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양상사.
한때는 재계 순위 30위 안에 들었던 도양(Do Yang) 그룹 내에서 최고의 매출과 이익을 만들어내던 종합상사였고 모든 대학 졸업생들의 입사 지원 1순위 회사였다.
현재는 몇 개의 작은 계열회사만 남아있는 도양 그룹 내에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회사에 불과하지만 섬유 공장과 제과 공장을 계열사로 운영 중인 제조 및 유통 전문 회사이다.
대학 졸업이 다가오면서 계속되는 면접 탈락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 도양상사 합격은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었고 평생을 함께 할 회사라 생각하고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었다.
1994년 1월 2일 첫 출근.
내가 소속된 해외 영업팀은 섬유 원단을 주로 수출하는 부서였다.
“자.. 주목…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소개합니다”
안경을 눈아래로 비스듬히 걸친 중년의 부서장이 직원들을 향해 외친다.
곽 상기 상무… 전문대졸 영업사원 출신으로 부서의 최고 책임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명 전국구라 불리는 실적 달성의 귀신..
부족한 실적 달성을 위해서는 담당지역만 상대하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직접 밤새 배달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영업을 업으로 삼고 봉급을 받는 직원들 사이엔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안녕하십니까? 해외영업부 신입사원 전 영문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소개를 마치고 나자 박수로 환영인사를 해준다.
묘한 설렘과 긴장감속에 자리 배정을 받고 나니 이제야 직장인이 되었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필기류 몇 개 챙겨주는 여직원 외에 관심 보이는 사람은 없고 일상적인 업무로 다들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사장님.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러다 저 회사 못 다니게 생겼습니다. 밀린 대금을 이번 주에 주신다고 하셨는데.. 전화는 왜 안 받으시는데요… 제가 거기로 바로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납품한 제품에 문제가 생겨서 원인 파악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건 마치 전쟁터에 온 것처럼 한쪽은 거래처 사장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한쪽은 보이지도 않을 상대방에게 연신 머리를 굽히면서 사과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신입사원 인사를 한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직장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전 영문 씨.. 잠깐 미팅 좀 합시다..”
해외 영업부의 신 통달 선임 과장이 부른다.
해외 영업부의 젠틀맨으로 통한다는 신 통달 과장.
평소에 거래처에 싫은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문학과 어학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한 나름 학구파 과장님 이기도 하다.
“이 서류 파일 한번 보세요. 우리 회사랑 거래 중인 해외 거래처 업무 파일이야. 교신이 오고 간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조금씩 감이 잡힐 거야.”
“네. 알겠습니다.”
군대의 신병이 선임병을 대하듯 큰 소리로 답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어떤 대답을 해도 다들 한 번씩 쳐다본다.
마치 동물원의 전시된 동물을 쳐다보듯 한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시선을 돌려버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지난 3년 동안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세다 보니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신입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는 시선이었던 것이다..
“전 영문 씨.. 저랑 커피 한잔 하실래요?”
미스 고. 서류 업무의 달인..
실적 달성을 위해 월말과 월초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들며 해외 영업의 실적을 관리하는데, 거래은행에서 월말만 되면 기피 대상 1호가 되어버린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담당자를 설득시키는 기술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올드 미스이다 보니 소개팅에 관심이 많고 얼굴 표정에 희로애락이 그대로 드러나 가끔 신 통달 과장으로부터 핀잔을 자주 듣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네. 알겠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하니 오히려 무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한테는 그렇게 큰 소리로 답 안 해도 됩니다.. 호호호”
“네”
회사 앞 조그마한 커피숍에 자리 잡아 해외 영업팀이 주로 하는 일과 그동안의 영업 히스토리를 설명해 준다.
그동안 해외 영업은 신 통달 과장이 주로 진행을 하다 보니 신입 사원이 거의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내수 영업에 비해 매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다 보니 혼자서도 여러 국가의 거래처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올해에는 왜 신입사원이 필요한 걸까요?”
궁금했다. 충분히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업무인데 왜 나를 해외영업으로 배치를 시켰을까….
그런데 미스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런 얘기를 한다.
“신 통달 과장이 이제 나이가 있어서 평소 하는 일이 그렇게 의욕적이지 않다는 내부의 평가가 있어요. 공정하지 않지만 부서장은 실적이 부족하면 전국 팔도를 무대 삼아 다른 영업사원들의 구역에 몰래 물건을 넘기는 일도 합니다. 전화 한 통이면 밤새 트럭을 몰고 가서라도 실적을 만들어오고 하거든요. 회사 내부에서는 구역을 넘나드는 판매 행위를 불법이라고 하면서도 실적을 달성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가곤 하지요. 그런 곽 상무의 눈에는 신 과장의 구렁이 담 넘 듯하는 회사일 처리 방식이 별로 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이번 신입 사원 부서 배치 요청할 때 전 영문 씨를 해외 영업팀으로 발령 내달라고 인사팀에 요청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도 젊고 의욕적인 신입사원이 와서 해외 영업을 맡아 주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고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궁금증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신 과장은 회사에서 찍혔다는 얘기이고 시한부 봉급쟁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만 보이면 신입사원인 나에게 해외 영업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니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사회생활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들의 공통된 생각일 거라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조직 생활인 것이다.
“신과장님이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아니요. 얼굴이 좀 동안이라서 그렇지 실제 나이는 지천명 이랍니다..”
知天命…
미스고의 입에서 이런 한자어가 나오다니..
새삼 놀랐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이 아닌데… 오십이 넘었다는 소리였다.
나이를 칭하는 한자 명칭이 묘하게 신 과장의 운명을 얘기하는 듯하였다.
“그 정도 나이가 됐는지 몰랐네요. 회사가 참 매정하네요. 그래도 청춘을 회사를 위해서 충성을 다 한 사람을 고작 나이 오십 넘었다고 잘라 낼 준비를 하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영문 씨가 우리 회사를 좀 알기 시작하면 실망 많이 할 걸요.. 호호호.. 차라리 지금의 신입 사원 시절이 가장 속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일 겁니다…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참 독특하다.
예전 어려서 보았던 “호호 아줌마”라는 만화 속 주인공 아줌마를 떠올리게 하는 웃음소리였다.
호호 아줌마 만화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도 주제가는 가끔 흥얼거렸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영문 씨와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반갑고 앞으로 해외 업무 관련된 모든 기록은 제가 다 알고 있으니 언제든 물어봐요. 호호호”
“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의 커피 타임이었지만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회사에서 벌어진 다양한 일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미스 고의 존재가 은근 힘이 되는 것 같아 우군을 얻은 느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아니.. 신입사원이 어디 있었던 거야? 얼마나 빠졌으면 인사만 하고 어디서 놀다 오기나 하고… 나의 신입 사원 시절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세상 참 편해진 거야”
국내 영업부로 3년 먼저 들어온 김 흥선 계장의 볼멘소리를 들었다.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차에 미스고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 소리 했다.
“흥선 씨는 해외 영업 팀원도 아니고 저와 함께 거래 은행 담당자 인사하러 다녀왔어요. 그런 일도 보고 해야 하나?”
미스고가 입을 쭈뼛이 내밀며 한마디 쏘아붙였다.
“아. 그랬구나. 아니 나는 안 보이길래 어디 갔는가 싶어서 한 말이지. 넘 신경 쓰지 말어.”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김 흥선 선배는 당당한 미스고 앞에서 바로 꼬리를 내렸다.
미스고가 내편을 들어주니 은근 기분이 좋아졌고 별다른 얘기 없이 그냥 자리에 앉아 신 과장이 내어준 업무 파일을 하나씩 보다가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참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군대 시절에도 이것보다는 시간이 빨리 갔을 것 같았다.
시계를 쳐다보니 11:40분.
벌써 점심시간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신 과장이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한다.
3명뿐인 해외 영업팀. 신 과장, 미스고, 그리고 나. 팀이라 불려도 되는지 참 의아했다.
국내 영업팀은 워낙 인원이 많아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 거래처 사장들과 밥 먹는 게 대부분의 일과 인 듯했다.
월말이면 원수처럼 대하던 거래처 사장들과 월중에는 어찌 그리 살갑게 대하면서 지내는지 참 신기한 풍경이었다.
3명의 해외 영업 식구들은 회사 근처의 피맛골로 향했다.
도보로 3분 거리이고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인 듯 앉기가 무섭게 주문도 없이 바로 음식을 내어 놓는다.
평소에도 식도락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 하는 신 과장의 단골 식당인 듯했다.
미스고의 얼굴에 잠시 불편한 모습이 보였다.
신입사원도 오고 했으면 좀 좋은 곳으로 가는 줄로 기대했던 눈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촌놈이었다.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 근처의 회사에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 기뻤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촌놈 출세했네…ㅎㅎㅎ
“오늘은 오랜 단골집에서 간단히 하고 다음에 정식으로 영문 씨 환영식 하러 갑시다’
“네. 잘 먹었습니다”
삼일절을 보내고 첫 출근을 한 지라 거리 주변은 전날 꼽혀 있던 태극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길거리를 걷는 직장인들의 옷차림도 아직은 겨울 옷차림 그대로였다.
또각또각..
앞서가는 미스고의 하이힐 소리가 마치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
중심을 잘 잡고 걸어가는 듯하더니 배수구 구멍에 굽이 끼여 넘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듯 일어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이힐을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제 새로 산 구두인데 안 망가져서 정말 다행이네요. 호호호호”
“구두가 그리 소중해?’
신 과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어본다.
“그럼요. 이게 얼마 주고 산 건데요. 이거 사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데요. 호호호호”
첫 출근한 날,
팀원들과 함께 했던 그날의 점심은 영원히 잊지 못할 그리움의 추억이 돼버렸다.
지금은 피맛골이 철거되어 추억의 장소로만 기억이 될 뿐이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미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뉴질랜드. 호주…그리고 명동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인도 거래선과의 업무 교신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내용은 정말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었다.
아마도 최대한 비용을 아끼기 위한 방편으로 짧고 간단한 형태의 팩스 교신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제 전화는 회사의 교환원에게 부서장의 결재를 받은 후 신청하면 신청자의 자리로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다 보니 교환원의 파워가 대단했다.
가끔씩 전화 연결을 잘해달라는 의미로 간식도 사다 바치고 해야 우선순위가 밀려나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곽상무가 신 과장을 다급하게 불렀다.
“신 과장. 우리 부서엔 주문하고 선적 안된 업체는 없지?”
“아니요. 대만 거래선이 아직 선적 진행을 안 하고 있는 게 한 건 있습니다”
곽 상무의 얼굴이 갑자기 확 변했다. 짜증 섞인 말투로 신 과장한테 얘기한다.
“사장님께서 주문하고 선적 안된 업체 명단을 받아서 각 부서에 오늘 중으로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하였네. 그동안 나한테는 아무런 보고도 안 하고 대체 일 어떻게 하는 거야?”
상사만 쳐다보고 살아온 곽 상무에겐 사장님의 지시 사항은 반드시 확인하고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 중 하나였으니 좋은 소리로 말할 리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모르는 일을 직원이 보고를 안 했다는 사실에 더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전 영문. 자네 중국어 할 줄 아나?”
곽상무는 나를 뽑아 놓고도 내가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했는지도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네. 중국어 전공을 했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배우기는 했지만 자주 사용을 안 했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오. 그래? 잘 됐구먼. 신 과장한테 대만 거래처 연락처 받아서 지금 내 자리로 와서 국제 전화로 확인해.”
부서장의 특권 중 하나는 부서 내에서 유일하게 교환원을 거치지 않고 통화할 수 있는 전화가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전화는 서울을 벗어난 다른 지역의 장거리 전화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가끔 부서장 없을 때 직원들이 몰래 사용하기도 했다.
연락처를 받아 들고 곽상무 자리로 이동하는 거리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해결 방안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천천히 수화기를 들고 전화 통화를 시작하자 사무실 모든 직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곽 상무님, 지금 전화가 통화 중인데요. 잠시 후 다시 연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통화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일부러 통화 중이라 하고 끊은 것이었다.
할 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후 상황도 전혀 모른 채 무작정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잠시 후에 다시 통화하도록 해봐.”
“네. 교환원 연결해서 제 자리 전화로 하겠습니다.”
“빨리 좀 서둘러.. 사장님 지시 사항이야.”
“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는 중에도 모든 이의 시선은 나를 따라서 움직인다.
국제 전화 한번 하는 게 이렇게 큰 구경거리가 되나 싶었다.
전화 연결을 시도하였지만 이번엔 진짜 통화 중이었다.
긴장이 되어서 그런지 속이 별로 편안하지 않았다.
잠시 화장실에 들러 여유를 갖고 무슨 말을 할지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교환을 통해 통화를 시도해 본다.
“웨이. 니하오! 밍 시엔 셩 짜이 마 ?”(안녕하세요. 명선생 계십니까?)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시작하자 사무실 내 모든 직원의 시선이 나에게 모이는 걸 느꼈다.
중국 영화에서나 들었을 법한 실제 중국어를 신입사원이 하고 있으니 나름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중국어 실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더 당당하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전후 사정을 잘 설명하고 신용장을 언제쯤 개설할 수 있냐고 물으니 지금 은행에 가는 중이고 회사 사정으로 늦게 개설하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씨에 씨에 밍 시엔 셩. 짜이 찌엔 !”(고맙습니다 명선생. 다시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곽 상무에게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약간의 개인 생각을 보태어 보고를 하였다.
“회사 사정으로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길래 여기 상황은 더 심한 문제가 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바로 은행으로 가서 신용장 개설을 해주고 사본이 나오면 바로 팩스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1시간 후에 팩스가 오지 않으면 다시 통화를 하겠습니다.”
“신입사원이 일 처리를 나름 간결하게 하는 구만. 오랜만에 일 좀 하는 친구가 들어온 것 같아서 다행이네. 계속 확인해서 다시 보고 하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나.”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니 모든 직원들의 눈빛이 의아함에서 기대감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차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고 무시당하면서 일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팩스 수신음이 나는 곳으로 갔다.
정말 약속대로 신용장 사본이 들어오고 있었다.
곽 상무에게 사본을 보이며 보고를 마쳤다.
환한 미소를 띠며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하는 말에 조만간 해외 영업은 내가 맡아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전화 한 통화로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보니 일 좀 제대로 하겠구먼.”
“전 영문 씨 대단하네요. 신입사원이 이런 상황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사실 이게 한 달이 넘은 상황이어서 곧 터질 문제였었는데 다행히 사장한테 보고 진행할 때도 영문 씨가 정리하였다는 얘기가 나올 겁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회사 전체로 퍼질 겁니다. 대단한 신입사원 들어왔다고.. 호호호.”
“별말씀을 요.. 그냥 시켜서 한 일 인걸요..”
미스고는 팩스 사본을 들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은행 담당자 만나러 바로 나갔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부서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어서 인지 다들 표정이 좀 밝아졌고 신 과장도 조금 여유가 생기는 듯 보였다.
신 과장은 상담실로 나를 따로 불러서 해외 영업부에 관련된 여러 상황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고 팩스 파일에 나와 있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거래처 별로 아주 자세하게 해 주었다.
회사 업무 첫날인 나에게 벌써 이런 얘기를 다 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얘기를 듣고 나니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
별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다들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기만 한다.
힐끔 곽상무 자리를 쳐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급히 시선을 돌린다.
곽상무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신문을 뒤적거린다.
그 어색함 속에서 미스고의 말발굽 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리더니 곽상무 앞으로 가더니 이런 말을 툭 던지며 인사를 한다.
“상무님.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결혼하려고 소개팅 있거든요.. 호호호호”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요.. 하하하하. 빨리 퇴근해”
그러자 사무실은 갑자기 활기가 넘치며 기다렸다는 듯 모두 가방을 챙기고 나간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나도 신 과장과 곽상무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광화문 주변의 도로엔 벌써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고 주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잔하러 가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며 골목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보낸 아주 긴 하루.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회사의 필기시험은 통과했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았고 취직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들을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다행히 설 명절이 끝나고 과거엔 꽤 괜찮았던 도양그룹으로 취업이 결정되었고 함께 살던 대학 친구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새로 방을 얻어서 나가게 되었다. 기존에 살던 곳에서 회사로 출퇴근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으니…
그래도 다행히 군 제대 후 특기를 살려 장난감과 문구 배달을 하는 곳에서 꽤 많은 돈을 모았고 졸업 전 까지는 과외를 하면서 경제적 독립을 조금이라도 빨리 이룬 덕분에 성신여대 주변의 한 옥탑방을 구할 수 있었다.
방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지나면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펼쳐진다.
지킬 앤 하이드.
한마디로 옥탑방을 정리하자면 이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지만 계절마다 변하는 이중성에 한없이 고민했던 그런 곳이다.
입사 첫날의 긴장과 두려움에서 해방된 나는 시청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분주히 나섰다.
길 주변의 테이프 파는 리어카에서 요즘 막 가요톱텐에서 1등 하고 있는 김건모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은 넌 웃을 수 있니….”
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언제나 붐비지만 오늘은 별로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들었던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면서 덜컹거리는 지하철 1호선의 벽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옥탑방으로 향하는 어두운 계단을 지나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오자 직장인으로 첫날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동굴처럼 만들어진 이불속으로 몸을 그대로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