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내선 순환을 타고 가다 보면 신림역에서 신대방역으로 접어들 무렵 지하에 있던 전차가 지상으로 어느새 올라와 있는 순간이 있다. 사람이 이미 너무 많아 자리에 잘 앉아가는 편이 없어, 늘 서서 책을 읽고 있다 보면 전차 밖 풍경들에 눈이 휙 돌아간다. 껌껌했던 창밖은 활기찬 빛으로 채워지고, 그 빛들을 사람, 자동차, 도로, 가로수들이 채색한다. 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한강을 건널 때면, 저 멀리 63 빌딩이 보이고, 잔잔한 물결의 한강도 구경한다. 하루 종일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몇 바퀴를 돌 동안, 그 풍경들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한강을 지나면 다시 창밖은 어두워지고, 전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지하를 달린다.
어느 날, 회식을 마치고 막차 직전의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때가 있었다. 종각역에서 1호선을 타고 대방역으로 가서 환승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풀썩 자리에 앉았다. 평일 그 시간의 1호선은 소주 냄새로 가득하다. 얼굴이 빨간 아저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젊은 남자, 서로 딱 달라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커플들. 그 풍경을 보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취기가 올라온 탓인지, 가방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지하철은 대방역을 훨씬 넘겨서고 금정역을 지나치고 있는 참이었다. 큰일 났다 생각하고 지하철을 내리니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가는 열차는 끊기고 없었다. 역에서 나와 벤치에 앉았다. 날씨는 춥고, 손끝은 시렸다.
또 어떤 날은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으로 향하던 때, 자리에 앉아 꼼지락꼼지락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남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노이즈 캔슬링으로 주변의 소음까지 막고 있으니 아주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폰 소리 너머로 누군가의 큰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노약자석 쪽에서 큰 소리로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그저 시끄러워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어폰 소리를 높이면서 그들의 싸움을 외면했다. 그러다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를 피하기 시작해 이어폰을 귀에서 빼니, 퍽 소리가 났다.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 싸움을 피하겠다고 움직이다 내 발을 밟았다. 아무런 사과도 없었고,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울에서 살다 보니 지하철 없이는 거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싶다. 그만큼 생활의 많은 시간들을 지하철에서 보내고 있게 되는데, 삶이 지하철과 동일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전차처럼, 언젠가는 기쁘고 언젠가는 슬프다. 가끔은 너무 멀리 와버렸나 싶어 아쉬울 때도 있고, 누군가의 태도를 보면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은 순환선이고 누군가의 삶은 종착지가 정해져 있다. 또 누군가는 급행이고, 누군가는 일반열차다. 외선과 내선처럼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순환선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있기도 하다.
오늘 퇴근길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기 전 나는 어떤 정거장들을 지났나 생각했다. 당연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정거장에서 내렸고, 누가 어디서 탔고, 또 누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쳤을까도 생각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무수히 많은 인생들이 존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하철에는 내 인생도 마찬가지로 실려 있었을 테니깐.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전차는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할 삶의 순간들을 태우고 달릴 예정이다. 그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일 셀 수 없는 삶들이 무사히 각각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애쓸 거다. 각자의 노선도 위에서, 각자의 열차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지하철은 움직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