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되었던 입사 첫날을 무사히 보내고 나니 사무실에 들어오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조금 일찍 출근하였지만 아무도 없다.
직원들이 출근 전이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전날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니 발 빠르게 대처를 잘한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커피 한잔을 타서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니 광화문 사거리가 출근 차량으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다.
촌놈 참 출세했네…
혼자 배시시 웃음 지면서 자리에 앉아 업무 파일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막 출근하기 시작한 선배 직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시작하자 다들 의아해하면서 목례만 간단히 하고 자리에 앉는다.
괜한 행동을 한 건가 싶어서 머쓱했지만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니 반응이 거의 비슷하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뭔 인사를 하고 그러나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끝은 보자 하는 마음으로 계속했더니 같은 팀의 미스고 만 반응할 뿐이었다.
“영문 씨도 좋은 아침.”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 업무 파일에 눈을 묻고 과거의 이력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신 과장이 3명뿐인 해외 영업팀 아침 회의를 진행하자고 한다.
내가 없었으면 미스고와 신 과장 둘이 무슨 회의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괜한 웃음이 나온다.
어제 대만 거래선과의 업무 정리가 정말 잘되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얘기부터 시작하더니 갑자기 업무 분담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어제 영문 씨가 업무처리를 하는 걸 보니 매출이 작은 국가부터 하나씩 맡아가면서 진행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네. 오늘부터 대만 거래처와 명동 주변에 있는 인도인 거래처를 담당하게. 오늘까지 그동안의 업무 파일을 잘 살펴보고 내일부터는 명동에 있는 거래처 인사도 다니고 그럽시다.”
입사 2일 째인 나에게 벌써 이런 기회를 주다니 정말 감격스러웠다.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껴졌다.
내가 알기로는 신입사원들은 주로 심부름만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하나 둘 업무를 준다고 들었는데 벌써 몇 개의 거래처를 담당하는 호사를 누리니 이 회사에 입사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과 나보다 더 큰 회사에 입사한 친구들의 잔 심부름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은근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
“미스고는 영문 씨 명함 정보 받아서 만들어줘요”. 신 과장이 본인 명함을 주면서 미스고에게 급히 제작을 부탁했다.
명함을 받아보니 한 면에는 한자로 된 이름과 한 면에는 영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영어 이름은 Chally Shin으로 적혀 있었다.
“해외 바이어들은 한국 이름 부르는 걸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만 부르는데 영문 씨는 첫출발부터 영어 이름을 하나 만들어서 사용하면 좋을 듯한데...”
“뭐가 좋을까요? 좋은 이름 추천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평소에도 문학과 어학에 다양한 지식을 겸비하였다고 소문난 신과장이기에 나의 첫 영어 이름을 만들어 주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전(全)이라는 성이 중국어 발음이 어찌 되는지 물어본다.
“네. 첸(CHEN)이라고 발음이 됩니다.”
“그러면 첸이라는 성과 잘 어울리는 하워드(HOWARD) 어떨까? HOWARD CHEN..”
“좋은데요. 부르기도 편하고 성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하고.. 그걸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하워드로 부르도록 합시다. 하하하.”
하워드 첸 (Howard Chen).. 은근히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무심코 내가 입고 있던 코트를 쳐다보니 브랜드 또한 비슷하게 HAWARD였다.
영어 이름 또한 절묘한 우연이라 생각하였다.
해외 영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 실제로 대학에서 무역 관련 전공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중국어 전공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출발한 직업이었고 거대한 땅덩어리의 중국 대륙을 상대로 일인당 이쑤시개 하나만 팔아도 돈이 된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취업을 위해 지원했던 모든 회사에 해외 영업 부분으로 지원을 한 것뿐이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 “세계 경영”을 외치던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이 해외 영업에 대한 꿈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007 가방 하나 들고 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해외 업무를 살펴보니 실적 달성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자주 벌어지고 있었고 그런 일들에 대해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영업은 숫자 놀음이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적만 달성하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용서되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실적 달성의 빛과 그림자.. 마치 옥탑방의 지킬 과 하이드처럼…
점심시간 무렵 명동으로 신 과장과 함께 점심 겸 거래선 인사 겸 해서 사무실 밖을 나간다.
신 과장의 음식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항상 탁월하였다.
무얼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워낙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기도 했지만 신 과장은 한 끼를 먹어도 정말 맛있는 곳만 소개해주는 식도락가라 칭할 만했다.
해외 거래선의 한국 방문 접대에는 늘 신 과장이 장소를 정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가볍게 점심을 마치고 명동에 있는 거래처로 들어갔다.
해외 거래처이지만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인도인 에이전트가 대부분이었고 거의 같은 빌딩에 다 입주해 있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인도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소통은 영어로 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운 좋게 내 고향 설악산을 방문했던 Ms Selly라는 외국인 덕분에 영어 회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상황이었다.
바로 비즈니스였기 때문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에 무조건 오케이 하는 순간에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올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 과장이 먼저 유창한 영어로 내 소개를 시작하였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직원이며 이름은 Howard Chen이고 앞으로 당신과의 모든 업무는 이 친구와 할 거니까 잘 지내길 바란다. 신 과장이 인사하라고 손짓을 한다.
“Hi Mr Sunil, Nice to meet you.”
영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쑤닐 씨가 유창한 우리말로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반가워요. 하워드. 저는 쑤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어. 한국말 잘하시네요.”
웃으면서 물어보았지만 무언 가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진정한 비즈니스 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 거주하며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해당 국가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나도 언젠가 해외에 거주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 친구처럼 현지언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현지 거래선과 현지인들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정한 현지화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쾌한 상담을 마치고 몇 컨테이너 분량의 수출 주문량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졌다.
이게 영업의 묘한 멋이기도 하고 맛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과장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곽상무에게 상담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하였고 곽상무는 보고 받는 동안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제야 해외 영업이 조금 살아나는 것 같구먼. 팀워크를 잘 살려서 앞으로 잘했으면 좋겠네.”
신 과장도 곽상무의 격려에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영업의 업무 보고는 둘 중에 하나이다.
실적달성에 관한 내용과 사고에 관한 내용… 실적 달성에 대한 결과 보고는 내가 잘해서 한 것이고 사고에 대한 내용은 실적 달성을 못한 이유를 남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킬 과 하이드…
한없이 우쭐대다가 끝없이 이유를 둘러대야 하는 이중성을 가진 직업이 영업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난달 문제되었던 실적 문제도 잘 마무리되고 월초부터 주문을 받게 되면서 해외 팀은 활기가 돌았다.
월말까지 대략적인 실적 달성에 대한 예상도 기능해졌다.
“하워드. 지금 당장 홍콩에 있는 Mr Terry 한테 전화해서 본인 소개도 할 겸 업무 관련 얘기도 좀 하세요.”
이번엔 영어였다.
홍콩 바이어지만 본토 중국어를 전혀 사용 못 하고 광둥어와 영어만 사용 가능 하다고 한다.
부서의 모든 사람들 시선이 또 나에게 집중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긴장감이 밀려온다.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라면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각인을 시켜주자 하는 오기도 생겼다.
교환원을 거쳐 전화 신청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내 자리로 전화가 걸려온다.
‘Hi. My name is Howard. Nice to meet you by phone call.”
그래도 영어는 중국어와 다르게 자신이 있었다. 대학 재학 시절 영어 동아리를 하면서 회화에 대한 두려움이 덜했고 틈틈이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의 인권과 관련된 업무의 통역도 좀 했던 터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공인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업무와 관련된 몇 가지 일을 정리하고 조만간 출장을 가서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인사말을 끝으로 통화를 무사히 마쳤다.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은 호기심에서 약간의 부러움으로 바뀐 걸 느낄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
남들은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신입사원이 부서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나름 언어적인 감각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뛰어나다 생각은 했지만 실전에서 바로 응용하면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나 또한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촌놈이라고, 신입 사원이라고 무시당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을 시킨 것 같아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도 입사 이틀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니 나 스스로도 얼마나 뿌듯했겠는가.
이틀 만에 벌어진 이 상황은 암암리에 회사 전체에 소문이 났고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부서의 팀장들은 부서장에게 사람 볼 줄 모른다는 핀잔도 들었다고 했다.
당황스러운 소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소문에 대해서 나 자신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하하하하.
주도적으로 업무를 챙기면서 하는 회사 생활은 신바람이 났다.
이상하게도 내가 업무를 맡으면서 한동안 거래가 중단되었던 업체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매달 실적에 대한 고민 때문에 탈모 현상까지 왔던 신 과장의 업무도 활기가 느껴졌다.
미스고는 그동안 할 일 없이 편했는데 나 때문에 일이 많아졌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실적 달성의 만족감을 즐기는 듯 업무 처리 속도도 빨라지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직장 생활의 즐거움이 뭐 있겠는가.
동료들과 함께 팀워크를 이루어 목표 달성을 위한 여러 가지 과정을 함께 만들고 다듬고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기쁨을 서로 나눠가지는 것일 뿐이다.
그 과정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현실이 직장 생활에 대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일 뿐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지만 정글 같은 직장인의 현실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나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 생활에 재미를 느끼며 일한다고 볼 수는 없다.
어쩌면 시키는 일의 반복 활동을 통해 얻어진 경험으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업무를 진행할 것이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얻어낸 아이디어는 경험에 의한 생각에 가로막혀 제대로 빛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만 듣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사고와 오로지 경험에만 의존하는 행동의 결과는 퇴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직장과 사회생활의 공통된 점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일하는 기쁨을 찾을 수 있고 그 일이 결국엔 좋아하는 일로 변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글 같은 직장 내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원하지 않는 호흡을 함께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피상적 일체감.
원하지 않지만 응해야 하는 경우가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 이곳 정글 같은 직장생활일 것이다.
지킬 과 하이드…
내 마음속엔 어떤 모습이 자리 잡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