤 위대한 걸 단시간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까지 생긴다. 그렇게 한 발자국을 떼는 순간, 깨닫는다. 아차, 집에 지갑을 놔두고 왔다.


오늘의 아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월요일의 문을 열면서 주말 사이에 내가 떠올려놨던 것들의 첫 시작을 하기 위한 설렘이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끓인 다음, 뜨거운 한 모금을 마시고 샤워를 하는 동안 커피를 식힌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서는 커피를 마시면서 조간신문의 칼럼들을 후루룩 읽고는 일과를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몇 주째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는 한 고전소설을 어떻게든 해치운다. 그리고는 오후 11시가 되어서는 꼭 잠이 든다.


물론, 시작부터 어긋났다. 기상은 했지만 침대에서 미적거리다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 끓이는 시간은 다 날려먹었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보니 오전 8시다. 준비를 다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는 오전 8시 30분이었으니 목표해 뒀던 칼럼 읽기는 절반 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어젯밤에 설렘에 치여 너무 늦게 잠든 탓이었다.

퇴근을 하고서 분명 소설을 읽겠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 다음, 샤워를 하니 어느새 오후 9시였다. 이제 책을 읽어볼까. 아차, 빨래를 개지 않았다. 그러니깐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내게 당장 주어진 건,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들을 차곡차곡 개는 일이다.


보통 옷들을 3일에 한 번씩 세탁하고, 수건은 남은 개수가 2개일 때 삶아서 빠는 편인데 마침 그 날짜가 겹쳐버렸다. 개야 하는 빨래도 많다. 이미 몸이 천근만근인데, 빨래를 건조대에서 걷어내 하나하나 바닥에 펼친다. 뭔가 적적하니 음악을 튼다. 유유자적하기 딱 좋게 재즈를 틀어둘까 했지만 이왕 신나게 개어보자 싶어서 AC/DC의 1979년작 '하이웨이 투 헬'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그렇게 '콰과광!'


 일렉기타 소리에 맞춰서 머리를 흔들어대며 빨래를 갰다.


거창한 월요일을 그렇게 아주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주 망했다'의 감정은 아니다. 오히려 거창하지 않아서 더 흡족한 일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루라도 모든 목표를 완수하는 '완벽한 날'이 존재하는 순간, 그 이후에 오는 '덜 완벽한 날'들은 불행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덜 완벽한 날은 그 어떠한 절망도 불러오지 않을 그 어느 때보다 평범한 날이다.


분명 언젠가는 '완벽하게 내 계획대로 흘러갈 날'도 오겠지. 그런 희망을 품으면서 거창하게 열었던 한 주를 평범하게 보낼 준비를 해본다. 뭐든 거창한 것보다는 평범한 게 좋다.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날들에 비하 평범한 날이 더 특별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뭐 어찌 됐든 한 주의 시작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내일도 나쁘지는 않겠지. 희망을 품고 잠자리로 갈 준비를 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희망도 기분 나쁘지 않게 품어본다.


내일은 젠장할 지갑을 놔두고 나가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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