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병장은 군번줄 소리에 잠이 깼다. 자신의 목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소리의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어두웠다. 에어컨의 푸른 불빛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봤지만, 들리는 건 코골이 소리뿐.
내가 짬찌 때는 코도 못 골았는데. 김 병장은 생각했다.
그는 범인 찾기를 그만두고 건조한 목을 달래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생활관 문에서부터 정수기까지, 짧은 거리였지만 잠결이라 속도가 느렸다. 찌익 촥, 찌익 촥.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김 병장은 정수기 위 카페인 음료를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이거 부소댐이 보면 좆되는데.
아, 제 겁니다.
선 일병이 허리춤의 디지털 요대를 만져대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것을 달라는 듯 두 손을 김 병장에게 내밀었다.
아, 그래?
김 병장은 손에 있던 음료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후 캔을 흔들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더니, 거의 다 먹은 음료를 선 일병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래. 뭐, 잘 알겠지만 정수기에 뭐 올려놓는 건 좋은데, 두고 까먹으면 안 돼. 알지? 걸리면 좆된다.
맞습니다. 근데 김민혁 병장님, 아직 안 주무십니까?
뭔가 불안해. 잠이 안 와.
산불 때문에 그러십니까?
응.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어떡해. 아직 안 꺼졌냐?
맞습니다. 진짜 넘어올지도 모릅니다.
아이씨 불안하게. 그런 말 하지 마.
그러자 선 일병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한번 밖에 나가 보십니까? 장관입니다, 장관.
뭔데?
선 일병은 대답 않고 웃어보였다. 귀찮고 졸려하는 김 병장을 밖으로 끌어내기에 충분한 웃음이었다.
와 미쳤네. 벌써 저렇게까지 퍼졌다고? 일자로 촤악, 아주 그냥…….
맞습니다.
용사 둘은 마치 가스레인지 불 앞 작은 벌레 같은 모습으로, 일자로 길게 뻗은 산불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세 개의 철책 너머, 목함지뢰 수백 개가 숨어있는 광활한 초원. 두 군인이 살면서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마 초소에 있던 북한 놈이 담배꽁초 던졌을 거야, 그치?
우리 쪽 불은 다 꺼져서 다행입니다.
근데 진짜 웃기더라. 헬기가 우리 쪽만 끄고 빠지는 거.
어쩔 수 없잖습니까?
알아 이 새끼야…….
군인 둘은 다시 침묵하며 불구경에 심취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김 병장은 자신이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사이렌 소리가 먼저 들리고, 음질 구린 스피커 구멍 사이로 목소리가 힘겹게 빠져나왔다.
아, 아. 실제상황, 실제상황.
2층 침대에서 누군가 뛰어내리고, 또 누구는 관물대에 부딪히며 조용한 밤의 끝을 알렸다.
야, 아무나 불 켜! 불 켜!
신병으로 보이는 이들 몇몇을 제외하고 다들 익숙한 듯 환복을 시작했다. 이곳은 GOP였다. 언제 실제상황이 터질지 몰랐다.
아, 아. 환복하고, 상황실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여유롭게 환복하던 김 병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일반적인 상황조치가 아닌데? 갑자기 왜 모이래.
그 때 생활관 문을 열고 박 하사가 들어왔다.
어, 다들 준비했어? 근데 우리 소대는, 4분대만 갈 거다. 어차피 4분대가 내일부터 새벽근무 아니냐? 그냥 오늘부터 하는 셈 치자.
김 병장과 선 일병 등 4분대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고, 그들을 제외한 용사들의 얼굴에는 꽃이 폈다. 벌써 생활복으로 갈아입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4분대, 빨리 환복하고 모여.
박 하사가 나가고, 타 분대 두 사람이 히죽대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김 병장을 툭 쳐서 이목을 끌더니, 괴상한 포즈를 취하며 소리쳤다.
나만 아니면……돼!
이에 김 병장은 굴하지 않고 전투복으로 마저 갈아입으며 말했다.
씨발 안되겠다. 3분대 다 나와. 우리 4분대랑 전쟁이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은 소용이 없었다. 3분대와 4분대의 낯빛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같은 조명 아래, 마치 바둑돌 같은 그들.
어, 다들 모였나.
소초장은 안경을 뒤통수에 끼고 머리를 올려 멋을 냈다. 그는 상황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말했다. 강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었다.
너네도 알다시피, 산불이 났다. 근데 그게 9중대까지 번졌다. 9중대가 어디냐? 우리 바로 옆옆 아니냐. 어떻게 해야겠노. 도와줘야겠제?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용사들이 격렬하게 응답했다. 이들의 열띤 반응에 소초장뿐만 아니라 부소초장도 미소지었다.
분대장들은 계속 통신대기 하고, 가서 그쪽 소초장 말 잘 들어라. 다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파이팅! 다치지 말고 돌아오자!
겁에 질린 이들도 두려움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 넣고 뜨거운 분위기에 동조했다. 그들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맡은 것 같았다. 평소 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영웅적이고, 좀 더 군인다운 것. 국민 대부분이 잠든 시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구원자. 용사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곳에 더 이상 용사들끼리의 계급은 없었다. 상하관계는 오직 하나만 존재했다. 소초장과 용사들. 왕을 섬기는 충신의 마음으로 용사들은 소리 질렀다.
짜증 가득한 얼굴의 4분대도 뒤늦게 합류했다. 이미 다른 소대는 광란의 도가니였고, 분위기에 금방 휩쓸려 4분대원들의 얼굴에도 흥분감이 맴돌았다. 모이기조차 싫어했던 걸 까먹은 것 같았다.
특히 김 병장은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역 전에 거창한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중사 하나와 하사 둘을 필두로 군인들이 이동했다. 30명 정도의 인원들. 농담을 던지며 여유롭게 출발했지만 가는 길이 길어지자 말수가 줄어들었다. 왼쪽을 돌아보면 북한 땅, 아니 지옥불이 보였고, 김 병장은 옛날 선임들이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북한군들이 감자 구워먹다가 불이 번져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다는 이야기. 그때는 믿지 않았지만 현재의 김 병장은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광경보다는 말이 됐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불이 보인 영향 때문인지 군인들은 점차 더위를 느꼈다. 분명 4월의 새벽공기는 차가운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공기는 건조해 숨이 턱턱 막혔다. 수통에 있는 물이라도 마셔야 하나? 군인들은 생각했다. 마침내 나타난 대대본부의 옅은 불빛은 액체도 아닌 것이 용사들의 목을 축여주었다.
휴식은 짧았지만 달콤했다. 땀이 식고 나른해지며 잡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딜 둘러봐도 동지가 있어 위로가 됐다. 이제 그들은 큰일을 하러 갈 터였다. 더불어 상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1인당 생수 두 병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무래도 모양새가 용사들의 생각에 맞장구 쳐주는 것 같았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최고야…….
대대본부에서부터 9중대 입구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 내부의 조명도 꺼져있어 분위기가 묘했다. 어떤 이들은 몰래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문자를 남겼고, 새벽이라 그 누구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린 군인들은 식은 몸 덕에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걷고 또 걸으며 몸을 덥혔다. 산 중턱에 있는 경계소초로 가는 길이었다. 올라갈수록 어둠 속에서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고, 모두들 목에 둘렀던 젖은 수건을 들어 얼굴에 문댔다. 더 이상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화재현장에 가까워진 걸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다들 헥헥대며, 오르막길이 끝나길 빌었다. 다리 힘이 조금 약한 몇몇 군인들은 불균일한 콘크리트 도로 위에서 비틀대며 고군분투했다.
다들 소초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평소 철책점검을 위해 경사로를 오르내리던 실력은 어디 갔는지, 너무 지쳐 이곳으로 애초에 왜 왔는지조차 까먹은 것 같았다. 지시를 내릴 간부마저 없었다. 도중에 통신병 둘을 데리고 가더니 용사들만 올려 보낸 것이다.
9중대에도 용사들을 반기는 간부는 없었다. 다만 힘이 빠지는 어느 순간, 용사 하나가 생활관 안으로 들어가라 전달받았고, 그 말을 작은 목소리로 전파했으며, 소식은 금세 퍼져 군인들은 서둘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빈 생활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계급장에 작대기가 두 개 달린 9중대 상황병 하나가 다가왔다.
일단 쉬고 계시면 되고……가져온 인원 및 도구들의 수만 파악해서 알려주시면 됩니다.
김 병장은 동기 석 상병과 함께 나가 등짐펌프, 삽, 갈퀴 등 도구들의 수를 종합했다. 허나 상황실로 갔을 때 방금 전의 그 병사가 보이지 않아 살짝 고민했다. 그들은 아무한테나 말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섰다.
이런 명언이 있지. “해야 되나?”면 무조건 해야 하고, “해도 되나?”면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지금은 무슨 상태일까.
내가 봤을 때 “해도 되나?”야. 일단 저 안이 바빠 보이고…….
그 때 용사 둘이 들어와 말하고 있는 석 상병에게 갑작스레 경례했다. 어깨에 달린 녹견 때문에 간부로 오해한 것이다. 용사 둘 중 하나는 작대기 두 개 상황병이었는데, 분명히 전에 봤음에도 앞의 선임을 따라 손을 올렸다. 김 병장과 석 상병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방금 인원이랑 도구 수 종합해서 알려 달라 하신 거…….
맞습니다. 제게 말해주시면 됩니다.
석 상병과 김 병장은 보고를 끝낸 뒤 다시 생활관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대다수의 군인들이 잠에 취해있었다. 나른한 공기가 생활관에 떠다니고 있었고, 분명히 화재현장 근처였는데 미치도록 습했다. 당황한 김 병장은 눈이 감길락 말락 하는 선 일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자냐? 우리 이제 뭐한대.
아……김 병장님. 소초장님께 전화해보니까 그냥 이쪽 소초장 지시 따르라고만 하고……근데 어차피 저희가 예상한 게 흙 파는 일 아닙니까? 그냥 그거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럼……따로 지시 있기 전까지 푹 쉬란 말이네. 뭔 일 있으면 깨워.
김 병장은 방탄조끼를 벗어던지고 방탄모를 베개로 사용해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방탄모는 너무 높았고 전투복이 땀에 전 탓에 찝찝하여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남들의 코골이 소리에 집중하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잘 자나, 신기해 했다. 또 혹시 모르니 방탄조끼라도 입고 자야 되나, 싶었다. 이런 저런 잡생각이 들고, 또 들고, 들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김 병장은 주위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다들 피곤한 얼굴로 장구류를 착용하고 있었다.
바로 몸부터 반응했다. 전투복 정돈 좀 하고, 그날따라 무거운 방탄조끼 걸치고, 방탄모 똑바로 쓰고……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반이었다. 23시 반쯤 출발하여 1시 반쯤 도착해서……잠만 잤다.
그래도 이제 뭔가 할 것 같았다. 김 병장은 또 다른 죽상의 용사에게 이제 뭘 할지 물어보려다, 느낌상 그 역시 모르는 것 같아 관뒀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들과 함께 생활관 밖으로 나와 복도 위를 느릿느릿 걸은 뒤 새벽 공기가 반겨주는 소초 밖으로 나왔다. 간부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 왔어? 소초 입구에 있는 등짐펌프 보이지. 저것들 저 밑에 농구장으로 옮겨놔. 그리고 밑에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용사들은 힘없이 말했다. 그들은 굼뜨게 움직이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계급이 높다 싶으면 등짐펌프에 손대지도 않았다. 비록 양 손에 하나씩 들게 되더라도, 그것은 이등병 혹은 일병이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용사들이 빈손으로 털레털레 걸어갔고, 어쨌든 농구장에 모여 질서 있게 줄을 섰다.
어우씨. 존나 피곤하네. 이제 뭐하냐?
앉아 있으면 되나?
용사들이 궁시렁댔다.
제가 간부님께 여쭤봅니까?
일병 하나가 선수 쳤다. 녹견 달린 석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병장은 아무 생각 없어보였다.
대기하랍니다.
또?
다시 한 번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털썩 앉아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대놓고는 못하고 쪼그린 상태로.
이윽고 작대기 두 개 달린 상황병이 길고 마른 몸을 휘저으며 용사 무리에게 다가왔다.
간부님께서, 등짐펌프 좀 저 위로 옮겨 달라 하십니다.
상황병이 가리킨 곳은 꽤 높은 곳이었다. 용사들은 가파른 오르막길도 꽤 걸어야 했고, 돌계단을 지난 뒤, 일반 도로와 철책선 점검로 사이에 서있는 간부들에게 물건을 전달해야했다.
이번에는 계급 낮은 이들에게만 맡길 수 없었다. 보는 눈과 옮겨야 할 등짐펌프가 전보다 훨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 병장은 두 개 들었다. 후임들한테 이기적인 사람으로 찍히고는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그는 심란했다.
이것만 하고 가면 좋겠다……아니 근데 정말 겨우 이거 하러 여기 온 거야? 잡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비록 잠은 잤지만 몸은 찌뿌둥하여 가는 길이 생각보다 상당히 힘들었고, 김 병장은 땀을 흘리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빨리 부대로 복귀해 샤워한 뒤 에어컨의 냉기가 스며드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하, 한 번 부소댐한테 전화해봐. 이거 끝나고 뭐하면 되냐고.
또 내가?
어깨에 녹견이 달린 석 상병이 어이없다는 듯 김 병장에게 말했다.
에휴, 맨날 내가 하지.
석 상병은 툴툴 대면서도 키패드를 눌렀다. 신호음이 끊기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 병장은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아, 부소대장님. 저희 지금 작업 다 끝나고……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작업? 무슨 작업.
그게……등짐펌프…….
씨발, 뭐하나 했네. 아놔 진짜…….
죄송합니다.
됐어.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거 아니면 하지 마. 알겠어? 내가 너희 직속상관이야!
죄송합니다.
일단 시작했으니까……하던 거 끝내고, 어제 올라가던 길에 있던 대공초소 기억나냐? 거기로 와.
알겠습니다.
석 상병은 힘없이 전화기 든 손을 내려놨고, 아무 말 없이 김 병장과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에 대한 동질감, 측은함 등……이런 게 전우애지, 김 병장은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전우애는 힘듦을 공유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석 상병은 생각했다. 그들의 전우애는 불 근처에 가기도 전에 시작됐고, 무서운 간부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다.
김 병장은 소초로 어떻게 복귀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는 완전히 떴었고, 거의 점심처럼……. 부소댐이 진압 도구 옮기는 걸 도왔던 건 기억나네. 그 우리 소초 대공초소하고 비슷하게 생긴 곳……그 뒤로 기억이 안 나. 그냥 계속 걸었던 것 같아. 가는 길에 오줌이 좀 마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김 병장은 스팸을 이등분으로 나누며 생각했다. 아침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고 몸은 여전히 땀범벅이라 조금 불쾌한 상태였지만, 달콤했다. 고된 작업 후의 뜨뜻한 밥은 흔히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아침 먹을 때의 김 병장은 한 소식을 듣고 무너졌다.
김민혁 병장님, 저희 물 통제입니다…….
설거지를 위해 물을 트려던 김 병장을 제지하고 그의 식기를 가져가며 취사병이 한 말이었다.
물 통제. 김 병장이 있는 21소초는 물 통제가 잦았다. 툭 하면 빨래 금지, 툭 하면 샤워 금지. 사유는 제각각이었다. 대대장이 있는 소초에 물을 끌어다줘야 된다든지, 그냥 물탱크에 물이 부족하다든지.
이런 경우가 다반사라 용사들도 더 이상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씻지 못해 찝찝한 몸을 물티슈로 닦아대며 억울함을 공유할 뿐이었다.
물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없었다. 김 병장과 4분대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들은 땀 덕에 어디에든 쩍쩍 달라붙는 몸 상태로 쉬어야 했고 결국 상의 끝에 분대 막내에게 임무를 하나 맡겼는데, 그것은 작업 다녀온 인원들만이라도 샤워를 하면 안 되냐고 간부에게 건의하는 것이었다. 허나 돌아온 답은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산불이 완전히 진압이 안 된 것 같다는 소문까지 용사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김 병장은 귀 한 쪽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방탄모를 오랫동안 쓴 덕에 그런 것인가 싶으면서도, 반대쪽 귀는 멀쩡했기에 의아했다. 뭐가 됐든 원인은 물 통제다, 김 병장은 생각했다. 물 통제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것이 귀를 이렇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심리적 요인이다…….
김뱀, 김뱀? 뭐하십니까?
김 상병은 항상 김 병장을 줄여서 김뱀이라고 불렀다.
수통은 어디다 쓰십니까?
김 병장은 신경질적으로 방탄조끼에 걸려있던 수통을 빼내 화장실로 직진했다. 곧이어 물을 머리에 쏟아 부었고, 금속 통에 담겨 차갑게 유지된 물이 왼쪽 귀의 열을 식혔다.
김뱀, 김뱀? 물은 가셨습니까?
몰라. 안 간지 한 몇 개월 됐나?
김 병장의 대답에 김 상병뿐만 아니라 몰려온 또 다른 용사들도 웃었다.
아니 그거, 엄청 더러운 거 아닙니까…….
그럼 안 씻고 자게? 너도 빨리 와서 해라.
어느새 다가온 석 상병이 동참하며 말했다. 선임 둘이 나서서 하고 있으니, 부잣집 자식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김 상병도 세면장에 수통을 들고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후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4분대원 전부가, 어떤 찌꺼기 같은 것이 표면에 떠다니는 수통 물을 머리에 마구 끼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사이렌이 울렸다. 곧이어 상황병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북쪽에서 풍선이 날아오고 있으며 바로 옆 중대 전방에서 식별되어 전원투입이 필요하다는 게 요지였다.
전원투입이란 말에 군인들은 일사불란 움직였고, 수통 물로 정성껏 닦은 4분대원들의 가랑이와 겨드랑이에도 다시 땀이 차기 시작했다.
빨리!
비켜!
여기저기서 독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로 부딪히는 이들도 있었다. 김 병장은 일명 ‘최신식 통신수단’인 자신의 핸드폰을 챙기고, 총기함에서 총을 꺼냈다. 그리고 걱정스런 얼굴의 이등병을 마주했다. 4분대 막내였다.
김민혁 병장님, 저 어떡합니까……급하게 달려오다가 2소대 분이랑 부딪혀가지고 그 분 안경이 떨어졌는데 그게 다른 사람이 밟아서 부서져가지고…….
김 병장은 이등병을 밀치고 선 일병을 찾았다. 한시가 급했다.
민준아, 선민준! 가방 챙겼어?
선 일병은 몸을 살짝 돌려 진지낭을 보여줬고, 김 병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소초 밖으로 나왔다. 군장검사대에서 간부들이 탄을 수불하고 있었다.
한탄창 15발 좌상탄 이상무!
이어서 군인들은 안전검사를 실시했다. 김 병장은 노리쇠를 2, 3회 후퇴 및 전진시키며 뻑뻑함에 다소 놀랐다. 좀 닦을 걸, 하는 후회도 잠시, 몸을 재빨리 움직여야 했고, 차단진지로 가는 그 와중에도 북한 쪽의 밋밋한 산불과 그 뒤의 거산과 산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태양이 보였다.
야 이것 봐라. 고라니 발자국 아니냐? 멧돼지라기엔 너무 작은데.
김 병장과 선 일병은 흙길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심각하게 애기했다. 삽탄한 총은 진지 한 구석에 걸쳐두고 전방감시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안 불편해? 방탄모 벗어! 진짜 괜찮다니까?
김 병장은 방탄모를 쓰지 않은 자신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곧이어 선 일병도 자신의 맨머리를 드러냈다.
시원하이 좋지?
김 병장님.
부소댐한테만 안 들키면…….
김 병장님!
응?
김 병장과 선 일병이 고라니 발자국을 목격한 흙길 위쪽, 잡초와 묘목에 덮여있던 작은 언덕이 어디에선가 날아온 불씨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주황색 불은 몸집을 점점 키워갔고, 어느새 어린아이 둘 정도의 크기를 갖추었다.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아이 세 명, 어른 서너 명 정도의 크기가 되고……사실, 김 병장과 선 일병은 그들을 줄곧 괴롭혔던 벌레들의 소리가 안 들릴 때부터 이상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충격 받은 얼굴로 불앞에서 멍을 때렸다. 그리고 주황색 불이 어른 네다섯 명 정도의 크기가 됐을 때, 선 일병이 말했다.
김 병장님이 아까 버린 꽁초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뭐 이 새끼야?
김 병장은 고개를 홱 돌렸다. 허나 선 일병의 눈에서 악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김 병장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손은 가만히 있질 못했다.
씨발……그, 그 일단 보고하고. 수통 물 있어?
저희 다 썼잖습니까…….
일단 흙 끼얹어. 빨리! 내가 보고할 테니까.
김 병장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결이 제대로 안 됐다는 뜻이었다. 그는 선을 빼고, 조잡하게 절단된 전선의 끝부분을 최대한 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끼우는데, 거칠게 소리가 났다. 불안정하지만 연결은 된 것이었다.
토, 통화? 들리십니까.
김 병장은 수화기 너머 상황병의 반가운 목소리를 기대했다. 대답만 해줬다면, 김 병장은 말년이 되기도 전에 말을 놓아줬을 것이다.
안 들립니다!
상황병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했고, 김 병장은 밖으로나 속으로나 ‘지읒’자가 들어가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선 일병 역시 그 소리를 들었고, 뒤돌아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화재진압이 좀처럼 안 된다는 얘기였다.
솔직하게 보고하자. 우리가 한 거 아니잖아.
진짜 김 병장님이 하신 거 아닙니까?
지랄 마 새끼야. 부소댐한테 닦일까봐 만약 산에서 피게 된다? 그럼 주머니에 꽁초 넣었어. 짬찌 때부터…….
김 병장은 말하면서 자신의 주머니를 까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없습니다?
아니……아니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그래. 일단 빨리 보고하러 가자. 그게 맞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총을 뒤로 메고, 방탄모를 쓴 뒤 진지 바깥으로 서둘러 벗어났다. 전투화가 나무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꽤 가파른 계단이었고, 다 오른 뒤 두 용사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일명 ‘DMZ의 에펠탑’이 그들 옆에 우뚝 솟아있었다.
‘에펠탑’은 송신탑이자 관광지로, 꽤나 유명하였다. DMZ 탐방객들을 위한 휴식처이자, 북한 땅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이색장소로써 말이다. 비록 김 병장을 필두로 하는 군인들은 이런 곳을 왜 보러오나 싶었지만……말라버린 연못, 황색 땅 위 여러 모양의 숲들. 에펠탑에 올라서면 훤히 보이는 북의 경관이 꽤나 볼만 하다는 것엔 다들 동의했다.
그리고 ‘에펠탑’ 부근으로 불이 붙는다 어쩐다 하는 와중에, 김 병장과 선 일병은 매일같이 보는 북쪽의 풍경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놀랍게도,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북한 쪽 불 다 꺼진 거야? 방금 전까지도 계속 연기난다고 한 것 같은데…….
슬프게도 그들이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 병장과 선 일병은 허겁지겁 진지에서 내려와 소초로 들어섰다. 복도는 텅 비었고, 상황실에선 중대장의 고함이 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산불이 났다고 보고를 한다면? 김 병장은 고민했다. 휴가가 잘리거나 군기교육대 갈 것은 각오해야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꽁초 탓이 아니라고 굳게 믿은 덕에 약간의 자신감이 있었고, 보고에 대한 의무감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잘 떨어지지 않았고, 옆에 있던 선 일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망울을 하고 김 병장을 쳐다보았다.
후임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아가야 했다. 그는 앞장섰다.
상황실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모니터를 향해 상체를 기울인 부소대장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부소대장님. 중요하게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김 병장은 자신의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에 적잖이 놀랐다. 봐봐, 나도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야, 훈아. 이 새끼들 종심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부소대장이 말한 게 아니었다. 상황실 제일 끝 열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하던 중대장이 두 사람을 보고 부소대장에게 말한 것이었다.
아, 맞습니다.
부소대장은 두 사람을, 특히 김 병장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특정 부위에 위치한 땀샘의 개방을 유도했다. 김 병장의 경우엔 그것이 등, 특히 날개뼈 부근이었고, 선 일병의 경우엔 발바닥이었다.
실제상황인데……자리를 비워?
부소대장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는 화가 날수록 목소리의 음량을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
아, 그게……수류탄 수불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선 일병은 놀란 얼굴로 김 병장을 쳐다보았다. 주위의 용사들 역시 어이없다는 듯 김 병장을 쳐다보았고 특히 계급장을 보았는데, 작대기는 네 개였다.
그걸 네 마음대로 판단해?
……맞습니다. 평소 경계 나갈 때 지참하는 것을 참고해서…….
진지 비운 사이에 북한군 지나가면 어떡할래?
……죄송합니다.
훈아, 그 새끼들 뭐래냐? 그냥 빨리 보내!
알겠습니다.
상황 조치를 하던 상황병, 영상감시병, 그리고 말단 간부들까지 김 병장과 선 일병을 흘긋 쳐다보았다.
야, 김민혁. 너 병장이다. 기억해라…….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김 병장은 순간이동에 준하는 속도로 상황실에서 뛰쳐나왔고, 선 일병은 그를 힘겹게 따라잡았다.
김 병장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저희 진짜 큰일 납니다! 사실대로 보고하자 해놓고…….
김 병장은 소초에서 완전히 나가기 전, 걸음을 멈췄다. cctv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야, 민준아. 나만 믿어. 지금 이 상황에서 불까지 났다고 보고 하면, 완전 난리 나. 아까 중대장 못 봤어?
아니, 그래도…….
우리가 빨리 움직이면 끌 수 있어. 아까는 놀래서 그렇지, 좆만한 불이었잖아. 그치?
그, 그랬습니까?
등짐펌프에 물 꽉 채워서 한 명당 두 통씩 챙기는 거야. 오케이? 빨리!
김 병장과 선 일병은 재빨리 움직였다. 세면장에는 전날 화재진압의 여파로 인해 물이 채워진 등짐펌프가 몇 통 있었고, 다행히 하나만 채우면 됐었다.
그러나 하나를 채우는 데도 체감상 영겁의 세월이 느껴졌고, 흘러내리는 땀에 두 사람의 몸이 녹아내릴 듯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김 병장은 선 일병을 시켜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지 감시하게 했다.
됐다!
선 일병이 김 병장을 보며 말했다. 반말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양 손에 등짐펌프를 하나씩 쥐고 헐레벌떡 진지를 향해 뛰었다. 가는 길에 cctv가 있었기에, 그들의 수상한 모습을 상황병이 보고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이윽고 김 병장과 선 일병은 에펠탑에 다다랐다. 그곳에서도 숲 속의 불은 매우 잘 보여,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고 그들이 기억하던 크기에서 벗어난 건 한참 전이었다. 게다가 날은 더욱 어두워져 타 중대에서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게 끝이었다.
김 병장은 선 일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짐펌프 네 통으로 충분히 끌 수 있다 믿었기에, 군생활이 늘어나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어, 저기!
김 병장이 생각하기에 선 일병의 손가락 위치는 적절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을 건너뛰고 하늘을 가리키는 건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 병장은 선 일병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 위를 보아도 눈이 그리 부시지 않은 시간대.
상공에 무언가 떠다니고 있었다. 김 병장은 어릴 때 보았던 만화를 떠올렸다. 풍선 여러 개를 달면 집도 띄울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집 대신 쓰레기봉투로 보이는 것들이 하얀 풍선에 매달려 공중에 떠다니며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에펠탑에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더니 산불이 난 곳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펑!
폭발은 한순간이었다.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그런데 갈색 폭죽이 있을 수도 있나? 김 병장은 찰나에 생각했다. 쓰레기봉투에서 나온 것들은 갈색 빛을 띠었다.
그것들은 고래가 일으킨 물결 같은 모습으로 공중에서 퍼졌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김 병장과 선 일병의 옷에도 튀었다. 어마무시한 활동반경이었다. 김 병장은 갈색 빛의 그것이 방탄모에서부터 코까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후 김 병장은 갈색 폭죽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그것들이 금세 땅에 닿아, 산불을 완전히 꺼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숲은 예전 모습을 잃었다. 완전히 갈색이었기에.
그리고 김 병장은 선 일병과 함께 에펠탑 아래에 가만히 서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하늘이……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