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계장… 정말 이럴 겁니까? 갑자기 사표를 내면 어떡합니까?”
“네.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보세요. 전 계장이 빠지면 해외 영업은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만이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내가 다 들어줄 테니 사표만 내지 마세요. 제발…”
“그러니 있을 때 잘하지 그랬습니까? 사람 하나 빠진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면 잘못된 조직이죠. 아마 새로운 후임자가 와서 잘 이끌어 갈 겁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나는 사표를 하전무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하전무의 애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계장… 사표만은 제발… 제발…”
눈을 떠보니 동이 막 트기 시작하였다.
비록 꿈이었지만 회사에 남아 달라며 간절히 요청하는 하전무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는 생생히 기억이 났고 나의 팔을 잡으며 흐느끼던 하전무의 모습이 생각나 속웃음이 나왔다.
도양에서의 마무리를 위한 마지막 관문을 넘는 날이라 그랬는지 멋지게 사표를 던지는 꿈을 꾸었다.
평소에 사표를 멋지게 던지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해봤지만 사표는 회사라는 거대 조직에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의사 표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는데 굳이 멋지게 보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광화문 경찰서 건너편에 있는 Wendy’s에 들러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여전히 사무실 출근은 항상 내가 제일 먼저였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번잡한 출근길의 광화문 사거리를 내려다본다.
첫 직장에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지만 오너가 아닌 이상 뼈를 묻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회사는 종착역이 아닌 그냥 잠시 스쳐가는 정거장에 불과할 뿐이고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출발역이 된다는 경험을 도양에서 충분히 느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영업부 직원들이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이 되니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군기가 빠졌다며 이 승진 이사가 맨날 정신교육을 시켜도 이 이사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으니 그 정신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듯해서 안타까운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내가 상관할 필요도 없고 무너져가는 회사에서 나타나는 직원들의 일상인 듯 보여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전 계장, 올해 해외영업만 실적 달성이 될 것 같다고 하던데… 맞는가?”
국내 영업의 김 흥선 계장이 충청도 사투리를 쓰며 부러운 듯 물어보았다.
“네… 올해는 운이 좀 좋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실적 달성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러다 내년에는 전대리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닌 지 모르겠어. 실적달성을 매년 해버리니 승진은 당연한 거고… 허허허.”
“별말씀을요. 승진이 뭐 제 맘대로 됩니까? 다 때가 있는 거죠... 헤헤헤.”
“우리 국내영업은 올해도 다 죽 쒀서 분위기가 엉망이야. 거기다 비용도 못쓰게 하니 실적을 맞출 수가 없지. 앞날이 걱정이다 걱정… 휴…”
다소 느린 말투의 김 흥선 계장은 항상 긍정적이었지만 연말이 다가오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며 연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어쩌면 김 흥선 계장만의 고민이 아니라 회사 전체 조직원의 고민이고 그 고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곧 부서 통폐합이 시작이 되면 절반에 가까운 직원도 정리가 되어야 하기에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시작되면 더욱 처절하고 참담한 상황이 될 게 뻔히 보였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이 승진 이사가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고 준비한 사표를 결재판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 전 계장… 아침부터 무슨 일 있어?”
“네. 이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서 앉게. 커피 한잔하겠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마셨습니다.”
사표를 던지는 행위 자체가 정당한 의사 표시이지만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이사님. 그동안 많은 고민을 했는데…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뭐라고? 아니… 잘 나가는 전 계장이 왜 회사를 그만두려고 그러는 거야?”
이 이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사표를 쓰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도양에서는 더 이상 제가 꿈꿨던 회사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뒷짐만 지고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직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회사에서는 더 이상 내 청춘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쉬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자네 얘기는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이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하면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에게는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올 거라 확신하네. 다시 한번 생각해 주면 좋겠네.”
이 승진 이사는 사표를 반려하며 과거에 자기가 경험한 일들을 얘기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전 계장은 아직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도양 같은 회사가 오히려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에게는 날개를 달기가 훨씬 쉬운 곳이네. 나도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잘 버텨서 동기들보다도 먼저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도 되고 그랬으니까. 내 생각에 전 계장은 나보다 더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좋게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이미 굳혔습니다.”
“아… 그래? 난 좀 더 고민을 해줬으면 하는데… 자네의 생각이 너무 확고하니 하전무에게 보고하도록 하겠네.”
“잘해 주셨는데…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후임자 정해지면 업무인수인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나가 보시게.”
면담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하고 나오니 그제야 후련한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멋지게 던진 건 아니었지만 구차한 이유를 대지 않고 나의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한 것은 마음에 들었다.
“전 계장… 사표를 냈다는 말이 사실인가?”
잠시 바람을 쐬고 사무실로 들어오니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이미 퍼져 있었고 김 흥선 계장은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후임자만 정해지면 인수인계 마치고 그만두는 걸로 했습니다.”
“전 계장은 실적도 좋고… 잘 나가는데… 갑자기 사표를 냈다는 게 믿기지를 않아서…”
“지금 아니면 사표를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헤헤헤.”
“우린 사표 내기가 겁나서 주저주저하는데… 잘 나갈 때 사표를 던지는 전 계장이 부럽네. 허허허.”
나름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며 다들 부러워했기에 나의 사표 소식은 꽤 흥미로운 험담의 재료가 될 것 같았다.
“전 계장님… 그날이 오늘이었어요? 축하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호호호.”
미리 알고 있던 미스고도 갑작스러운 나의 사표소식에 놀라움과 축하를 동시에 해주며 웃었다.
“네. 더 이상 늦추면 계획에 차질도 생기고 빨리 결정을 해야 후임자도 정해줄 것 같아서… 하하하.”
“그동안 사표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을 여럿 보냈는데 오늘처럼 기분이 좋은 적은 없었는데…호호호.”
“내가 떠난다는 게 좋은가 보네요… 하하하.”
“좋지요. 답이 없는 이곳을 떠나니 축하해 줘야 죠. 앞으로 더 멋진 일이 생길 텐데…호호호.”
함께 웃으며 연말 마감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하전무의 비서로부터 급하게 올라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 승진 이사가 나의 사표와 관련해서 보고를 한 것 같았다.
“앉게. 그리고 이 이사는 내려가 봐.”
평소와는 다르게 무뚝뚝한 말투였고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도 조금 어두워 보였다.
“자네가 사표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네.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불만이 뭔가?”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게 뭔가?”
“도양에서는 더 이상 제가 꿈꿨던 회사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직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내 청춘을 바치기로 했던 입사 초기의 마음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쉬면서 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회사는 지금 자네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고 앞으로 더 큰 일을 맡기려고 하는데…”
“그동안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이번에 승진도 시키려고 했고…그리고 자네에게 홍콩 지사를 만들게 하고 지사장으로 발령을 내라는 사장님의 지시도 있었는데…”
“생각해 주셔서 고맙지만… 도양에서의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알겠네. 자네가 내린 결정에 후회 없기를 바라네.”
“죄송합니다.”
승진과 홍콩 지사장이라는 하전무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내가 결정한 일은 하전무의 제안보다 훨씬 값진 미래의 내 자산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앞으로 벌어질 도양에서의 또 다른 스캔들이 회사의 발목을 잡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신 차장이 제출한 차명 부동산 거래와 관련된 사장 일가와 하전무의 배임 혐의는 검찰에서 이미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고 양 목장 프로젝트의 대출과 관련된 아랍은행의 홍하나 전무와의 리베이트 관련 혐의도 검찰에서 내사를 시작하였다는 얘기를 신 차장을 통해서 들었다.
홍 하나 전무와의 리베이트 관련 혐의는 하전무가 사판 그룹에 근무할 당시 인수합병에 필요한 모든 자금 대출을 홍 하나 전무를 통해서 진행했고 비밀 계약서를 통해 리베이트를 받아왔는데 하전무에게 반감을 가진 전직 사판그룹의 직원이 공익제보를 하면서 알려졌고 이번 양 목장 프로젝트도 홍 하나 전무가 관련된 것을 검찰에서 확인하고 내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 공짜도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비밀로 진행된 일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알고 있고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정글의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
에필로그
훗날 도양상사 사장은 늘 재벌에게 내려지던 삼오 법칙이 적용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석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였으며 하전무는 홍하나 전무와의 리베이트 거래로 구속되었고 두 사람의 불륜 혐의가 하전무 부인에 의해 밝혀지며 간통죄까지 적용되어 아주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러야 했다.